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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패경초(佛說孛經抄)
오(吳) 지겸(支謙) 한역
송성수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언제가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계실 때였다. 당시 태자의 이름은 기(祇)였는데, 그는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산 80경(頃)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은 지면이 편편하며 여러 과일 나무가 많고 곳곳에 흐르는 샘과 목욕하는 못이 있었으며, 그 못은 청청하여 거미ㆍ벌ㆍ모기ㆍ등에ㆍ파리ㆍ벼룩 등이 없었다.
거사(居士) 수달(須達)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5계를 받아 지녀 살생하지 않고 투도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망어하지 않고 음주하지 않았으며, 거리를 자세히 살피며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해 빈궁한 이들을 구제하였으므로 외로운 이를 돕는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급고독씨(給孤獨氏)로 불렸다.
수달은 부처님을 위해 정사(精舍)를 만들려고 두루 돌아보았는데 유독 기원(祇園)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찾아가 사기를 청하였다.
기 태자는 말하였다.
“황금을 지면에 깔아 빈틈이 없게 하면 바로 주겠다.”
수달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사야 할 만큼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기 태자는 말하였다.
“내가 농담으로 한 말일 뿐이오.”
이것이 송사가 되어 말썽이 생기자 나라의 원로(元老)가 간하였다.
“이미 허락하여 가격이 결정되었으면 다시 후회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에게 줄 것을 허락하였다. 수달이 ‘어느 창고의 금이면 충분할까?’ 하고 잠자코 생각에 잠기자 태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후회하는가? 귀한 것이 아까워 스스로 그만둘 생각인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느 창고의 금을 내올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수달다가 곧 사람을 시켜 코끼리로 금을 실어내 모이는 족족 지면에 깔자 잠깐 사이에 40경이 가득 찼다. 기 태자는 느낀 바가 있어 ‘부처님께서는 큰 도가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사람이 보배마저 가볍게 여기고 이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중지시키며 말하였다.
“여기서 그치고 더 이상 금을 내오지 마시오. 동산의 땅은 당신 것이고, 나는 이 동산의 나무들을 부처님께 바치고 싶소. 이러면 서로가 적당할 것이오.’
곧 정사를 세운 뒤에 각기 부처님께 올렸고, 부처님께서는 1,250사문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셨다. 그 때문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때 왕의 이름은 비선닉(卑先匿:바사닉)이었으며, 온 궁중과 인민이 모두 함께 부처님을 섬겼고, 그 사문들에게 필요한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공급하였다. 세상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았을 때는 여러 도가 일어났으니, 마치 캄캄한 밤에는 횃불이 광명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천하에 부처님께서 계시자 온갖 삿됨이 모두 사라졌으니, 마치 해가 나오면 불빛은 빛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본래 5백의 이도인(異道人)과 이도의 삿된 무리들을 섬겼으나 이때 모두 폐지하였다. 그러자 여러 이도인들은 다 함께 질투하며 부처님을 훼방함으로써 자신들이 공경과 섬김을 받으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 중에 산다리(酸陀利)라는 한 여자 제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께선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람들이 다시는 부처님을 공경하지 않고 스승님을 예전처럼 섬기게 하겠습니다. 저는 당장 지금부터 시작해 날마다 화장하고 부처님의 주변과 여러 사문들의 처소를 왕래하겠습니다. 한 달 후에 몰래 저를 죽여 기수에 매장하고는 거짓으로 찾아다니십시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분명 ‘그 여자가 정사에 왕래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곧 왕을 찾아가 말하고, 관리의 수색을 빌어 통곡하면서 시체를 끄집어내며 ‘그들은 음란하고 계행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십시오. 국민들이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부처님을 버리고 찾아와 스승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 스승들은 말하였다.
“좋다.”
여자는 자신의 말대로 한 달을 왕래하였다. 스승은 네 사람을 시켜 함께 그녀를 죽여 매장하고는 사방으로 찾아다닌 뒤 궁궐로 찾아가 말하였다.
“제가 한 여자를 잃어버렸는데 날마다 사문들의 처소에 왕래하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보았다고 합니다. 관리를 시켜 찾아주시기를 청합니다.”
왕은 곧 외부의 관리에게 명하여 여러 스승과 함께 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거짓으로 두세 번 배회하며 지나치다가, 시체를 찾아내 끌어내서는 수레에 싣고 두루 돌아다니며 통곡하면서 말하였다.
“사문의 법은 계율이 청정해야 한다. 도리어 남의 부녀를 간음하고는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죽여서 감추었으니, 무슨 도(道)라는 것이 있겠는가?”
국민들은 이것을 듣고 믿은 자가 많았으며, 오직 도를 얻은 사람만이 거짓임을 알았다.
부처님께서 이에 모든 사문들에게 분부하셨다.
“잠시 성안에 들어가지 말라. 7일 후에는 사정이 밝혀질 것이다.”
8일째 되는 날 아침, 부처님께서는 아난을 시켜 거리로 나가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거짓말로 남을 헐뜯으면 하늘이 입에서 냄새가 나게 할 것이다. 청백한 이를 거짓으로 무고하면 죽어 지옥에 들어가서 스스로 학대하고 원망하면서 오랜 세월 고통을 받을 것이다.”
국민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들 서로 말하기를 ‘사문들은 청정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은밀하게 그것을 조사하였고, 이도(異道)들이 몰래 서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네 사람에게 무언가 나눠주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도들의 법에는 경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자가 얻는 몫도 많았다. 한 사람은 어리석어 사리에 어두웠으므로 얻은 몫이 홀로 적자 성을 내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의 일을 폭로하겠다. 함께 음모해 사람을 죽이고 부처님을 거짓으로 무고하고선 도리어 나만 적게 주는구나.”
조사하던 사람은 곧 그를 끌고 가서 왕에게 말하였고, 그가 사실대로 대답해 곧 그 음모한 자들을 체포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와 함께 부처님께 나아갔으며, 급고독씨와 여러 청신사(淸信士)와 그 나라의 무수한 인민들이 모두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를 마치고 각기 한쪽에 앉았다.
왕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요사이 이 비방을 듣고 망연했습니다. 오직 부처님은 지극히 진실하며 청정함이 한량없으신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무슨 연유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비방이 생기게 된 것은 탐욕과 질투 탓입니다. 이것은 오래전에 있었던 것이지 지금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왕은 여쭈었다.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생 무수한 세상에서 보살도를 위해 항상 자비심을 행하며 모든 백성들을 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포린나국(捕隣奈國)이 있었는데, 그 나라는 넓고 좋았으며 인민은 번성했습니다. 그곳에 재주와 총명함이 높고 원대해 나라 안에서 제일이었던 구담(瞿曇)씨 성을 가진 범지(梵志)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특히 그 막내아들은 단정하기가 견줄 데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를 위해 대회를 열고는 여러 도인과 안팎의 친척을 청하고서 아이를 안고 보였습니다.
여러 도사들은 그 아이의 관상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도를 좋아하고 성인의 상이 있으니 반드시 국사(國師)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름을 패(孛)라고 했습니다. 패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과 기예가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여러 경전과 천하의 도술 96종을 다 통달하여 죽음과 삶의 나아가는 곳과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며 천재지변과 길흉화복과 의술과 진압(鎭壓)하는 법 등 모르는 것이 없었고, 음심을 물리쳐 고도(蠱道)를 항복받아 없앴으며, 무예와 지략을 갖추고 성품은 인자했습니다.
그러나 구담이 죽은 후 두 형은 그를 질투하여 따로 살 것을 자주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스승을 섬기는 데 소비한 것이 많으므로 나눠줄 재산의 몫은 당연히 적어야 한다.’
어머니가 그를 가련하게 여겨 수차 두 아들을 깨우쳤지만 두 아들은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패는 형들의 뜻이 너무 심함을 보고 ‘인생은 모두가 탐욕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내가 만일 떠나지 않으면 형들은 끝내 그만두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행을 구하며 도를 배우겠노라고 어머니에게 말하자 어머니는 곧 허락했습니다. 패는 곧 떠나 현명한 스승을 가까이하여 사문이 되었고 산중에서 스스로 네 가지 뜻을 얻었습니다. 첫째 중생 사랑하기를 마치 어머니가 아들 사랑하듯 하였고, 둘째 세간을 가엾이 여겨 해탈시키려고 하였고, 셋째 도의 뜻을 깨달아 마음이 항상 기뻤고, 넷째 일체를 보호하여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또 네 가지 뜻을 얻었으니, 이는 모든 부처님이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탐욕과 음심을 제압하였고, 둘째 성냄을 제거하였고, 셋째 어리석은 생각을 버렸고, 넷째 즐거움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섯 가지의 욕심을 끊었으니, 눈은 색을 탐하지 않으며, 귀는 소리를 탐하지 않으며, 코는 냄새를 탐하지 않으며, 혀는 맛을 탐하지 않으며, 몸은 색욕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지혜와 방편의 도로써 천하를 따르면서 교화하여 10선(善)을 행하게 하고 부모에게 효순하며 사장(師長)을 공경하고 섬기게 했습니다. 의혹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도덕을 믿게 하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 선을 지은 자는 복을 얻고 악을 행한 자는 재앙을 받으며 도를 행한 자는 도를 얻음을 알게 했습니다. 근심과 재앙을 받는 자를 보면 면하게 해주고 병든 자에게는 의약을 베풀었습니다. 그리하여 패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자는 죽어서 모두 하늘에 태어났으며, 수해와 가뭄의 재난이 있던 나라나 군은 패가 이르면 곧 없어졌고 독해(毒害)가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때 대국이 있었는데, 안락하고 인민이 넉넉하였으며 왕의 이름은 남달(藍達)이었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맡은 네 신하는 삿된 짓거리와 아첨과 음탕한 짓과 도둑질과 간사한 짓과 속임수만 일삼았으며, 노략질하며 만족할 줄 몰라 인민이 그 독해를 입었으나 왕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패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마음아파 하여 성 밖에 이르러 도인 사타(沙陀)에게서 7일을 묵고는 성에 들어가 걸식하려고 했습니다. 왕은 망루 위에서 젊은 나이에 위의와 용모가 단정하고 걸음걸이가 비범한 패를 보고는 매우 사랑스럽고 공경스런 마음이 들어서 곧 나가 물었습니다.
‘원컨대, 도인은 아십시오. 내가 가진 정사가 성 밖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거기에 머물면 필요한 것을 모두 공급하겠습니다.’
패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뜻대로 따르겠으니 내일부터는 매일 궁중에서 식사하도록 하십시오.’
패는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왕은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패는 보통사람이 아니었소. 당신은 내일 그를 보게 될 것이오.’
부인은 기뻐했고 상 밑에 있던 빈기(賓祇)라는 개도 그것을 듣고 또한 기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패가 궁으로 들어오자 왕과 부인은 영접하여 예를 올리고 금상에 털자리를 깔고 앉게 하였습니다. 패가 앉으려 할 때 개는 앞으로 다가와 발을 핥았습니다. 왕은 스스로 일어나 손 씻을 물을 내놓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하였고, 공양 후에는 함께 나가 정사에 도착했습니다. 패가 왕을 위해 국정을 다스리는 법을 말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고, 이 일로 머물며 네 신하와 함께 국사를 다스려 줄 것을 청했습니다. 네 신하는 어리석고 비겁하여 전쟁하는 법도 익히지 못했으며, 스스로 탐욕과 혼탁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항상 왕이 듣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한 신하는 ‘사람이 죽으면 신(神)은 없어져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한 신하는 ‘빈부와 고락은 모두 하늘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한 신하는 ‘선을 지어도 복은 없으며, 악을 지어도 재앙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한 신하는 자기가 점성술(占星術)을 알고 있다며 뽐내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첨일 뿐, 충성스런 정치는 하지 않았습니다.
패는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난 재주에 용맹하고 씩씩했으며, 인의로 공경하고 순종하며 말이 적었으며, 말할 때는 웃음을 머금어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청정하고 욕심이 없어 색(色)을 절제하고 일은 적었으며, 그 다스림이 번쇄하지 않고 재변을 미리 알았습니다. 또 귀신을 부르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백성 사랑하기를 아들처럼 하였고 도로써 가르쳐, 주정하고 사냥하고 고기를 낚고 새와 짐승들을 쏘지 못하게 하며, 살생ㆍ투도ㆍ사음ㆍ망어를 못하게 하며, 헐뜯고 욕하고 아첨하고 질투하지 못하게 하며, 다투고 성내고 요망하고 의심하지 못하게 하여, 모두 교화해 착하게 하였다. 그가 정치를 한 후에는 온 나라가 편안하고 비바람이 시기에 알맞았으며, 5곡이 풍성하게 익고 여러 관리는 법을 받들어 다시는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패는 무위(無爲)를 체득해 홀로 부처님과 사문의 네 가지 도를 귀히 받들며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익혔습니다. 그의 누님의 아들 역시 어질고 뜻이 훌륭했는데 항상 패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그 나라의 학문을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에게 의지했습니다. 왕은 다시는 근심하는 일이 없게 되자 전부를 패에게 맡겼습니다. 네 신하는 두려워하고 꺼리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질투의 마음을 일으켜 패를 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함께 재물과 보배, 그리고 일억의 인민을 모으고는 임금이 외출한 틈을 타 그것을 부인에게 올리고 말했습니다.
‘신 등이 지극한 뜻으로 저희가 가진 모든 것과 처자들을 받들어 올리니 종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일을 말하고자 하니, 듣고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부인은 그 좋은 보배가 탐이나 받고는 네 신하에게 사례하며 말했습니다.
‘당장 말씀하시오.’
네 신하는 대답했습니다.
‘왕께서는 패를 받들고부터 누추한 옷을 걸치는 것이 걸인과 같습니다. 패는 소임이 과중함을 믿고 그는 국은을 생각하지 않으며, 날로 부인이 나쁘다고 말하여 왕에게 안방을 멀리하게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인께서는 젊으셨을 때 아들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만일 시기를 놓치시면 나라의 후사가 끊어질 것입니다. 원컨대 잘 생각해 보십시오. 패를 제거하지 않으면 뒷날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부인은 성을 내며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그 사람을 믿고 그 악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각기 돌아가십시오. 지금 나도 그것을 근심하고 있으니, 내일부터는 패를 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인은 네 신하를 보내 놓고는 곧 치자로 얼굴을 누렇게 칠하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얼마 후 왕이 돌아오자 나인들이 임금에게 부인의 불편함을 말하였습니다. 임금은 평소에 그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들어가서 재삼 그 연후를 물었으나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곧 성을 내며 말했습니다.
‘죄지은 놈이 누구건 베어 죽이리라. 당신은 내가 누구를 벌줬으면 좋겠소?’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왕께선 분명 제 말대로 하지 않으실 겁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말해 보시오, 당신 말을 어기지 않겠소.’
부인은 곧 말했습니다.
‘왕께서 아침에 나가시자 패가 찾아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임금은 늙어서 정사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나라 안의 관리와 인민들 모두 나를 복종하고 따르니, 왕위를 도모해 그 즐거움을 같이 누립시다.≻
이제 도리어 이 걸인의 음모에 걸려들게 되었으니, 제가 이렇게 시름할 뿐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음식이 목구멍에 막혀 넘길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것처럼, 쓰지 않으려니 후회될까 두렵고, 쓰자니 나라가 어지러울까 두려웠습니다, 왕은 생각했습니다.
‘패가 나를 도운 지 벌써 12년이다. 항상 충심으로 정사를 돌보았고 나라를 걱정하며 환란을 없앴으며, 원근의 모든 이들이 그를 의지하고 있으니 그는 이 나라의 보배이다. 그를 내칠 수는 없다.’
왕은 말했습니다.
‘지금 패를 치죄한다면 뒷날 반드시 큰 난이 있을 것이오. 만백성을 위해 잠시 함께 참읍시다.’
부인은 곧 침상 아래로 몸을 던지고 소리 내어 통곡하면서 말했습니다.
‘패를 치죄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자살하겠습니다. 다락 아래로 떨어지고 나면 다시는 저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다시 타이르며 말했습니다.
‘당신도 법을 알고 있지 않소. 이건 작은 일이 아니오. 일어나서 함께 의논 합시다.’
부인이 다시 앉자 왕은 말했습니다.
‘도인은 법에 칼과 몽둥이로 벌할 수 없으니 조금씩 멀어지게 해야 할 것이오. 그 봉양을 차츰차츰 줄입시다. 내일 찾아오면 다시는 예를 올리지 말고 팔짱을 꼬고 있으면서 나무의자를 주어 궁전 아래 앉게 하고, 싸라기로 밥을 지어 옹기그릇에 담아 줍시다. 이렇게 하면 부끄러워 결국 제 발로 떠날 것이오.’
왕이 이렇게 말했을 때 빈기는 언짢아했습니다. 부인은 다음날 아침 왕의 말대로 빠짐없이 주방에 명령해 두었습니다. 패가 궁중에 들어오자 빈기는 상 아래에서 그를 물어뜯으며 짖어댔습니다. 패는 개가 짖고 부인이 팔짱을 꼬고 있고 또 마련되어 있는 것들을 보고는 곧 음모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남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는데, 남이 도리어 나를 해치려 하는구나. 이와 같다면 깊은 산에 들어가 피할 수밖에 없다. 작은 원망이 크게 되는 것이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저 음모로써 나는 삼가야 한다. 무릇 사람이란 몸은 파리해도 행이 올바르면 강한 것이다. 지금 나에겐 발우와 물병과 가죽신과 우산과 물 거르는 주머니가 있으니, 이것이면 충분하다.’
패가 식사를 마친 뒤 물건을 거두어 떠나려고 하자 왕이 놀라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왜 이리 급하십니까?’
그리곤 부인을 돌아보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성인의 뜻을 잃게 하였소.’
곧 앞으로 나와 패를 붙잡으며 물었습니다.
‘왜 가려고 하십니까?’
패는 대답하였습니다.
‘왕을 위해 나라를 다스린 지 12년입니다. 빈기가 지금처럼 물어뜯으려는 것을 이전엔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분명 음모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려는 것뿐입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지금 패의 뜻을 보니, 깨달음이 미세하고 매우 밝습니다. 원컨대 제가 직접 엄히 명을 내려 악인을 벌할 것이니 가실 필요 없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왕께서 이전에는 뜻이 후하셨는데 지금은 이미 박해지셨습니다. 제가 허물이 없을 때 떠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개 성하면 쇠함이 있고 만나면 떠남이 있으며, 선과 악은 무상하고 화와 복은 스스로 좇는 것입니다. 벗을 맺고도 굳지 못하면 더불어 친할 수 없으며, 친해도 예절이 없으면 오래되면 반드시 업신여기게 됩니다. 이는 샘물을 깊숙이 넣어 길으면 탁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지혜를 이루고 어리석음을 익히면 더욱 미혹해지며, 자주 보면 교만이 생기고 소원하면 원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착한 벗을 맞이함에는 왕래에 때가 있어야 하고, 친하면서도 공경하면 오랠수록 더욱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착하지 않은 벗은 거짓으로 구하는 척하지만 돕지 않고, 교묘한 말솜씨로 달콤하게 말하지만 영합하는 신의가 없는 말들입니다. 나를 예로써 맞이하면 마땅히 공경으로 갚아야 하고, 나를 교만으로 대하면 마땅히 멀리 피해야 합니다. 서로 마주해선 친애하다가 서로 돌아서면 미워하는 자는 사랑할 땐 붙어 있을 수 있지만 미워할 땐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공경으로 선을 가까이하고 계(戒)로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안정된 법도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과실이 없으면 함부로 침범해선 안 되며, 악인의 섬김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앞 사람이 떠나려 한 뒤엔 억지로 친하진 말아야 하니, 은애가 떠난 뒤엔 돌이켜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새는 잠자던 가지가 부러지면 다시 깃들 곳을 구할 줄 아니, 거취에 마땅함이 있는데, 어찌 꼭 일정함만 지키겠습니까? 썩은 가지는 묶어둘 수 없으며 어지러운 뜻은 범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로 미워지려면 만나도 기쁘지 않은 법이며, 불러도 화답하지 않으면 박대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좋아지려면 위급할 때 서로 달려가는 법이며, 진심으로 일러준다면 후대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악한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며, 전에는 공경하다가 뒤에는 교만하고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하지 못하니, 가지 않고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부인이 처음에는 절을 하다가 지금은 팔짱을 꼬고 서있을 뿐이니, 만일 제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욕을 듣고 쫓겨날 것입니다. 처음에는 금 자리를 주시다가 지금은 나무의자로 대하며, 처음에는 보배 그릇에 담았다가 지금은 옹기그릇에 담으며, 처음에는 쌀밥을 주시더니 지금은 싸라기를 주시니, 제가 가지 않는다면 다음에 밥을 땅에다 버릴 것입니다. 아는 사람이 찾아와 서로 만나면 주인은 첫날엔 금처럼 여기다가 이틀 자면 은처럼 여기고 사흘 자면 구리처럼 여깁니다. 이렇게 증거가 분명히 드러났는데 떠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왕은 말했습니다.
‘나라가 풍성하고 백성이 편안했던 것은 패의 힘입니다. 이제 버리고 떠나면 뒤에는 장차 황폐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천하에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이 네 가지 있습니다. 나무에 꽃과 열매가 너무 무성하면 도리어 그 가지를 부러뜨리고, 독사가 독을 뿜으면 도리어 그 몸을 해치고, 재상이 어질지 않으면 해가 국가에 미치고, 사람이 착하지 못하면 죽어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이것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네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악은 마음에서 생겨
도리어 자신을 해치니
마치 쇠에서 녹이 나와
그 형상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네.
왕은 말했습니다.
‘나라에 어진 재상이 없으므로 진실로 패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만일 서로를 버린다면 이는 반드시 위태합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무릇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네 가지 있습니다. 남의 집을 지키고 맡으며, 남의 증인이 되며, 남의 아내를 중매하며, 삿된 말을 듣고 쓰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스스로 위태롭게 하는 것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은
제 몸에 근심을 초래하니
상쾌한 마음으로 뜻을 멋대로 했다가
뒤에는 무거운 재앙에 이르네.
왕은 말했습니다.
‘저는 패를 스승이며 벗으로 여겨 항상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삼가 미치지 못하듯 하리니 나를 버리고 떠나지 마십시오.’
패는 말했습니다.
‘벗에 네 종류가 있으니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꽃과 같은 벗이 있고, 저울과 같은 벗이 있고, 산과 같은 벗이 있고, 땅과 같은 벗이 있습니다. 왜 꽃과 같다고 하는가? 좋을 때는 머리에 꽂고 미울 때는 버리는 것처럼 부귀를 보고 붙어 있다가 빈천해지면 버리니, 이것이 꽃과 같은 벗입니다. 왜 저울과 같다고 하는가? 물건이 무거우면 머리가 내려가고 물건이 가벼우면 솟구치는 것처럼 주는 게 있으면 공경하고 주는 게 없으면 업신여기니, 이것이 저울과 같은 벗입니다. 왜 산과 같다고 하는가? 마치 금산(金山)에 새와 짐승이 모이면 털과 깃이 빛을 받는 것처럼 그 귀함이 남을 영광되게 하고 부의 즐거움으로 함께 기뻐하니, 이것이 산과 같은 벗입니다. 왜 땅과 같다고 하는가? 온갖 곡식과 재보 등 일체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베풀고 기르고 보호하며 그 은덕이 두텁고 얇지 않으니, 이것이 땅과 같은 벗입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이제야 제가 뜻과 생각이 천박해 삿된 말만 듣고 패를 떠나게 한 것임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현명한 이가 쓰지 않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삿되고 거짓된 벗, 아첨하는 신하, 요망한 아내, 불효하는 자식, 이것이 쓰지 않는 네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삿된 벗은 사람을 망치고
아첨하는 신하는 조정을 어지럽히고,
요망한 아내는 가정을 파괴하고
나쁜 자식은 어버이를 위태롭게 한다.
왕은 말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도탑게 대하며 옛날 좋았던 때를 생각해야지 외롭게 버려선 안 됩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사랑하고 도타운 줄 알 수 있는 열 가지 일이 있습니다. 멀리 이별해도 잊지 않고, 서로 보면 기뻐하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서로 부르고, 허물된 말은 참고, 선을 들으면 더욱 기뻐하고, 악을 보면 충심으로 간하고, 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하고, 서로 사사로움은 전하지 않고, 급한 일을 해결해 주고, 빈천할 때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사랑하고 도타운 열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교화하여 선을 따르게 하고
법으로 절차탁마하며
충실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격려하며
의리로 합하는 것이 벗의 도이니라.
왕은 말했습니다.
‘네 신하의 악은 이에 패를 노엽게 하였고 또 나를 기쁘지 않게 했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서로 기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여덟 가지 일이 있습니다. 서로 보면 얼굴색이 변하고, 흘기면서 곁눈질로 보고,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고, 옳은 말을 하는데 그르다 하고, 망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시원하게 여기고, 잘됐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고, 남의 착함을 헐뜯고, 남의 악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싸움을 말리다가 사람을 죽인 것은
오히려 용서할 수 있지만
독을 품고 음모하는 이 뜻이야말로
가까이하기 어렵다.
왕은 말했습니다.
‘제가 완고하고 미련해 밝고 어둠을 구별하지 못하고 악인에게 속아 결국 성인의 뜻을 잃었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현명한 지 알아볼 수 있는 열 가지 일이 있습니다.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하고, 귀함과 천함을 식별하고, 가난함과 부유함을 알고, 어렵고 쉬움을 알고, 폐지와 성립을 분명히 하고, 맡은 바를 자세히 살피고, 나라에 들어가면 풍속을 알고, 궁하면 돌아갈 곳을 알고, 널리 듣고 많이 알고, 숙명에 통달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급한 일이 닥쳐야 벗이 구별되고,
전투를 해 보아야 용맹한 줄 알며,
논의를 해보아야 현명한지 알 수 있고
곡식이 귀해야 어짊을 식별할 수 있다.
왕은 말했습니다.
‘제가 패를 만난 뒤부터 안팎이 편안했는데, 오늘 나를 버린다니 믿고 의지할 곳이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편안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일이 있습니다. 부친의 재물을 얻고, 착한 일이 있고, 배운 바를 이루고, 벗이 어질며 착하고, 아내가 정숙하며 어질고, 아들이 효순하며 인자하고, 종이 온순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살면서 재물이 있고
현명한 벗을 얻으면 쾌활하리라.
어떤 악도 범함이 없고
복이 있으면 쾌활하리라.
왕은 말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은 진실로 쾌활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여덟 가지 쾌활한 일이 있습니다. 어진 이와 더불어 종사하고, 성인에게 질문할 수 있고, 성품의 바탕이 어질며 온화하고, 사업이 날로 새롭고, 분함을 스스로 참을 수 있고, 생각으로 근심을 막을 수 있고, 도법으로 서로 가까이하고, 벗이 서로 속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면 쾌활하고
경전의 도를 연설하면 쾌활하고
대중이 모여 화합하면 쾌활하니
화합하면 항상 편안한다.
왕이 말했습니다.
‘패는 항상 간하기가 쉬웠는데 지금은 어찌 그리 붙잡아두기가 어렵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간하지 않는 열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아끼고 탐하는 경우, 색을 좋아하는 경우, 흐리멍덩한 경우, 성급하고 사나울 경우, 곧장 일을 처리할 경우, 몹시 피로한 경우, 교만하고 방자한 경우, 싸움을 좋아할 경우, 어리석기만 할 경우, 소인(少人), 이것이 열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법다운 말에 어리석기만 하면
귀머거리와 말하는 것 같으니
교화하기 어려운 사람은
간하여 일깨울 수 없다.
왕은 말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교만하고 방자하며 색을 멀리할 수 없고, 패는 무위(無爲)를 얻었으니 다시는 나와 더불어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더불어서 말할 수 없는 사람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오만하고, 노둔하고, 근심하며 두려워하고, 기쁨에 빠져 있고, 부끄러워하고, 말을 더듬고, 원한을 품고 있고,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사무를 보고, 선정에 든 자이니, 이것이 열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행할 수 있는 그것을 말함은 좋으나
행할 수 없는 것을 실없이 말하지 말라.
거짓에는 지성과 신의가 없는 것이니
명철한 이는 돌아보지 않는 바이다.
왕은 말했습니다.
‘나쁜 여인은 아름다운 자태로 응대하는 말씨가 교묘합니다. 만일 바깥에서 음행을 저질렀다면 곧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머리묶음이 기울어진 것, 얼굴빛이 변했고 땀을 흘리는 것, 높은 소리로 말하고 웃는 것, 바라보는 눈빛이 단정하지 못한 것, 남의 보배 장식품을 받은 것, 담장을 기웃거리는 것, 초조해하며 편안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 자주 이웃에 놀러 가는 것, 들놀이를 좋아하는 것, 음탕한 여자들과 왕래하길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녀는 믿기 어려우니
좋은 말솜씨로 사람을 속인다.
그러므로 고매한 선비는
멀리하며 가까이하지 않는다.
왕은 말씀했습니다.
‘인정으로 가까우며 친하고 믿는 부인이라, 그 나쁨을 모르겠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친하고 믿을 수 없는 일 열 가지가 있습니다. 임금의 후함, 부인의 친함, 강건한 몸에 대한 믿음, 재산에 대한 믿음, 큰 홍수가 진 곳, 헌집의 위험한 담장, 교룡(蛟龍)이 사는 곳, 전횡하는 벼슬아치, 전생에 나쁜 인연을 맺은 사람, 독을 가진 벌레, 이것이 열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술은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는 말
취했지만 정신은 멀쩡하다는 말
임금의 후함과 부인의 사랑
이들 모두 확실히 믿기 어렵다.
왕은 말했습니다.
‘패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랑하는 버릇은 악을 일으키니 이는 미워해야 할 것입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미워해야 할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거친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참소하며 싸우기를 좋아하고, 성질내 지껄이며 추한 꼴을 보이고, 질투하며 저주하고, 이간질하며 눈앞에서 속이는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노고를 아끼지 않고
그 보답을 받으려 하면
재앙이 그 몸에 미쳐
스스로 큰 원한만 초래한다.
왕은 말했습니다.
‘무엇을 시행하면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사랑과 공경을 받는 데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부드럽고 온화하게 잘 참으며, 삼가하고 신의가 있으며, 민첩하고 말이 적으며, 말과 실천이 서로 부합하며, 오래 사귈수록 도타운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사랑할 줄 아는 자
부디 지킬 바를 지켜야 하나니
뜻을 높고 원대하게 하며
바른 것을 배워 어둡지 말라.
왕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업신여김을 받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수염이 길면서 교만하고, 의복이 깨끗하지 못하고, 뜻과 생각이 텅 비어 없고, 태도가 음탕하여 무례하고, 희롱하며 무례한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뜻을 걷어잡아 바른 것을 좇음은
마치 말을 다루는 것과 같나니
교만한 버릇이 없으면
하늘과 인간이 공경하리라.
왕은 말했습니다.
‘원컨대 패께서는 뜻을 꺾으시고 함께 정사로 돌아갑시다.’
패는 말했습니다.
‘한집에 살 수 없는 자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나쁜 스승, 삿된 벗, 성인을 멸시하는 자, 반론을 제기하는 자, 음탕한 자, 술을 즐기는 자, 조급하고 패악한 어른,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아들, 절개가 없는 아내, 화장하고 꾸미는 여종과 첩, 이것이 열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을 멀리 피하며
음탕하고 거칠면 벗하지 말라.
어진 이를 친하여 사귀면
밝은 덕을 이루리라.
왕은 말했습니다.
‘패가 있어서 저는 즐겁고 사방이 무사했습니다. 오늘 떠나신다면 온 나라가 반드시 슬퍼할 것입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안락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일이 있습니다. 스승과 어른을 따라 섬기고, 효순함으로써 백성을 거느리고, 겸허하게 자신을 아래로 낮추고, 그 성품을 인자하며 온화하게 가지고, 위급할 때 달려가 구제하고, 자기를 용서하듯 남을 사랑하고, 세금을 줄이며 절약해 사용하고, 원한을 용서하며 옛 정을 생각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일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덕의 근본을 닦고
생각하고 난 뒤 행하며
사람 목숨 구하기를 오로지하면
종신토록 안락하리라.
왕은 말했습니다.
‘저는 늘 패만 생각합니다. 어찌 잊을 때가 있겠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자에게 열두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닭이 울면 허물을 뉘우치고 복을 지으려고 일찍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어버이에게 절하고 어른에게 예하며 일에 임할 것을 생각하고, 사전에 갖추어서 그쳐야 할 바를 생각하고, 위험하고 해로운 언어는 피할 것을 생각하고, 지성으로 허물을 보려고 생각하고, 성실로써 가난한 이에게 말할 것을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소유한 재물을 나눠주고 보호할 것을 생각하고, 음식으로 보시할 것을 생각하고, 때를 맞춰 사람들에게 먹일 것을 생각하고, 공평하게 대중을 다스릴 것을 생각하고, 베풀어 주신 은혜로 군사를 갖출 것을 생각하고, 때를 맞춰 잘 정비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두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힘쓸 바를 다스리며
미리 갖추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사업이 날로 새로워져
마침내 때를 잃지 않으리라.
왕은 말했습니다.
‘패를 머물게 할 큰 현인이 어디 없을까요?’
패는 말했습니다.
‘크게 어진 이에게는 열 가지 행이 있습니다. 학문이 높고 원대하며, 계율을 범하지 않으며, 불교의 3보를 공경하며, 선을 받아들여 잊지 않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압하며,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익히며, 은혜와 덕행을 좋아하며, 민중을 소란하게 하지 않으며, 옳지 못한 것을 교화하며, 선과 악에 어지럽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행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현명한 이는 만나기 어려워
그리 흔치 않으니
그가 태어나는 곳은
친족까지 경사를 입는다.
왕은 말했습니다.
‘저의 허물이 너무 무겁습니다. 악한 사람을 길러 패께서 성을 내며 떠나게 했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큰 악에 열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죽이기를 좋아함, 도둑질ㆍ음탕함ㆍ사기ㆍ아첨ㆍ허식ㆍ참소ㆍ위선ㆍ탐욕ㆍ방탕ㆍ주정, 어진 이를 질투하고 도를 헐뜯는 것, 성인을 해치는 것, 재앙과 허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열다섯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간악하고 음식을 탐하며
어진 사람을 원망하고 참소하면,
행실이 이미 바르지 못한지라
죽어서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리라.
왕은 말했습니다.
‘패를 깨우쳐도 그치지 않으니 제가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부끄러울 만한 것이 열 가지 있습니다. 임금이 정치에 밝지 못하고, 신하와 아들이 무례하고, 은혜를 받고서 갚지 않고,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아내 하나에 남편이 둘이고, 시집가기 전에 잉태하고, 익힌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병장기를 가진 사람이 전투하지 않고, 인색한 사람이 남의 보시하는 것을 보고, 종이 제 할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안다면,
그는 쉽게 이끌 수 있나니
좋은 말에 채찍질하는 것과 같다.
왕은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에야 도가 있는 사람은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열두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주 어리석으면 일을 맡겨 부리기 어렵고, 겁약하면 용맹한 자를 부리기 어렵고, 원수는 자리를 함께하기 어렵고, 들은 것이 적은 사람은 논의하기 어렵고, 빈궁하면 빚 감당하기가 어렵고, 군대로서 장수가 없으면 어렵고, 종신토록 임금을 섬기기 어렵고, 도를 배우면 믿지 않기 어렵고, 악하다면 하늘에 나길 바라더라도 그러기 어렵고, 살아서 부처님 계신 때를 만나기 어렵고, 불법을 듣기 어렵고, 행을 받아들여 성취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열두 가지입니다. 경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목숨 얻기 어렵고
부처님 계신 때 만나기 어려우며
불법은 듣기 어렵고
듣더라도 행하기 어렵다.
왕은 말했습니다.
‘지금 패와 나눈 이야기로 저의 지혜가 늘었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간략히 그 요점을 말씀드리면 사람이 알아야 할 것에 마흔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택을 수리하며, 그 집안을 화목하게 하며, 구족(九族)을 친애하며, 벗을 믿으며, 명철한 스승을 좇아 배우며, 일은 반드시 좋게 이루며, 재주를 뛰어나게 하고 지혜를 원대하게 하며, 마땅히 선을 지켜야 합니다. 부귀하면 은혜를 베풀며, 살림살이를 조심해서 경영하며, 재산이 있으면 사업을 넓혀야 하며, 아들이 어리면 재산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착하게 더불어 사귀며, 영합하는 자는 믿지 말며, 중요한 재물은 현관(縣官)에 둘 것이며, 아침이면 나갈 것을 걱정하며, 매매하고 교역할 땐 진심으로 하고 속이지 말며, 무릇 머물 곳은 반드시 먼저 가서 살펴야 합니다. 가는 곳의 귀천을 알아야 하며, 나라에 들어가면 선한 사람과 친해야 하며, 객은 부호에게 의지해야 하며, 강한 이와 다투지 말며, 옛 부자는 회복하려고 해야 하며, 본래 빈한했으면 큰 희망을 갖지 말며, 보물은 남에게 보이지 말며, 비밀은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임금은 마땅히 어진 이를 공경해야 하며, 용기 있는 자에게 후하며, 성실하고 신의 있는 자를 쓰며, 청렴한 이가 나라를 다스리게 해야 하며, 일에 나아가서는 공을 세워야 합니다. 교화의 도는 효순함을 근본으로 삼으며, 사제 간의 의리는 화목을 귀히 여겨 공경하며, 많은 제자를 두고 싶으면 가르침에 힘써야 합니다. 의원은 효험이 있어야 하며, 기술이 부족하면 쓰지 말아야 하며, 병든 사람은 의원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음식을 절제하여 몸을 편하게 할 줄 알아야 하며, 맛있는 음식은 같이해야 하며, 도박에는 재물과 목숨을 걸지 말며, 빌릴 때는 손수 보증을 붙여야 하며, 바른 것을 따르고 굽지 말며, 지나치게 간하여 성나게 하지 말며, 온순함으로 악을 피하며, 참을 때에는 사람의 귀천을 따지지 말며, 성품이 온화해야 좋으며, 도는 계율을 지키며, 청정을 높이 여기는 것입니다.
천하의 큰 도로 열반보다 뛰어난 것은 없습니다. 열반의 도란 생ㆍ노ㆍ병ㆍ사ㆍ굶주림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가 없으며, 물과 불과 원수와 도둑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은혜와 사랑도 없고, 탐욕과 여러 악이며 근심과 걱정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므로 멸도(滅度)라 합니다. 왕께선 스스로를 보살피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패께서 떠나시면서 또 달리 훈계할 말씀은 없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큰 홍수에 휩쓸렸던 곳은 백 년 후라도 그곳에 성곽을 세워선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물은 반드시 또 옛길을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아서 옛날부터 나쁜 사람이었다면 비록 선을 행하려고 하더라도 여전히 믿지 말아야 합니다. 본심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혹 비행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마치 못을 파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파기를 중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샘물을 얻는 것처럼 일이란 모두 점차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낌새를 보아 그 해독을 구제하는 것이 마치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전후에 말씀한 바를 제가 모두 명심하겠습니다. 온 나라 선비와 부녀자들이 모두 기뻐하며, 이전에 죄악을 저지른 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며 감히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이인(異人)을 만나게 되면 그가 현명한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과 문답해 보면 갖가지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말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고 본받는 법이 본래 곧으니, 이로써 알아볼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성품이 인자하고 부드럽고 근엄하고 아름답습니다. 온화하고 우아하며 지혜가 넓어 많은 착한 이들의 우러름을 받는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말과 행실을 보면 마음과 말이 상응하며, 그 앉고 일어남을 살펴보면 동정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그 나가는 곳을 관찰하면 피복과 소행으로 족히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과 얘기할 때는 그 뜻을 얻어야 합니다. 그 뜻을 얻기 어려울 때는 칼날을 쥔 것과 같으니 그 해독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현명한 이를 섬겨 그 뜻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공경하며 업신여기지 말고, 듣고 받아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현명한 이는 진리를 알고 무위의 도를 체득해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하나같이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물질은 허깨비와 같아서 젊은이는 늙고, 강건하면 쇠하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부귀는 덧없음을 압니다. 따라서 편안할 때 위험을 생각하고 왕성할 때 덧없다 여겨 착한 이는 더욱 사랑하고, 나쁜 이는 멀리 내치며, 비록 원수라도 악으로 되갚지 않습니다. 부드러우나 범하기 어렵고 약하나 이기기 어려우니, 현명한 자는 이와 같아서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밝고 지혜로운 자를 섬기면 어떤 복이 있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성인을 본받아 그 인(仁)을 행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워 사람의 지혜를 이루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면 은혜로 베풀어 선을 행하고, 도를 닦으면 사람들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며, 국가가 위급하면 잘 구제하고 진퇴에 때를 알아 원망 받는 일이 없으며, 널리 은혜를 베풀고 크게 보시하면서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 그를 섬기면 복을 얻어 종신토록 환난이 없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런 자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도를 잃어서는 안 되며, 백성을 권면하여 선을 배우게 하면 나라에 유익됨이 가장 두터울 것입니다.’
왕은 ‘누가 패를 붙잡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너무도 슬프구나’ 하면서 갑자기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며 패를 향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헤엄칠 줄 모르면 깊은 물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를 갚으려면 즐기고 희롱해선 안 됩니다. 친하고 도타웠던 이들이 중간에 다퉜다면 뒤에 다시 서로 사과하고 화해할 줄 안다 하더라도 본래 다투지 않았던 것보다는 못합니다. 착함을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참소를 들었습니다. 저는 나는 새와 같아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으며, 도는 맑고 빈 것을 귀하게 여기니 인간세계는 마땅치 않습니다. 들불이 일어나면 곁에 있던 나무도 불에 타고, 급한 물살에 배가 부서지면 독충이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와 가깝게 사귀면 누구도 시끄럽게 하지 못합니다. 초목은 성질을 달리하며 금수는 종류가 구분되니, 흰 두루미는 본래 희고 가마우지는 본래 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 달라 세상에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마치 평생 산과 숲에서 살아온 시골 노인에겐 좋은 옷을 주어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에 반려(反戾)라는 나무가 있는데 주인이 직접 그것을 심었지만 과일은 먹을 수 없었으니, 과일이 달리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도둑질 해 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도 그와 같아서 나라를 편안하게 한 사람은 내쫓고, 아첨과 거짓으로 정사를 망친 자를 도리어 붙잡아 두고 녹을 먹이고 있습니다. 빈객이 오래 머물면 주인이 싫어하는 법이니, 제가 물러나야 마땅합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인명은 매우 소중한 것이니,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전보다 더 열심히 힘껏 섬기겠습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왕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부인의 미워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천하의 집집마다 모두 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문이 발우를 지니고 걸식하면 저절로 즐겁고 탐욕이 없어지며, 계율을 보전하고 함이 없어서 허물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이제 패께서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으셨다면 소식은 끊지 말고 한 번이라도 다시 찾아와 저에게 한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패는 말했습니다.
‘둘 다 건강하다면 다시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잠시 산에 들어가 뜻을 닦으려 하는 것이니, 대개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멀리 있으면서 서로를 좋게 생각하는 것만 못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비유로써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니 한 가지 일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어떤 사람이 꿀을 칼날에 발라 개에게 핥게 하면 그 혀를 상하면서도 앉아서 적은 단맛을 탐하며 그 아픔을 모릅니다. 이 네 신하도 이와 같아 그 말재주만 아름답고 마음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으니, 왕께서는 그들을 매우 경계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후로 만일 놀랍고 두려운 일이 생기거든 항상 저를 생각하십시오. 온갖 두려움이 반드시 없어질 것입니다.’
패는 다시 말했습니다.
‘올빼미는 무덤을 즐기고, 쥐들은 똥에서 살고, 온갖 새는 나무에 깃들이고, 두루미는 못에서 살아 사물은 각기 성품이 있어 뜻과 욕심이 같지 않듯이, 저는 무위(無爲)를 좋아하고 왕께서는 나라를 좋아하십니다. 그릇이 비록 거칠고 해졌더라도 각기 저장할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곧바로 버려서는 안 되듯이, 어리석고 천한 불초라도 각기 쓰임새가 있으므로 또한 버려서는 안 되니, 왕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말과 뜻이 어디를 향하는지 압니다. 새가 나무에 모이면 먼저 밑가지에 앉아서 지저귀며 위를 향하여 있는 것 같이, 빈기가 짖는 것을 보고 안팎에서 음모를 꾸며 옛것을 싫어하고 다시 새것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패는 물러가겠다 말하고 곧 일어나 성을 나섰습니다. 왕과 부인들이 울면서 전송했고, 대소 인민들이 모두 원망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왕은 따라가다가 잠깐 패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제 누님의 아들이 현명하고 착하니 더불어 묻고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같이 나가서 나라 안을 순행하며 백성의 노래를 듣고 풍속을 관찰하면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왕은 곧 측근 신하와 인민들과 더불어 패에게 예를 올리며 이별하고 보냈습니다. 패가 떠난 뒤 네 신하는 밖에서 종횡하며 아첨하는 말재주로 정사를 행하였고, 부인은 안에서 요사스러운 방술로 임금을 섬겼습니다. 왕은 마음이 미혹해 다시는 나라를 근심하지 않았으며, 사치하고 음탕하여 풍악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향락에 빠졌습니다. 여러 관료들은 마구 징발하고 수탈해 도리란 없었으며, 바르고 공평해야 할 저자의 매매도 더 이상 정당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능멸하며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법률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양민의 아들이 약탈당해 종이 되고, 육친(六親)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서 구차하게 살았으며, 재난이 잇달았으나 왕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풍우가 때에 맞지 않아 심은 것도 거두지를 못해 나라는 텅 비고 백성은 곤궁했으며, 굶주린 이가 길에 가득차고 원망하는 노래 소리는 귀신도 울게 했습니다. 인민들이 근심과 두려움에 도망쳐 거의 다 사라졌고, 울부짖으며 떠나는 자들은 모두 패를 생각했습니다.
≺패는 모든 새 위에 군림하는 솔개처럼 간사한 인간들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며, 하늘의 제석처럼 인민과 만물을 사랑스럽게 보살폈는데.≻
패의 누님의 아들인 도인은 뒤에 다른 군에 갔다가 나라가 황폐하고 어지러우며 마을이 파괴되고 인민이 다 없어진 것을 보고는 돌아와 왕에게 말했습니다.
‘대신들이 올바르게 다스리지는 않고 방종하게 도둑질하며 무고한 이들을 약탈해 죽이는 것이 잔악무도합니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귀신마저 성을 내며 하늘이 자주 재앙을 내린 것을 원근이 모두 알고 있는데 왕만 모르고 계십니다. 지금 서둘러 도모하지 않는다면 얼마 못가 백성이 없게 될 것입니다.’
왕은 그때서야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과연 패가 훈계했던 대로구나. 내가 임무를 맡긴 자들은, 이리를 양떼 안에 둔 것과 같았구나. 수레에 놀라 달아나는 말처럼 백성이 흩어지는 게 당연하다. 도인께서 기왕 말씀하였으니 무엇으로써 가르치겠습니까?’
도인은 말했습니다.
‘패께서 떠나자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모두 간신들 때문입니다. 왕이 다시 생각하신다면 나라가 아직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일차 순행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그 실제를 아셔야 합니다.’
왕은 곧 도인과 함께 몰래 나가 나라 안을 살피며 다니다가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나이는 모두가 열대여섯 살이었으며 의복은 해지고 슬피 울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인이 물었습니다.
‘여러 처녀들은 나이가 찼는데 왜 시집가지 않았는가?’
‘왕가도 저희처럼 곤궁해졌으면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도인은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말은 잘못이다. 왕은 지위가 높은데 왜 너희를 괴롭히겠느냐?’
처녀들이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의 정치가 바르지 않아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었고, 밤이면 도둑들에게 시달리고 낮이면 벼슬아치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입고 먹을 것도 온전치 못한데 누가 저희를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겠습니까?’
왕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다가 여러 노파를 만났습니다. 옷은 몸을 가리지 못했고 파리한 몸에 어두운 눈으로 울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인은 물었습니다.
‘모두들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국왕이 우리처럼 소경이 되면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도인은 말했습니다.
‘그 말은 잘못입니다. 노인들 스스로 눈이 어두워진 것이지 왕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노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밤이면 도둑에게 노략질 당하고 낮에는 벼슬아치들에게 빼앗깁니다. 곤궁한 살림에 땔감이라도 주우러 갔다가 독한 벌에 쏘여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왕의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다가 한 여인이 무릎 꿇고 우유를 짜다가 소에게 밟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땅에 주저앉아 욕했습니다.
‘왕의 부인이 나처럼 밟혔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도인이 물었습니다.
‘소가 당신을 밟은 것이지, 왕가에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왕의 정치가 바르지 않아 나라가 황폐하고 어지러워져 도적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소는 빼앗기고 나쁜 소에게 밟히게 된 것입니다. 어찌 왕의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도인은 말했습니다.
‘그대 스스로 덕이 없어서 우유를 짤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왕가가 잘했다면 패가 스스로 머물렀을 것이고 나라는 어지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다가 까마귀가 두꺼비를 쪼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꺼비가 꾸짖었습니다.
‘나쁜 임금이 나처럼 잡아먹히는 걸 보면 속이 시원하겠다.’
도인은 말했습니다.
‘네 스스로 까마귀에 잡아먹히게 된 것이다. 왕이 너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냐?’
‘보호해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왕의 은택(恩澤)이 없어 정치가 평안하지 않으며, 제사를 폐지해 하늘이 가물어 물이 말랐기 때문에 내가 까마귀에게 잡아먹히는 겁니다.’
두꺼비는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정치할 줄 아는 사람은 한 명의 악인을 버려 한 집안을 구하고, 나쁜 집 하나를 버려 한 고을을 살립니다. 정치를 알지 못하면 인민과 사물이 자리를 잃고 천하가 원망하며 다투게 됩니다.’
도인은 말했습니다.
‘백성은 죄가 없습니다. 아아, 하늘이 감응하여 신(神)이 두꺼비를 시켜 이와 같은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왕께서 직접 자세히 보셨으니, 악인을 물리치고 지난 잘못을 고쳐 앞일을 닦으며 백성과 함께 다시 시작하십시오. 좋은 땅을 골라 씨를 뿌리고 때맞춰 비가 내려준다면 어찌 곡식이 익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
왕은 말했습니다.
‘이제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습니까?’
도인은 말했습니다.
‘서둘러 패를 청하셔야 할 것입니다. 패는 어질고 거룩하며 때를 아니, 나라가 반드시 다시 편안해질 것입니다.’
왕은 돌아간 즉시 사자를 보내 산에 들어가 패를 청하도록 하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패가 돌아오지 않으려 하면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말하라.
≺임금 스스로 온 인민을 저버렸음을 알고는 근심하며 밥도 먹지 않고 패께서 돌아오시기만 고대하고 있습니다.≻
는 원래 인자하고 시방을 근심하는 사람이니, 우리나라가 황폐해졌음을 알면 반드시 올 것이다.’
사자는 명을 받고 패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습니다.
‘대왕께서 정중히 한량없는 공경을 표하셨습니다. 스스로 죄과가 깊고 중함을 아시니, 성인의 뜻을 어겨 나라가 황폐하고 어지러워져 백성이 곤궁해졌다고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패를 생각하며 음식도 잡수지 못하고 계십니다. 가엾게 여겨 한번만 찾아주시길 청합니다.’
패는 인민을 불쌍히 여겨 그 사자를 따라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서 죽은 원숭이를 보고는 그 가죽을 벗겼는데, 이는 말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온 나라의 인민들은 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국경까지 나가 영접했습니다. 패는 성 밖에 이르러 옛 정사에 머물렀고, 왕은 찾아가 예를 올리고 문안을 여쭌 뒤 한쪽에 앉아 합장하고 패에게 사죄하며 말했습니다.
‘미련하여 미처 살피지 못하고 온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스스로 못내 뉘우치오니 바라건대 용서해 주십시오.’
패는 말했습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네 신하가 귓속말을 나누자 패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허물이 없습니까? 왜 떳떳이 말하지 못합니까?’
네 신하는 성을 내며 말했습니다.
‘무릇 사문된 자는 하늘의 복을 바라므로 사람마다 모두 잘한다고 칭찬하는데 원숭이를 죽여 그 가죽을 취했으니 부당합니다.’
패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스스로 미혹해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할 뿐입니다. 옳고 그르며 좋고 나쁨을 하늘은 다 알고 있습니다. 고와 낙은 근본이 있는 것이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을 저지르면 죄가 따라와 오래되더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며, 선을 지으면 복이 따라와 끝내 패망하지 않습니다. 재앙과 복덕은 자기에게 있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이 멀리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벗긴 가죽을 가지고 원숭이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것은 흡사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들은 몰래 몰래 간사한 짓을 행하며 그치지 않았고 서로 가르쳐 가면서 삿된 짓을 일삼았습니다. 목숨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며, 선은 이익이 없고 악을 행해도 재앙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재앙과 복덕의 과보는 메아리와 같으니, 메아리는 소리를 따라 응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지은 악을 어찌 스스로 모릅니까? 무고하고 싶겠지만 자연은 들어주지 않으니, 이것은 나를 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 스스로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당신들 중 한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신(神)도 멸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성인의 말씀입니까? 자기 뜻에서 나온 말입니까? 자기들이 악을 행하고 싶어 도리어 선을 지어도 복이 없으며 악을 저질러도 재앙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하늘의 밝은 모양인 해와 달과 별이 줄지어 위에 나타나 있으니, 이것을 만든 이는 누구입니까?’
네 신하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패는 다시 말했습니다.
‘천지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죄와 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은 선과 악은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는 몸은 버리되 그 행은 없어지지 않으니, 마치 곡식을 심으면 씨는 밑에서 썩지만 뿌리에서 줄기와 잎이 생기고 위에 열매가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짓는 행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마치 촛불이 계속해서 타는 것과 같으니, 옛 심지는 소멸해도 불은 계속 이어져 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행(行)에 죄와 복이 있는 것은 마치 밤에 사람이 글을 읽다가 불을 꺼도 글자는 그대로 있는 것과 같으니, 영혼도 행을 따라 바꾸어 태어나며 끊어지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스스로 높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사람이 어버이를 죽여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네 신하는 대답했습니다.
‘대개 그 가지를 가리는 것이면 그 잎도 따지 않는데. 하물며 어버이를 죽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패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경들이 나를 힐난함은 옳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죽은 가죽을 취하고도 오히려 문책을 받았으니 당신들이 한 짓은 어떻다고 해야겠습니까?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신이 멸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한사람은 고와 낙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고, 한사람은 선을 지어도 복이 없고 악을 저질러도 재앙이 없다고 말하며, 한 사람은 점성술을 안다며 뽐냅니다. 겉으로 착한 척하며 속으로 간사스러운 것이 마치 가짜 금이 그 속은 완전 구리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을 꾸미고 화려한 말을 늘어놓지만 마음으로는 참소하고 도적질을 일삼으니, 마치 이리가 양떼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서 천하의 악인들이 도인을 자칭하며 머리를 늘어뜨려 땅에 눕고, 경전과 계율을 말하면서 아첨과 사기만 일삼고 이익과 욕심만 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신임과 복종을 얻으니 마치 비를 뿌려 티끌을 가라앉힌 것과 같고, 요사스런 무리들이 서로를 혐오하는 것은 마치 물이 넘쳐흘러 제때 바다로 들어가지 못해 많은 곳을 상하고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성인만이 천하를 구제할 수 있으며 악을 교화하고 선을 주어 복을 받게 합니다. 만일 선해도 복이 없고 악해도 재앙이 없다면 옛 성인이 무엇 때문에 경전을 만드시며, 왕에게 날카로운 칼을 주었겠습니까?
대개 행에는 과보가 있으니 그 법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선한 이는 복을 받고, 악한 이는 재앙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은 신속하니 재앙은 더디 찾아오지 않으며, 음덕은 숨기더라도 뒷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왕을 세우면 왕은 하늘을 본받아 다스리며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이를 부려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간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되 각기 그 행에 따라하는 것이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이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신은 행을 따라 태어나니, 이는 수레바퀴가 구를 때 땅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죄와 복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이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귀신이 그를 돕고, 악은 비록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반드시 재앙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계하여 삼가야 하며, 악을 멀리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모두가 선하다면 품성과 기질이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지 못한 이가 많기 때문에 고르지 않음이 있기도 하고 장수하고 요절하기도 하며, 병이 많고 적음과 추하고 단정함과 빈부와 귀천이며 현인과 어리석은 사람 등 고르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장님ㆍ귀거머리ㆍ벙어리ㆍ절름발이ㆍ꼽추의 온갖 병은 모두 전생에 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온갖 복을 받는 자들은 지난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성실하고 바르게 한 자들입니다. 그 때문에 해와 달과 별이 있으며, 하늘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제왕과 부호와 귀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백한 증거들이니 어찌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하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패가 이렇게 말했을 때 왕과 신하와 인민들은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패는 다시 말했습니다.
‘옛날 구렵(拘獵)이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못 가운데서 단맛이 나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달면서도 가시가 적었습니다. 왕은 한 사람을 시켜 감독하며 보호하게 하고 하루에 여덟 마리씩 잡아서 바치게 했는데, 그 감독관도 하루에 여덟 마리씩 몰래 잡아먹었습니다. 왕은 고기가 줄어드는 것을 깨닫고 다시 감독관 여덟 사람을 세우고 같이 지키게 했으나 그 여덟 감독관 역시 각기 하루에 여덟 마리씩 몰래 잡아먹었으므로 지키는 사람이 많을수록 고기는 바닥이 났습니다. 지금의 왕도 그와 같아서 소임이 많을수록 환난은 더욱 심했습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덜 익은 과일을 따면 이미 그 씨는 망친 것이고 먹어도 맛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면서 현인을 등용하지 않았으니 이미 그 백성을 잃은 것이고 뒤에는 또 복까지 없어진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되 바르지 않으면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다투어 뺏으려는 마음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살림살이를 하면서 부지런한 마음을 쓰지 않으면 재산은 날로 소모되는 것이며, 나라에 전쟁의 진법을 익힌 용맹한 자가 있어도 그 뜻이 부족하면 그 나라를 약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되어 도덕을 공경하지 않고 높고 현명한 이를 섬기지 않으면 살아서는 곧 어진 이가 돌아오지 않고, 죽어서는 영혼이 천상에 나지 못할 것입니다. 무고한 이를 약탈하며 살상하고 천하로 하여금 원망하고 다투게 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려 몸은 좋은 이름을 잃게 될 것입니다. 나라를 법으로써 다스리고 정치할 때 성실한 사람을 얻고, 어른을 공경하고 젊은이를 사랑하며 효순하고 선을 받들면 현재의 세상에서는 편안하고 길할 것이며,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마치 앞의 소가 길을 곧고 바르게 가면 나머지 소들도 모두 따라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존귀한 이가 도가 있어서 아랫사람을 바르게 거느리면 원근이 복종하고 귀화하여 태평한 세상을 이룰 것입니다. 왕은 밝게 옛 것을 탐구하고 지금의 것을 통달하며, 동정에 때를 알고 강하고 부드러움의 묘리를 얻어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며 베풀 때에는 공평하게 해야 합니다. 이같이 하면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호하고 귀할 것이며 뒷날 열반의 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대중들은 자리에서 모두 기뻐하며 한량없이 훌륭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왕도 곧 자리를 피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패께서 하신 말씀은 거센 바람이 불어 구름과 비를 몰아낸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자비하신 생각으로 전과 같이 교화를 드리우십시오.’
패는 일어나서 왕을 따라 궁중으로 들어갔으며, 어리석은 네 신하는 이에 파면을 당했습니다. 패가 다시 나라를 다스리자 은덕이 넓게 흐르고 풍우가 절기에 알맞으며 5곡이 풍성하게 익었으니, 온 인민이 기뻐하며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상하가 화락해 드디어 태평세계를 이루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그때의 패가 바로 지금의 나이며, 누님의 아들인 도인은 바로 지금의 아난이며, 그때 남달왕은 바로 지금의 비선닉(卑先匿:바사닉)이며, 그때 부인은 바로 지금의 호수(好首)이며, 그때 빈기라는 개는 바로 지금의 차닉(車匿)이며, 그때 네 대신은 바로 지금의 호수를 죽인 네 도인이며, 그때 말을 한 두꺼비는 바로 지금 아라한이 된 구타야(漚陀耶)입니다. 나는 보살이 되어 태어나는 세상마다 선을 행하고 힘들게 덕을 쌓으며 무수한 겁을 지났으니, 그것은 만백성을 위한 까닭이었습니다. 지금은 스스로 부처를 이루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만나 경전을 들었으니 각기 힘써 나아가 선을 행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3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도의 자취를 밟게 되었으며, 모두 5계를 받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불설패경초』 1권(ABC, K0375 v12, p.243a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