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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날마다 돌아보는 기적☆]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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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돌아보는 기적◎]
고정애 시집 / 문학의 전당 시인선 316 / 문학의전당(20120.01.17)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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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기적
3초 2초 1초
곧장 레이스로 나아간다
총 길이 약 9만 킬로미터
달까지 거리의 4분지 1 거리를
1분에 세 번, 서로가 뒤질세라
굽이굽이 빈틈없이 내달리는
핏줄 속 피톨이다
살고 있는 한,
하루 4320회, 연 157만 6800회
우주여행 순환선을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붉은피톨 흰피톨
날마다 기적이다.
등대
아메리카 인디언 아기에게는
웃음 대부모(代父母)가 있다고 하지
갓난아기를 웃게 해주고
그 아기가 평생토록 웃음을 잃지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역할 맡는다 하지
황량하고 어두침침한 세상
연분홍 복사꽃 빛줄기로
환하게 물들여 준다고 하지
촉수 돋우어
따뜻한 눈빛으로 지긋이 굽어보며
환히 불밝혀 길잡이가 되어주는
믿음직한 어른이 산다고 하지
심장의 힘
물오리가 거센 물결에
우아한 자태로 떠 있는 것은
수면 아래 물갈퀴가
힘껏 물을 젓고 있기 때문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몸의 베이스캠프에서
불철주야 박동으로
긍정(肯定) 메시지를 송신하기 때문
쿵 쾅 쿵 쾅
활화산의 들끓는 마그마로
심장이 맥을 촉진하고 있기 때문
게발선인장
한 뿌리 두 뿌리
새끼에 또 새끼를 거느려
부피가 늘어난 게발선인장
분(盆)이 곧 쪼개지겠다
폭발하겠다
그동안
그냥 살아오지 않았노라
실적을 보여주는
게발선인장
바위그림
아프리카 북부 황량한 사막
모래밭과 바위 틈새에는
바위그림들이 있다
코끼리 하마 악어 물소
갖가지 물고기들 새겨져 있다
지금은 비록
모래바람 휘몰아 쳐 눈멀게 하고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열사지만
아득히 먼 그 옛날 한때
푸른 초목 우거져
생명력이 넘쳤던 사하라 사막
경로당 양지에서 졸고 있는
주름진 노인에게도
싱그럽게 파릇파릇
생명력이 넘치던 시절이 있다
칼
칼 한 자루 선물 받았네
끝이 뾰족하고 시퍼렇게 날아 선 칼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이네
쓰고 나서 얼른 가두어두네
석기시대부터 유용하게 쓰여 왔네
호신용 은장도로
구약성서에선
유디트가 적장의 목을 쳤던 칼
쓰임에 따라 이기와 흉기
양날을 갖추고 있는……
일사불란
중미 파나마 열대림에서
나무 잎사귀를 마름질한다
이와 턱 사이 날로
동그스름 크기와 모양이
판에 박은 듯 가지런히
마름질한 자재를 나르는 일꾼개미
날이 다 닳도록
일사불란(一絲不亂)
주어진 일에 몸을 바친다
그곳에는 사(私)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집념
중미 코스타리카 우림지역에서
아스라이 곧추선 브로메리아나무를
엄지손가락 크기 알록달록 아름다운 무늬의
딸기독화살개구리가
한 발 한 발 기어오른다
던월을 올라가는
토미 칼드웰보다 더
아슬아슬 수직동반 곡예를 하고 있다
무릉도원
정수리의 아늑한 웅덩이에
이르기까지
숙적
유리벽에 몸을 부딪고 있다
길이 35센티
무게 0.2킬로그램의 맹금
수명 약 10년인 황조롱이
자신들의 영토에
특수유리 갑옷 입고
우후죽순 솟는 마천루
투명 절벽에 부딪고 있다
비명횡사하고 있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이번에는 반드시
궤도진입에 성공할 태세
박사들이 오만 가지 부품을 점검하면서
집요하게 시도하는 로켓발사
서울시 중구 청구로 321번지
전신주를 칭칭 감아 정수리까지
초록으로 뒤덮은 진보랏빛 나팔꽃이
터질 듯 충전시킨 태양에너지로
카운트다운!
씨방에서 씨를 높이 쏘아 올린다
불사조
가을바람 타고 있다
탱탱한 홀씨 새하얀 망사 베일 쓰고
하늘하늘 새처럼 날고 있다
벌개미취 홀씨는 불사조
심술궂은 동장군 들이닥칠 그 이전에
멀리 더욱 멀리 날아라
겨울 이겨내고
보랏빛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더 멀리 훨훨
날아라
비로소 들리는
단음으로 울리는 단순한 소리
크지도 작지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소곳이 치고 있는 북소리
영화음악 <라라의 테마>를 듣다가
젊은 연인
오마 샤리프와 줄리 크리스키 모습을 떠올리다가
메인 멜로디 그 등 뒤에서 제때 제때
은은한 여운으로 음악을 완성시키는
타악기 소리가 있다
눈 감고 귀 기울여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인디언식 주문(呪文)
“내일 날씨 좋도록 해 주거라
내일 날씨 좋도록 해 주거라”
솜뭉치를 하얀 천으로 감싸
목에는 실로 칭칭 감아
눈 코 입을 그려 넣었던 인형
일만 번 외우면
소원대로 이루어지리라 믿는 아메리칸 인디언
그 염력(念力)
바위마저 뚫는다 했지
내일은 학교에서 즐겁게 소풍 가는 날
헝겊인형 처마에 매달아 쳐다보면서
기도하듯 주문 외듯
곡조에 맞추어 노래 불렀지
누명
탕! 탕!
거위 소탕 작전이다
미국 야생동물관리국 직원들은
거위들을 보는 족족 처분했다
거위 알 1739마리로 줄어들었다
여객기 엔진에 부딪는
거위들에 가하는 대대적 소탕
세상에는
그저 제 갈 길 가는 것도
죄가 되는 법이 있다
아름다운 시위(示威)
아파트 입구 양지바른 울타리
초봄에는 개나리
늦은 봄엔 줄장미
여름에는 나팔꽃이 핀다
계절 따라 번갈아
아름답게 꽃 피우며
지나는 이 눈을 즐겁게 한다
알자스로레인, 센카쿠,
테베트, 잠무 카슈미르……
피 튀겨 싸우는 사람들 향해
보라는 듯이
바오바브나무
마다카스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 큰 섬나라
아름다운 해변도시에
줄서 있는 옹기항아리들
19세기 우리나라
천주학도들이 깊은 산골에 숨어서 빚어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팔아서 살았던
커다랗고 길쭉한 옹기항아리
나란히 줄지어 하늘을 이고 선 채
푸른 잎가지 깔때기 삼아
생명수 가득 가득 채우고 있다
하느님께서 뿌려주시는
물 마시고 있다
새싹들
아기의 연분홍 잇몸에
뾰족뾰족 솟아나는 젖니 같다
밤낮없이
질끈 눈감고, 두 손 꼭 쥐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온힘 오므린 입술에 모아
젖을 삼키고 있는 아기 같다
머잖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진초록 거목으로 폭발할 태세
옥토에서 오글오글 돋아나는
연노랑 저 새싹들
아버지를 닮았다
신문지에 싸놓았던 감자
풀어 보니 새순이 돋아 있다
오목한 눈자리마다
연둣빛 싱싱한 줄기가
키를 죽죽 늘이고 있다
감자 한 알이 옥전(沃田)이라도 되는 양
꽂은 빨대로 질끈 눈감고
막무가내 등골을 빨아대는
왕성한 식욕
윤기 반지르르
흰 속살이 탱탱하던 감자가
어느새 찌그러져 주름투성이
밥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하얀 쌀밥이
그릇에 수북이 담기고 있네
그 옛날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 맺히도록
맛있게 먹던 흰쌀 고봉밥
씹기도 전에 봄눈처럼 슬슬 녹던
수백 그릇 흰쌀 고봉밥
새하얀 쌀밥을 산모가 먹으면 어느새
아기의 밥, 유제품(乳製品)되네
기실 엄마는
무공해 유제품 공장이라네
청구역에서
스크린 도어 유리에
어렴풋이 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디에선가 낯익은 사람
내 아버지 같기도
내 어머니 같기도 한 얼굴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다
손 흔들자 손 흔들고
돌아서면 함께 돌아선다
180도 빙그르르 돌아 앞으로 다가가니
온전히 한 몸이구나
그래서 늘 함께 지내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
윤씨 정씨 박씨 한씨에게
안부 묻고 반겨주는 글을 보낸다
한글과 영어 다문자 소문자
기호와 숫자 아모티콘 고루 섞어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글을 보내며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그리도 쉬운 글 가르쳐 드리지 못해
끝내 문맹이었던
1907년생 어머니 생각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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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당랑거철螳螂拒轍
짧고 부족한 대로 용기를 내어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월남전을 몸소 겪으며
용케 살아남은 세대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운 그분들을 떠올리고 기리면서
아낌없는 은덕 또한 가슴 깊이 새긴다.
2020년 1월
고정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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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詩集 [※날마다 돌아보는 기적※]
[ 해설 ] -
통속通俗과 전율戰慄의 미시사微視史
백인덕 시인
1.
사실(real)은 언제, 어떻게 사건(event)이 되는가. 내가 관여(關與)하든 할 수 없든 우주는 온갖 일(work)들로 채워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셈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치를 벗어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고 지속하거나 소멸한다. 문자 그대로 특별함은 보편성에 함몰하고, 차원을 논하기 이전에 ‘무(naught)’로 회귀하려는 성향만 강화된다. ‘사건’은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같은 ‘사실’의 무더기 위에서 반짝이거나 솟구쳐 오른다.
만약 당신이 산중턱까지 안개가 가득한 창을 내다보고만 있다면 이 겨울은 얼마나 무감각하고 무의미할 것인가. 이 무의미를 지우고 그 흔적 위에 존재의 음영(陰影)을 다시 새겨 넣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사명이다. 시인의 호명(呼名)이 존재 일반으로 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무화하는 운명에 맞서 언어를 조직하는 이 힘의 근원은 어디인가, 무엇으로부터 끈질긴 생의(生意)가 솟구치는가?
고정애 시인은 앞의 질문에 대해 지극히 명쾌한 대답을 가슴에 품은 채, 그 변주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숱한 사실들을 일종의 존재적 사건으로 통렬하게 바꿔놓고 있다. 이를 통해 생의를 고양(高揚)하는 것은 물론 매 순간 생의 비의(秘意)까지 포착하고 있다.
3초 2초 1초
곧장 레이스로 나아간다
총 길이 약9만 킬로미터
달까지 거리의 4분의 1 거리를
1분에 세 번, 서로가 뒤질세라
굽이굽이 빈틈없이 내달리는
핏줄 속 피톨이다
살고 있는 한
하루 4320회, 연157만 6800회
우주여행 순환선을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붉은 피콜 흰피를
날마다 기적이다
-「날마다 기적」 전문
어렴풋했던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 받는 충격은 곧잘 ‘공포와 경이’라는 감정적 대응 양태(樣態)로 나뉘곤 한다. 공포는 외면이나 격하(格下)또는 ‘다 그래’와 같은 섣부른 일반화를 통해 통속화된 삶, 또는 존재를 무의미하게 지속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반면 경이감은 인지적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더러는 이에 대한 탐구 및 성찰로 이어져 소위 존재의 전율이라고 할 만한 계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인용 작품이 우리 몸 안의 혈액 순환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 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폐순환과 체순환’이나 ‘동맥과 정맥’ 혹은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콜레스테롤과 노폐물을 수거하는 기능’등의 과학 정의를 보여주고자 하지는 않는다. 대신 “총 길이 약9만 킬로미터/달까지 거리의 4분의 1거리를/1분에 세 번”처럼 익숙하지 않은 통계적 사실로 대체한다. 물론 “3초2초1초/곧장 레이스로 나아”가는 것이 “핏줄 속 피톨”들임을 명시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이나 의지”에 앞서 발생하는 생명의 신비를 기록한다. 또한 이 “우주여행 순환선”이 “살고 있는 한/하루4320회, 연157만 6800회”나 거듭되어야 함을 밝힘으로써 그 규모가 어쩌면 상식선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강조한다.
짧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인용 작품은 앞에 언급한 것처럼 숱한 ‘사실’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를 확장해서 최소한 인류 전체의 수를 곱한다면 수학 이론서에나 등장할 법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규모 자체가 결코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의미한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시인이 아 모든 사실을 비유로 만든 이유가 개입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날마다 기적”이라는 시인의 관점이다. 평범한 사실에서 드러난 경이를 기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온 우주를 메우고 있는 통속적인 사실 중 하나를 존재의 사건으로 들어올린다. 단순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 즉 ‘기적’의 시각에서 자기와 타자와 세계와 우주,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시공간의 맺힘과 풀림을 모두 포획해낸다.
지나치게도 도식화 한다거나 비약이라는 지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집을 읽는 방법으로 삶의 통속적 힘과 존재적 전율의 길항을 중심에 놓기로 했다. 시인의 시각 자체가 미시적인 양태의 포착에 능숙하기에 명확한 분류 기준만 제시하면 그대로 하나의 독법(讀法)이 될 것이 사뭇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2.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노스의 작품,「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는 “어쩌랴! 남들은 우리들 자신인 것을”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작품 전체의 주제를 함축한 상징인지는 미지수지만 현대적 삶의 이중성을 묘파(描破)했다는 세간의 평가에 의거하면 최소한 ‘통속적’이라는 수식어의 의미를 제대로 짚어낸 것임에는 틀림없다. 즉 남이 어땠다는 추문이나 모두가 다 그렇다는 식의 체념이 통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삶과 사물을 보고 대하는 것이 바로 그 순간 통속성을 형성한다.
루벤스의 그림
<유아 대학살>을 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널브러진 아기들
새파란 낯빛으로 울부짖는 어미들
기원전 4세기 유태의 왕 헤롯의 유아 대학살을
정밀 묘사한 지옥도
옛 왕조시대 삼족을 멸했던 참상을 떠올리다가
질경이, 망초, 달맞이꽃,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 냉이
모조리 잡초라는 죄목을 씌워 여지없이
호미로 꼬챙이로 뿌리까지 뽑아내는
손을 본다
-「발본색원(拔本塞源)」전문
시인은 바로크의 거장인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의 <유아 대학살>을 보고 곧바로 “기원전 4세기 유태의 왕 헤롯의 유아 대학살을/정밀 묘사한 지옥도”임을 알아차린다. 물론 “새파란 낯빛으로 울부짖는 어미들”에게 시선이 머물기도 하지만, “삼족을 멸했던 참상”의 역사 지식을 건너 오늘의 시선은 “질경이, 망초, 달맞이꽃,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 냉이/모조리 잡초라는 죄목을 씌워 여지없이/호미로 꼬챙이로 뿌리까지 뽑아내는/손”에 오래 머문다. “손을 본다”했으니 최소한 지금 이 순간의 시인의 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어떤 텃밭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인용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짧고 정갈하지만, ‘그림(유아대학살)→역사(참상)→현상(잡초)’을 ‘발본색원’이라는 제목의 의미로 관통하는 시각은 날카롭다. 이는 주로 사자성어가 제목인 다른 작품들,「절차탁마(切磋琢磨)」,「오불관언(吾不關焉)」,「만시지탄(晩時之歎)」등과「손자병법」,「각자도생」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한결같은 특징이다. 작품의 주제와는 별개로 주목할 만한 창작기법인데, 대체로 이런 수법은 시인의 직접 발화나 시적 화자의 적극적 개인 없이 작품을 그저 보여줌으로써 어떤 사태나 의미를 환기하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중미 파나마 열대림에서
나무 잎사귀를 마름질한다
이와 턱 사이 날로
동그스름 크기와 모양이
판에 박은 듯 가지런히
마름질한 자재를 나르는 잎꾼개미
날이 다 닳도록
일사불란(一絲不亂)
주어진 일에 몸을 바친다
그곳에는 사(私)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일사분란」 전문
이번에는 반드시
궤도진입에 성공할 태세
박사들이 오만 가지 부품을 점검하면서
집요하게 시도하는 로켓발사
서울시 중구 청구로 321번지
전신주를 칭칭 감아 정수리까지
초록으로 뒤덮은 진보랏빛 나팔꽃이
터질 듯 충전시킨 태양에너지로
카운트다운!
씨방에서 씨를 높이 쏘아 올린다
-「절차탁마」 전문
인용한 두 작품에서 혹자는 자연의 신비나 위대함을 읽겠지만, 필자는 시각을 바꿔 우리가 내세우는 것들에 불가피하게 내재한 허위와 과장이 읽힌다. 실제 ‘중미 파나마 열대림’의 고유종인 일명 ‘농사개미(잎꾼개미)’는 “날이 다 닳도록/일사불란(一絲不亂)/주어진 일에 몸을 바친다”. 그 개미종의 각 개체가 자의식이 있니 없니 하는 것과 그들이 인류보다 수백 내지 수천 배 앞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니 하는 사실은 이 작품의 핵심 주제가 아니다. 역시 핵심은 “사(私)가 끼어들자리”인데 인간은 정치나 사회, 문화 영역을 특정하지 않고도 ‘사적 거리’, 또는 ‘사익(私益)’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거나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바로 이런 토양의 사실들이 통속적으로 자라나게 한다는 것이 시인의 지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팔꽃’은 “터질 듯 충전시킨 태양에너지”로 “씨방에서 씨를 높이 쏘아 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온갖 “박사들이 오만 가지 부품을 점검하면서/집요하게 시도하”지만 모든 ‘로켓발사’가 다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대기권 탈출이 어떠니, 로켓의 크기와 중량을 나팔꽃 씨와 비교하는 것 따위는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만약 사용된 자원과 인력과 시간을 비교한다면 효율성 면에서 아직도 인류의 로켓발사는 씨방에서 씨를 쏘아 올리는 나팔꽃을 넘어섰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자기를 과장하고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통속성의 진면목이다.
고정애 시인이 문병비판 시를 겨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인은 자의식 때문에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잉ㄹ반보다는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뿐, 현실과 자신을 분리하거나 우열관계로 놓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세뇌(洗腦)」에서 “귀에 쟁쟁하다/상기도 또렷이 들리는 노랫말”이라는 힘겨운 진술을 한다. 더불어 그 세뇌가 “기나긴 세월 훌쩍 뛰어 건넌 오늘까지/입가에 빙빙 맴돌게 하는/일제(日帝) 군부(軍部)의 끈질긴 세뇌가/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함으로써 이를 반증한다.
3.
주지의 사실이지만, 인간 정신의 흡수력과 파지력(把持力)은 사실 정보의 옳고 그름이나 가치의 유무와는 별개로 정보 자체에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세뇌가 있었다면 올바른 의미의 훈육(訓育)도 정신에 남는다.
더워라 더워라 하면
너만 덥냐
추워라 추워라 하면
너만 춥냐
앞뒤 생각없이
함부로 쏟아낸 나의 수다를
담담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나무라던
나의 어머니
마을에서 첫째로 무서웠다는 외할아버지의
장녀로 태어나 열여덟에
열아홉 아버지의 아내가 되었던 나의 어머니
밝으면서도 말수가 적었던 무학의 어머니는
욕심쟁이 떼쟁이 둘째 거동이
은근히 마땅찮고 걱정되었나보다
그 자리에선 눈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왜 그런지 끝내 잊히지 않는
어렸던 그날의 선명한 한 컷
그래서 내 말수가 조금은 줄었을까
그래서 세상이 조금은 잠잠했을까
-「어머니 전(傳)」 전문
정보의 흡수력과 파지력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강조되는 시기가 바로 유년기이다. 이때는 소위 감성(정서)에 관련한 정보가 가장 영향력이 크고, 점차 성장하면서 말 그대로 지식과 이해, 분석과 관련한 정보가 차츰 중요한 항목이 된다. 시인은 “앞뒤 생각 없이/함부로 쏟아낸 나의 수다를/담담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나무라던/나의 어머니”를 지극히 ‘선명한 한 컷’으로 기억한다. 작품 마지막에 “그래서 내 말수가 조금은 줄었을까/그래서 세상이 조금은 잠잠했을까”라는 투정 아닌 것 같은 투정에 미뤄보면 섭섭한 감정이었겠지만, 어쨌든 그 훈육의 내용은 세상에서 내가 돌불장군일 수 없음을 깊이 각인했다고 보인다. 이는 시인이 비록「시대의 유물」이라 치부하면서도 “고달픈 시집살이/박달나무 방망이 한 쌍과/다듬잇돌, 홍두깨를 갖고 있다”고 거리낌 없이 밝히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고정애 시인은 결코 자신의 통속적인 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발본색원」에서는 “질경이, 망초, 달맞이꽃,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 냉이/모조리 잡초라는 죄목”을 붙인 입과 그를 뽑아낸 손을 명시(明示)하지 않지만,「해결사」에서는 “습도88%, 매우 습한 이 장마에/기척 없이 스며드는 습기 악취 곰팡이 벌레/제로가 될 때까지 빌붙지 못하게/모조리 훑고 찾아내어 가둬 달라고/나도 옷장 신발장에 흡습제를 놓”는다고 분명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사실 시인의 생활도 자연을 통제하거나 이용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인 “회유법”처럼 “문을 꽝 닫고 들어가/기척이 없는 아이”는 “모르는 척 그냥 내버려 두”(「회유법(懷柔法)」)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통속적 자질(資質)이고 어떤 사실들이 존재를 전율케 하는가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시인은「제 목숨 다하도록」에서 “주저앉은 나에게 이 보라는 듯”이 ‘영하의 한겨울’에 수직수평으로 날고 있는 파리를 본다. ‘한 겨울’이란 계절은 한해살이인 파리의 생명이 이미 끝나야 했거나 곧 끝날 거라는 사실을 차분하게 환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눈앞의 파리는 씽씽 날아다닌다. 어쩌면 번지점프의 ‘급속하강’(「겁도 없이」)의 체험이거나 “한 뿌리에 나고 자란 남매들/한 교실에서 정든 친구들//이승에 또는 저승에/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꿈의 보고서」)는 일반적 인식보다 눈앞에서 귀찮게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가 실제로 존재를 전율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런 사실에 대한 이해를 이미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의 첫 인용 작품은 「날마다 기적」이지만 이 기적은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대한 자각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方便)’이었음에 틀림없다.
물오리가 거센 물결에
우아한 자태로 떠 있는 것은
수면 아래 물갈퀴가
힘껏 물을 젓고 있기 때문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몸의 베이스캠프에서
불철주야 박동으로
긍정(肯定) 메시지를 송신하기 때문
쿵 쾅 쿵 쾅
활화산의 들끓는 마그마로
심장이 맥을 촉진하고 있기 때문
-「심장의 힘」 전문
시인의 심장은 “쿵 쾅 쿵 쾅” 쉼없이 “하루 4320회, 연157만 6800회”의 “붉은 피톨 흰피톨”의 순환을 독려(督勵)하면서 ‘긍정의 메시지’를 송신한다. 이 ‘날마다 만나는 기적’ 속에서 시인이 “스크린 도어 유리에/어렴풋이 떠 있는 사람”을 보고 “어디에선가 낯익은 사람/내 아버지 같기도/내 어머니 같기도 한 얼굴”(「청구역에서」)의 시선을 느끼며, ‘늘 함께 지내며’ 기적 속에서 존재의 전율을 오래 기록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이 기록은 “그 동안/그냥 살아오지 않았노라/실적을 보여주는/게발선인장”(「게발선인장」)을 닮았을지언정 “끊임없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정신에 목숨을 걸기도”(「기록」)하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기에 말이다.
하여, 시인에게는 아래에 인용할 작품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놀라운 경지를 우리 제위 독자들에게 오래 들려주길 바란다.
단음으로 울리는 단순한 소리
크지도 작지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소곳이 치고 있는 북소리
영화음악 <라라의 테마>를 듣다가
젊은 연인
오마 샤리프와 줄리 크리스키 모습을 떠올리다가
메인 멜로디 그 등 뒤에서 제때 제때
은은한 여운으로 음악을 완성시키는
타악기 소리가 있다
눈 감고 귀 기울여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비로소 들리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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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고정애 시인은 한 마디로 단방에 명중을 겨냥하는 단검 승부사이다. 우리는 수적으로 낙하하는 오브제를 바라보며, 특유의 상상력이 자아내는 명쾌한 해석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시편들마다 핵심을 겨누어 나가다가 얻는 공격 순간의 판단은 마치 부리를 갈고 나는 독수리의 시각 같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게 된다. 재치를 뛰어 넘는 그런 재주는 아마도 타고난 소질인 것이지만, 다양한 소재로시공간을 뛰어넘는 시세계는 미수를 맞는 시인의 오랜 경륜에서 오는 성찰과 직감의 귀결이리라. 무엇보다 욕심을 비워낸 솔직함이 그윽하면서도 소녀의 수채화처럼 담백하다.
― 윤정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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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시인∥
∙ 1991년 《시와의식》으로 등단했다.
∙ 시집으로 『사랑 에너지』『연필깎기』『튼튼한 집』
∙ 일역서 박제천 선시집 『장자시莊子詩』,
∙ 공역서 김남조 선시집『신의 램프』 김남조 꽁트집『아름다운 사람들』,
∙ 한역서 강상중 『재일在日강상중姜尙中』등이 있다.
∙ 국제펜클럽 번역문학상,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바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한국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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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91년 《시와의식》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고정애 시인의 신작 시집 『날마다 돌아보는 기적』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0316으로 출간되었다.
왕성한 번역 활동과 날카롭고 첨예한 시선으로 삶에 대해 사유하는 시편들로 작품 활동을 꾸준하게 이어온 고정애 시인은 이번 신작 시집을 통해 ‘삶’이라는 사건에 대해 명징한 통찰력을 선보인다. ‘공포와 경이’를 일상에 침투시켜 세계와의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삶’에 대해 새롭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살아있음을 시편으로 타전한다.
해설을 쓴 백인덕 시인은 “고정애 시인은 무엇으로부터 끈질긴 생의生意가 늘 솟구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지극히 명쾌한 대답을 가슴에 품은 채, 그 변주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숱한 사실들을 일종의 존재적 사건으로 통렬하게 바꿔놓고 있다. 이를 통해 생의를 고양高揚하는 것은 물론 매 순간 생의 비의秘意까지 포착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생의가 솟구치는 삶에 대한 해답으로서, 매일 돌아보는 기적과 같은 기척으로서 시인의 시가 언어의 장벽을 뚫고 나와 다시 태동한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월남전을 몸소 겪으며 용케 살아남은 세대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운 그분들을 떠올리고 기리면서 아낌없는 은덕 또한 가슴 깊이 새긴다.”는 이 다짐은, 시인의 언어와 눈동자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은 ‘기적’이 필요했던 지난한 과거에서부터 ‘기적’을 발견하게 되는 시인의 고귀한 성찰로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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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