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사를 뻬먹었네요
프랑스 사를 공부하겠습니다.
**프랑스 역사 좀 더 상세
중세 프랑스 왕조(발루아 왕조)
필립 4세
1309- 교황을 납치하여 교황청을 아비뇽에 두다(~1377)
필립6세(1338-1350) - 쟝 2세(1319-1364)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왕위계승을 주장하자 서둘러 왕위에 올랐다(1328)
에드워드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이다.
에드워드 3세가 백년전쟁 시작(1337-1453)
쟝 2세(1319-1364) - 샤를5세(1338-1380) - 샤를6세(1368-1422) -샤를7세(
1403-1461) - 루이11세(1423-1483) - 샤를8세(1470-1498)
1348 – 흑사병 대 유행
샤를8세(1470-1498)
부르고뉴 마리에 혼인신청 빠꾸 묵고 이태리 밀라노 가문에 장가
이를 명분으로 이태리 침입(이태리 전쟁 시작-1494
신혼집을 수리하다 머리를 다쳐 죽다.
*백년 전쟁으로 많은 기사가 죽자 귀족계급이 무력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샤를 8세(1470-1498) - 루이 12세(1462-1515) - 프랑스와1세(1494-1547) -
앙리2세(1519-1559) -
샤를 8세가 후손 없이 죽자 (발루아 왕조 끝나고) 사촌 루이 12세가
루이 12세는 헨리 8세 누이와 결혼 – 후사가 없다.
**프랑스는 반 합스부르그 정책을 폈다.
그래서 합수부르그 가의 왕실인 스페인과 한판 붙었다가 깨졌다.
프랑수와 1세는 이태리 르네상스를 도입(레오나르드, 첼리니 등을 초대)
1425년에 스페인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다.-이태리 침입을 실패로 본다.
1517 –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프랑스는 신교에 반대하여 카톨릭 편에 서다.
개신교 교리는(직업소명설)는 상공인의 장사를 긍정적으로 인정했다.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이 신교 쪽으로 몰렸다.
로마 카톨릭은 기득권의 보수 세력과 결탁하여 신교도를 억압했다.
이로서 종교 전쟁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 무역으로 성장한 네델란드는 신교를 믿었다.
앙리2세(1519-1559) - 프랑수아2세(1544-1560) - 샤를9세(1550-1574) -
앙리 2세
프랑수와 1세의 아들이다.
아들 프랑수와를 스코틀랜드 메리와 결혼시키므로 영국의
에드워드 6세와 싸움을 한다.
앙리 2세는 메디치가의 카타리나와 정략 결혼했다.(1533)
(*카타리나는 교황 레오 10세의 종손녀 이다.)
앙리 2세의 연인 있어 카타리나는 찬밥 신세이다가 늦게 아들은
낳아 왕위에 오르니, 샤를 9세였고, 나이는 10세 였다.
딸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정략 결혼을 시킨다.
섭정이 되면서 한 세상을 맞이한다. 보수세력(장군 가즈)과 손을 잡고
신교 탄압에 앞장 선다. 바시 대학살을 저지르므로(1561),
위그노 전쟁(종교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 국민에게는 지금도
‘그년’이라는 말을 듣는 악녀가 되었다.
위그노 전쟁(1561-1589)
앙리 3세는 학살의 주모자인 가즈공을 죽였다.
이에 카톨릭 세력은 앙리 3세를 암살한다.
스코틀랜드를 후원함으로 영국과 전쟁
앙리 3세는 기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무인 성향이 강했다.
딸의 결혼을 축하하려 마상 시합을 하다가 눈에 창이 찔려 죽었다.
샤를9세(1550-1574) - 앙리3세(1551-1589) - 앙리4세(1553-1610)
1589년에 앙리 4세가 즉위함으로 부르봉 왕조가 시작한다.
앙리4세(1553 – 1610)
앙리3세의 사위이다.\
개신교도인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왕위에 으로고,
위그노 전쟁(종교전쟁)도 끝냈다.(프랑스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0
첫째 부인(앙리3세의 딸)과 이혼하고(1559)
1560년에 마리 드 메디치와 결혼 – 많은 지참금을 갖고 오다.
금슬이 좋아 3남3녀 낳다. 그러나 앙리4세의 바람은 유명했다.
종교문제, 정치, 외교 등에 좋은 평가를 받는다.
1610년 – 카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
암독범을 주장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악형을 내렸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뒤의 (아마 예수회) 음모설을 주장한다.
*자녀들
장남 ; 루이 13세(1601-1643)
10세 왕이 되어 마리안느가 섭정
10년 뒤에 루이 13세가 친정하면서 마리가 임명한 관리를 숙청,
어머니도 귀양을 보낸다.
리슐리외에 재상으로 임명하여 끝까지 믿고 맡긴다.
딸 ; 엘리자베스 — 스페인의 펠리페 4세에게
마리 드 프랑스 – 영국 촬스 1세 왕비
나머지 자녀들도 모두 공작에게 시집, 장가가다.
*마리 드 메디치
28세 때 많은 지참금을 갖고 시집오다.(루벤스가 그림으로 남겼다.)
1610년 루이 13세의 섭정 – 이태리 인을 많이 등용함으로
아들 루이 13세외 틀어졌다.
루이 13세는 이들을 프랑스인으로 교체하면서 피바람이 일어났다.
어머니도 추방했다.
추방당한 마리는 외국의 군사로 몇 번 프랑스를 침공했으나
아들이 통치하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화가 루벤스의 집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루이 13세
어머니에게 많이 시달려서인지 여자를 싫어했고
결혼하고도 첫날 밤을 몇 년 뒤에 가졌다고 한다.
정사는 몽땅 재상 리슐리외에게 맡겼고
그러나 후대의 평가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
루이 13세 때의 궁정이 ‘삼총사’의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