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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글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凡草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맑음
(범초산장 이야기 799회) 시골을 좋아하는 이유
내가 어렸을 때 몇 년 동안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가 일을 안 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잠시 시골로 내려갔다. 형편이 어려워서 시골로 간 것이지만 나는 좋았다. 동네 형들을 따라 다니며 잠자리를 잡고 풍뎅이도 잡았다. 곤충들이 놀이감이었다. 저수지 둑에 가서 거미줄로 잠자리 채를 만들어 왕잠자리를 잡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저수지에 자주 놀러 갔는데 한 번은 태풍이 불어서 숨을 쉬기가 곤란했다. 그런 힘든 경험조차 싫지 않았다.
한 번은 내 또래의 여자 아이가 나를 업고 가다가 넘어져서 장독대에 머리를 찧었는데 너무 아파서 오래 울었다. 그때 다친 자리가 지금도 뒷 머리에 볼록하게 남아 있는데 그런 상처조차도 어쩐지 아련한 추억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시골에서 보낸 몇년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서 어른이 된 뒤에도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갓 결혼했을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조카 둘까지 데리고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조카들도 제 갈길을 간 뒤부터 시골집을 사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가 30대 중반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월급은 아내에게 다 넘겨주고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거나 공모전에 글을 보내서 당선하고 받은 상금, 글쓰기 강연, 도서관에 가서 강연을 하고 받은 강사료 등.... 투잡 아닌 투잡을 하면서 푼돈을 계속 모아 나갔다. '반드시 시골집을 사고야 말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에 어렸을 때 힘든 시골일을 했다면 아마 시골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 아직 안 다닐 때라 부담없이 놀러 다니기만 했기 때문에 시골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 당시는 유치원도 없어서 마냥 놀기만 했다. 공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렸을 때 공부가 힘든 줄을 알게 되면 자꾸 꾀를 부리면서 하지 않을 테고, 많이 놀면서 공부를 적당히 하게 되면 정말 공부를 해야 할 때가 되면 온 힘을 다해 파고들 것이다.
시골집을 사려고 저금을 꾸준히 한 결과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 술이나 담배를 안 하고 푼돈을 꼬박꼬박 모은 근검절약 덕분이었다. 그러나 위치가 좋은 곳은 돈이 모자라서 사지 못했고, 부산일보에 난 광고를 보고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갔는데 비포장 길을 한없이 들어갔더니, 김해 무척산 아래 여차리라는 마을에 기와집이 있었다. 대지 170평에 용산초등학교 옆이라 마음에 들어서 사기로 했다. 그 당시 돈으로 340만 원을 주고 샀다.
그때는 우리 집에 차가 없어서 거제리 아파트에서 구포까지 버스를 타고 갔고, 구포에서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원동까지 간 다음에, 원동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10분 걸어 가면 시골집에 닿았다. 우리 집 세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주말마다 소풍 가는 것처럼 비행기 말고는 다 탔으니까.
그런데 2년 정도 오가다가 결국 자동차가 없어서 불편하였기 때문에 그 시골집을 팔고 돈을 더 보태어 김해군 상동면 마사리에 임야 3천 평을 샀다. ( 뒷 이야기인데 그 시골집이 있던 자리는 요즘에 와서 완전히 전원주택 단지가 되어 그 집을 갖고 있었더라면 큰 돈이 되었겠지만, 사람이 어찌 미래를 알 수 있겠는가?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다.)
임야를 10여 년 이상 갖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개간을 시작했다. 100여 평 정도 평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조립식 집을 지어 놓으니 주말농장 비슷하게 되었다. 거기를 좋다고 주말 마다 몇 년을 오고 갔다. 거기서 벌어진 내용은 범초산장 이야기 1편부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곳조차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과수원 같이 만들어 놓고는 팔고 밀양 노루실에 있는 시골집을 사서 5년을 즐겁게 오가다가 지금은 부산 두구동에 범초산장을 마련하여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시골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아내가 여기 저기 많이 따라다녔다.
엊그제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웃었다. "나도 어지간히 당신한테 잘 맞추어 주었지요?" "그건 인정해." 그런 고마움을 항상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해외 여행 갈 기회가 있으면 두말 없이 보내주었다. 나는 14개국 정도 돌아보았지만,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아내가 아프리카를 한 달 정도 여행하게 해줄 생각이다.
여기는 자동차가 없어도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쉽게 들어올 수 있다. 그동안 시골집을 오래 갖고 있지 못한 이유가 자동차가 없어서, 생활비가 부족해서, 자녀들 교육비 때문에, 산속 외진 곳이라 위험해서 등.... 여러 이유 때문이었는데, 지금 범초산장은 여러 장애물을 다 넘어왔기 때문에 싫증날 때까지 갖고 있을 있을 생각이다.
내가 시골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생각나는 대로 손꼽아 보아도 10가지가 넘는다.
1.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하다. 2. 무공해 채소와 약초를 재배할 수 있어서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나만큼 아파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골을 더 고집한다. 시골을 가까이 하고 자연을 자주 찾으면서 건강한 몸이 되었다. 3.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없다. 4. 꽃을 가꾸면 마음이 기쁘다. 5.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 농사용 전기에다 관리비가 없다. 6. 적당한 노동을 할 수 있어서 장수에 도움이 된다. 7. 동물을 키울 수 있다. 8. 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산 가치가 늘어난다. 오늘 범초산장으로 들어오면서 보니 길을 새로 만들고 있었다. 부산 외곽 순환 고속도로 나들목도 부근에 들어서는데 길까지 새로 뚫리면 땅값은 더 올라가기 마련이다. 9. 주위가 숲이라 소음이 없다. 10. 사계절마다 경치가 자꾸 변하고 날마다 구경할 것이 많다.
신세계 동화교실 우리아씨가 이번 8월에 보름 동안 미국 여행을 하고 왔다. 여비를 보태주지도 못했는데 선물을 주어서 감사했다. 초콜릿 속에 술이 들어있는 것은 처음 먹어보았다. 달콤하면서 술맛이 느껴져서 희한했다.
8월 10일 목요일 저녁에는 금정문화회관에 갔다. 한국 창작가곡협회에서 주관한 <우리 시 우리 노래> 발표회를 했는데, 글나라 제자들이 쓴 가사에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서 노래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좋은 노래들이 많아서 기쁘게 감상했다. 제자들 덕분에 모처럼 좋은 구경을 했다. 김춘남, 이자경, 조윤주, 황미숙, 안덕자씨들이 나왔고, 부산아동문학 회원들 중에서는 선 용 선생님과 하빈씨가 참석했다.
오늘 산장에 들어왔더니 계곡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야, 물이다! 하늘이 선물한 공짜 물이다. 올 여름에는 부산에 비가 거의 안 내리더니 수요일에 비가 내려서 도움이 되었다. 사람은 저 혼자 잘 될 수가 없다. 주위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물도 그렇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과 사람을 섬기며 살아가야겠다.
율무 씨앗 남은 것으로 동화팔찌를 마저 만들었다. 동화 쓰는 제자들과 동화작가들에게 나누어 주니 좋아해서 쉬는 틈틈이 한 알 한 알 꿰어서 만든 보람이 있었다.
염주가 더위를 이겨내고 첫 알을 머금었다. 아, 저 이슬 같은 영롱한 염주여! 위염에도 좋고, 위궤양과 위암에도 큰 효능이 있는 염주다. 이제 한 알을 만들었으니 차차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가뭄에도 물을 주며 키운 보람이 있다.
익모초 꽃이 피었다. 여자들에게 좋은 약초다. 나도 여성화가 되고 있으니 먹으면 도움이 될랑가?
작년 늦가을에 심은 비파 나무가 잘 크고 있다. 여러 가지 좋은 효능이 많아서 집안에 한 그루 심어 놓으면 환자가 없어진다고 하는 나무다.
달맞이 꽃도 많이 키우고 있다. 석산리에 있는 범초텃밭에도 달맞이꽃이 많은데 양동댁 아주머니는 풀을 키운다고 웃었다. 풀이 아니라 좋은 약초인데....ㅎㅎ 혈액순환에 좋고 기미를 없애주며 고지혈증에도 좋다면 풀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참, 아는 분이 텃밭을 빌려 쓰고 싶다고 해서 양동댁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졸랐더니 선선히 100평 정도를 빌려주었다. 평소에 잘 사귀어 두었더니 필요할 때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다. 나도 더 잘해야겠다.
마타리가 한창이다. 수북하게 모여서 피어 있으니 더 보기가 좋다.
6월초부터 키워 온 풍선덩굴이 열매를 많이 맺었다. 꾸준히 노력하면 저렇게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수확이 적으면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늘 저녁밥은 뽕잎에다 가지를 넣은 밥 잡곡과 콩까지 그득해서 완전히 영양밥이다. 나 혼자 있을 때 마음대로 해먹는다. 누가 못 먹겠다, 잡곡 많이 넣지마라, 그런 소리 안 들어서 좋다.
산장에 널려 있는 비름, 명아주, 쇠비름 3총사를 데쳐서 된장으로 무친 나물이다. 부드럽고 연해서 아주 맛이 좋다. 식물 오메가 3가 풍부한 반찬이다.
막걸리를 반주로 뽕잎밥을 먹었다. 참치 회가 있으니 단백질도 보충이 된다. 혼자라도 라면은 끓여 먹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를 반찬 삼아 맛있게 먹었다.
후식은 토마토와 삼잎국화 꽃차다. 삼잎국화는 봄에 나물로 먹고 여름에는 꽃차로 마시니 참 좋다. 석산리 범초텃밭 주변에서 겹삼잎국화 꽃이 핀 것을 보았는데 가을에 몇 포기 얻어다가 심어야겠다. 겹삼잎국화 꽃이 다알리아처럼 더 이뻤다.
펌프를 샀을 때 백담그린민박님이 갓 씨앗을 덤으로 보내주어서 심었더니 벌써 먹을 만큼 커졌다.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갓은 벌레도 안 먹어서 좋다. 갓에 참치회를 싸 먹으니 맛있다. 이러니 시골을 좋아할 수밖에.
며칠 전에 막내딸이 사위와 산장으로 놀러온 적이 있는데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방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야, 나방 한 두 마리 보고 뭘 그렇게 놀라냐? 그렇게 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사람은 안 무서운데 나방은 무섭단 말이에요." "참 웃기네. 난 사람은 두려워도 나방은 몇 백 마리가 있어도 괜찮은데...." 봉현이는 몇 만 명 앞에서 노래를 불러도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방을 보고는 기겁을 한다. 나는 워낙 소심해서 100명이 넘으면 떨려서 말을 제대로 못한다. 딸이 나방 앞에서 놀라는 것을 보니 내가 공연히 떨었나 보다. 이제부터 대중 앞에서 강연할 때는 나방으로 여기고 떨지 말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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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