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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묵상글 (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 사랑은 언제나 정당하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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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은 언제나 정당하다.
연중 30주 금요일-2017
오늘 복음은 지난 월요일 복음,
그러니까 루카복음 13장 10-17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다르다면 13장에서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늘 14장에서는 바리사이 집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겁니다.
오늘은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것인데
저는 여기서 왜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였고
식사대접까지 한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회당장을
주님께서 묵사발 만든 얘기를 틀림없이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다시
수종 병자를 주님 앞에 있게 한 것은 무슨 의도인지 생각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서술만 보면 바리사이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고
주님의 말씀도 그를 크게 나무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는 주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바리사이는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있고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런 불만의 표시가 없습니다.
식사는 싫어하는 사람하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특별한 호의나 사랑이 있을 경우 식사에 초대하잖아요?
그렇다면 주님도 호의를 가지고 초대에 응하신 것이고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라기보다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실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시고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은 바리사이에 대해 무조건 적대감을 가지시고
당신의 복음 선포와 사랑에서 이들을 포기하거나 배제했을 것 같지만
결코 피하거나 포기치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마주치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한때의 자기처럼 죽어라 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그들을 위해
자기가 저주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척될지라도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포기치 않고 한두 번의 노력으로 포기치 않는 바오로의 사랑은
바로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랑은 한두 번 애써서 효과가 없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진정한 사랑과 큰 사랑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부모 특히 어머니가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지치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지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거지요.
사실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는 엄마가 아니고
그래서 돌아가시고 나면 그 잔소리가 그립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 아니고 사랑이고 가르침인데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요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가르침이고,
무엇을 하든 본질적으로 판단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미워죽겠다고 제게 고백할 때
저는 종종 그러면 그가 정말 죽었으면 좋겠냐고 본질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면 밉기는 해도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펄쩍 뛰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마땅한지 죽이는 것이 마땅한지
이렇게 근본적으로 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사랑이 사랑이기만 하면 사랑은 언제고 정당하고 언제나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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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그러자,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한 전통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이웃의 불행에도 자비와 선행을 베풀지 않는 비정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수종을 앓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4,4).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14,5).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말려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일을 맡은 관리인들은 안식일에도 정해진 희생제물을 잡고 모든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또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안식법의 본질이 생명을 살리는 데 있음을 밝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결국 죽이는 것과 같고,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결국 해치는 일과 같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한편, 요한복음사가는 ‘벳자타의 병자를 치유하신 장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에 완결된 창조활동과 동시에 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구원활동을 지속하심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주일’이라 해서, 마냥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당신은 늘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늘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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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법의 기초는 사랑이어야 한다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 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 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 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살이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국가보안법’이니‘긴급조치 법,‘유신 법’등 정권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공동체가 함께 주님과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랑이 빠지면 악법이 되고 맙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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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동창 신부의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 동창 신부님이 고마웠습니다. 몸이 쉴 수 있는 잠자리도 고마웠지만, 서재에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며칠 지내면서 ‘노자의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읽었습니다. 노자 제2 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성인은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모든 일이 생겨나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루나 가지려 하지 않고, 할 것 다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공을 쌓으나 그 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이라는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원칙과 기준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권력, 명예라는 기준입니다. 그 탑에 오르기 위해서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기도 하고, 따라오는 사람은 밀쳐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성공과 발전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염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바다에 버립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을 총과 칼로 빼앗기도 합니다.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으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법으로 단죄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지만 그 위에 싹이 나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 직선으로 나가는 것 같지만 시간은 기억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인 시간에 우리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치와 의미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위령의 달에 우리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의 시간이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매년 순환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속에 죽은 이도, 살아 있는 이도, 앞으로 살아야 할 사람도 모두 함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예수님께는 안식일과 율법 그리고 계명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신앙은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기준과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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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위는 백년손님.’이란 말이 있습니다. 또한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아 상에 올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사위를 위한 마음가짐이 위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이런 말들을 만들어 놓은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정말 사위가 소중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딸을 위한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딸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딸의 행복을 책임지는 사위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말 안에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회 지도자들은 안식일을 쉬는 날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 놓고 법을 어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주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십니다. 안식일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말입니다.
안식일은 단지 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소중한 것을 지키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사랑을 돌보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서로서로 바라보며 기쁨을 느끼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주님의 안식일이 진정한 안식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그 소중함을 깨닫는 안식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왜 태어났니?
생일이 되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에 가사만 이렇게 고쳐서 부르기도 합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지
갑자기 진중하게 물음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한평생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돈을 좇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기뻐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아닐까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태어남의 의미를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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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 청년이 노인에게 삶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청년에게 양동이 3개를 준비한 뒤 물을 넣고 끓이라고 시켰습니다.
물일 끓기 시작하자 노인은 청년에게 한 양동이에는 당근을, 다른 양동이에는 달걀을, 마지막 양동이에는 찻잎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노인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끓는 시간은 곧 삶에서 겪는 고난의 순간들이라네. 세 가지 대상에게 고난이 주어졌더니, 어떤 결과가 펼쳐졌는지 보게나.”
물이 끓을수록 당근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달걀은 속이 단단해졌습니다. 찻잎은 물 전체를 향기로운 차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근에게, 달걀에게, 찻잎에게 뜨거운 물은 분명히 고통이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실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부드러워질 수도 또 단단해질 수도 그 결과 향기로움을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지요. 그 결과 고통과 시련은 무조건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축복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 안에서 축복의 통로는 훨씬 더 넓어집니다.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 은총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에서 방해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병을 앓고 있음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죄인을 위해 안식일 계명을 어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서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막는 사람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기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규정을 짓습니다. 그런 섣부른 판단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없애고, 그곳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결코 죄의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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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해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는 있다(클라이브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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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사랑의 여정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
-내 사랑의 깊이는?-
더불어(together) 사랑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입니다. 과연 내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면서 언뜻 떠오른 제목입니다. 얼마전 더불어 사랑의 여정에 대해 나눴습니다. 진정한 내적성장은 사랑의 성장이겠고 육신의 성장은 멈춰도 영혼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하겠는데 사랑의 성장에는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는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태평양 깊이의 사랑도 있겠고, 시냇물 깊이의 사랑도 있을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깊어지는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11월은 위령성월이자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기도 하며, 어제 제가 명명한 “성인성월(聖人聖月)”이기도 합니다. 어제 인용했던 교황님의 고백을 통해 교황님이 얼마나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는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88세 노령에도 그 한결같은 열정이 놀랍습니다. 아마도 교황님의 사랑의 깊이 역시 한없이 깊을 것입니다. 다시 교황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교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a process)’으로, 그는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그는 더욱 사랑이 많아지고, 더욱 자비로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인내하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처럼, 더욱 인내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교황님의 고백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거룩함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참내가,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받은 거룩함의 선물을 실현시켜가는 하나의 과정이며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에 소개되는 바오로 사도의 이스라엘 동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요! 복음의 예수님 다음으로 거의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느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진정성 가득 느껴지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바오로 사도같습니다. 즉시 “영혼의 자서전”에서 읽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그리고 “침묵의 산”에서 읽은 성 그레고리오 동방교부의 고백이, 불교의 지장보살이 연상되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은 자들을 위로할 질서를 세우겠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다면,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이어 동방의 성 그레고리오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의 사상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선과 사랑의 확신에 기초한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연민으로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유일한 목적으로서 ‘영혼의 치유’에 있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치유는 불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그 불은 감각적 불이 아니라 도덕적 성격의 불이다.
정화후에 영혼들은 영원으로 돌아간다. 어떤 이들은 지상생활 동안 정화에 도달하고 어떤 이들은 내세동안 성취된다.... 마지막으로 ‘악의 발명자(the inventor of evil)’ 까지 비슷한 방법으로 치유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 온창조계에 울려퍼지는 찬미는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질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지옥까지 미치는 하느님 사랑임을 보여주는 동방 교부들의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요! 놀라운 것은 위대한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영원한 지옥의 개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들과 유사한 불교 지장보살에 대한 소개입니다.
“지장보살은 육도 중생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건져내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끝까지 지옥에 남겠다는 대원력을 세우신 보살이다. 대자비로써 중생들을 구제하시고 계시는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하신 후로부터 미래세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실 때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에 계시며 중생제도를 부촉받은 보살이다.
사바세계 일체중생들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보살이다. 마지막 한 명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영원히 보살로 남겠다는 지장보살은 가히 대원본존(大願本尊)의 보살이라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지옥 중생을 제도코자 지옥 문전에서 대비(大悲)의 눈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보살이다.”
흡사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의 지장보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에서 하느님 경지 까지 이른 분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침이 없고 추호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런 용기와 확신은 그대로 하느님 경지에 까지 이른 사랑에서만 가능합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 앞에서 추호의 주저함 없이 말씀하신후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신다음 돌려보내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 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 잣대가 아닌 하느님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기에 이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해 있음을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이 세 스타일,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문득 어제 복음 말씀중 주님께서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주님과 무관한 사랑의 관계였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겼는데 이런 나만의 이런 일방적 짝사랑의 관계였다면 그 착각이 너무 허망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너나할 것 없이 “더불어 사랑의 여정”중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사랑의 여정, 앎의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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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사람아>
사람이라면
사람이고 싶다면
바로 앞에
앓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못 본 척
마음 편하게
아무리 맛난 밥이라도
목에 넘어가느냐
뭐라도 해야지
안식일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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