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의 농다리
김성문
충북 진천에는 돌로 만든 농다리(籠橋)가 있다. 진천에서 볼일을 마쳤는데 동료 한 사람이 진천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 년된 농다리에 가 보고 싶다고 한다. 어떠한 다리인지 궁금하여 나의 승용차는 농다리로 향했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농다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농다리까지는 지척의 거리라서 걸음이 가벼웠다. 좁은 길옆에 있는 「농다리유래비」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농다리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세금천(洗錦川)에 축조된 석교로써 사서(史書)인 『상산지(常山誌)』와 『조선환여승람』에 축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농다리를 놓기 전 추운 겨울 어느 날 친정아버지의 죽음으로 다리가 없는 세금천을 건너려는 아낙이 있었다. 임(林) 장군은 아낙의 효심에 감동하여 말을 타고 돌을 날라 농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농교라는 용어는 돌들이 대바구니처럼 얽히고설켜 있다고 해서 대바구니 ‘농(籠)’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진천군 향토지 『상산지』에 보면 농다리는 진천읍에서 남쪽 방향 4km 지점에 있는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다리다. 고려 초엽에 굴티마을에 사는 임 장군이 음양을 배합하여 자줏빛 돌로 축조했다. 별자리 28수(宿)에 따라 수문 28칸으로 만들어 1개의 상판석으로 이어 하나의 활(弓)이 뻗쳐 있는 것처럼 축조했다. 이미 오래되어 4칸이 매몰되어 현재는 24칸이라고 했다. 유래비 바로 옆에는 2008년 11월에 세운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가 있다. 「사적비」에는 28칸을 모두 복원했고, 28수는 신비력을 내포하고 있는 경성(經星)의 수라고 한다. 경성은 천문학에서 별자리를 이루는 항성을 말한다. 이 항성을 대표하는 별자리인 28수는 제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임 장군은 28수의 별자리를 생각하여 농다리를 만들어 소원을 빌게 하는 기도 도량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별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별을 행성이라 하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해와 달을 합쳐서 7정(七政) 또는 7요(七曜)라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 월, 화, 수, 목, 금, 토로 요일 이름이 되었다니 천문학자들의 지혜에 새삼 놀랐다. 동료와 「농다리유래비」,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를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확 트인 세금천에 걸쳐 있는 기다란 농다리가 펼쳐졌다. 농다리 앞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생거진천’이란 글씨를 큼직하게 배치해 두었다. 처음 보는 문구에 매료되었다. 생거진천(生居鎭川)과 함께 ‘사거용인(死居龍仁)’이 사용되고 있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었다.
진천에는 옛날부터 물이 많고 평야가 넓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풍수해가 없어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므로 생거진천이라 했다. 용인은 산수의 경치가 아주 좋고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으므로 사거용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에 같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진 ‘추천석’이 진천과 용인에 살았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은 마음씨가 착한 농부인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용인의 추천석이 아닌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왔기에 다시 돌려보냈다. 이미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신에 진천의 추천석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 살았다고 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라 한다고 했다.
농다리 위로 걸었다. 자줏빛 색깔의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교각을 쌓아 올렸다. 교각을 쌓으면서 석회나 시멘트 없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조상의 지혜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교각과 교각 사이에 약 1.5미터 정도의 기다랗고 무늬가 있는 상판석을 얹어서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농다리 위를 건너는데도 서로가 질서를 지켜가며 웃는 표정으로 상대방이 살짝 건너길 기다려 주는 모습이 농다리를 더 기억하게 만든다. 농다리 교각 위에 걸친 기다란 상판석 옆으로는 좌우에 공간이 있다. 다리 위로 오가는 사람을 피해 잠시 교각 위에 앉았다. 교각 사이를 지나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임 장군의 고장 사람들을 위한 정신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다리를 오가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농다리가 높아서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하천 바닥이 높아져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강물 줄기가 힘차게 흐른다. 진천의 기상을 연상하게 한다. 농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길 따라 낚시하는 사람의 여유로움은 농다리와 어우러져 시 한 수라도 지어야 할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높은 곳에 있는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덱(deck)이 잘 설치되어 있고 주위에 있는 화초와 나무는 오르는 길을 마음 편하게 한다. 덱 주위로는 따뜻한 봄 햇살을 머금은 벚꽃이 활짝 피어 목화꽃처럼 보인다. 농암정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세금천의 풍광은 구포 다리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만큼 널찍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초평호도 한눈에 보인다. 초평호를 가로지르는 푸른색의 긴 하늘다리는 천상의 세계로 연결하는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옆에는 진천군과 관련 있는 역사 인물들의 명패석이 인상 깊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조선의 문인화가 이하곤, 『여지승람』의 증보 편찬자 최석정, 가사 문학의 대가 정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군 김유신(흥무대왕) 등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세월의 향기가 있는 곳이었다.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고 소박했다. 다리 하나에도 28수라는 천문학을 접근하여 축조한 임 장군의 주민 사랑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농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소원 성취는 지금도 계속되기를.
농다리, 촬영: 2024.4.6.(토)
첫댓글 저승사자의 실수담이 웃음을 짓게 하네요.
저는 글에서 모르는 것을 알 때 더 재미를 느낍니다.
농다리에 얽힌 이야기가 그래서 더 재미있습니다.
조 선생님의 관심을 존중합니다.
저승사자도 정신이 혼미해 질 때가 있나 봅니다.
생 사람 잡으니....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