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20일
필리핀 여객선 도나파즈호 유조선과 충돌… 4375명 사망
사건 당시 불타버린 도나파즈호.
1987년 12월 20일. 도나파즈호는 수도 마닐라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는 승객들을 한 배 가득 싣고 레이테섬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던 중이었다.
대다수 승객이 잠자던 오후 10시 30분에 8,800톤 가솔린을 적재한 유조선 벡터호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대부분의 가솔린이 새어나오며 불이 붙었고 벡터호와 도나파즈호는 불길에 휩쓸렸다. 근처 바닷물까지 이 불길에 휩쓸리면서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 불바다에 수온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바닷물까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성탄절 휴가여행은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1963년 일본의 오노미치조선소에서 만들어져 1975년 필리핀에 팔렸다. 필리핀에서 처음 지어진 이름은 ‘돈 술리피치오호’였고 개조를 거치며 탑승 가능 인원이 초기 설계의 두 배에 가까운 1,189명이 되었다. 1979년 6월 5일, 승객 1,164명을 태우고 가던 길에 화재가 일어나 반파되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1명도 죽지 않고 모두 구조되었다. 이 배를 그대로 건져올려 고쳐서 도나파즈호로 개칭하고 1981년부터 재운항했다. 탑승 인원은 1,450명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지옥같은 사건이 벌어지던 이 날은 정원의 3배이자, 진수 때의 7배가 넘는 무려 4,388명이라는 가공할 숫자의 사람이 타게 되었다. 바로 도나파즈호의 소유주인 술피치오 선박회사가 불법적으로 암암리에 표를 계속 팔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이리도 많았던 이유는 입석표가 무척 값이 쌌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나 안전운행을 하는 다른 배의 삯과 비교할 수 없었기에 가난한 서민들이 엄청 몰렸고 사망자 대다수가 필리핀 사람이었다. 당시 승선객이 하도 많아서 타길 포기해 목숨을 구한 몇몇 관광객도 있었다.
도나파즈호에서는 4,388명에서 단 24명(비율상 겨우 0.55%), 벡터 호에서는 13명 가운데 2명만 살아남았다. 모두 4,375명 사망. 그리고 생존자 모두 지독한 중화상을 입었다. 20세기, 아니 인류 역사상 벌어진 여객선 침몰사고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은 참극으로 손꼽힌다. 사망자 수가 더 많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이나 우키시마호 사건 같은 참극도 있지만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인재였다. 도나파즈호 사건은 비전시 상황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생긴 참극이었다.
더 큰 비극은 이 바다에는 상어가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사건 이후 상어들이 몰려와 죽은 시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하여 수색에 나선 수색대는 총으로 상어를 쏘면서 시체들을 인양해야 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시체들은 화상으로 훼손이 심했고, 화상을 입지 않아도 펄펄 끓는 물에 죽은 시체가 가득했다고 한다.
벡터호나 도나파즈호나 선장 및 승무원들이 거의 죽은 탓에 두 선박업체와 감사에 소홀히 한 정부기관에게 책임 소재를 묻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필리핀 건국 이래 최악의 대참사인지라 당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방송을 해야했고 보상금으로 부랴부랴 2,500만 페소(2010년대 미국 달러로 55만 달러)가 편성되었다. 필리핀에선 큰 액수이지만 보상금이라고 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돈이었으니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슐피소와 벡터호 소유주이자 세계 굴지의 정유회사중 하나인 칼텍스 그룹에게 소송이 제기되었다. 피해자들은 무려 12년이나 지난 1999년에서야 승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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