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의 한 동(총 5층)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이다.
사고 원인
시공회사인 대룡건설(주)이 맡은 제3공구 13~16동 아파트에 투입된 총예산은
관급자재로 시멘트 1만 6,614부대, 철근 105만 5,813t(932만 7,026원) 등
2,638만 3,455원이었다.
택지조성비·축대비 등을 제외하면 건축비가 평당 1만 원도 채 안 되는
부실한 공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예산이다.
너무 짧은 공사기간: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26일 준공했다.
와우시민아파트 15동의 설계상 건물 하중은 m2당 280㎏인데
무너진 15동의 실제 하중은 900㎏으로 m2당 600㎏ 이상 초과되어 있었다.
설계상 하중이 280㎏으로 낮게 정해진 것은
당시 불량 무허가건물 입주자들의 생활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70도 경사진 산비탈에 세워진 와우아파트가 위치한 곳은
와우산 중턱인데다가 계곡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를 할 때는 이 점을 무시하고 아파트 뒤쪽만이 암반 위에 얹혀 있었을 뿐,
아파트 무게의 3/4을 차지하는 앞쪽에 기둥 7개만 박아서 기초를 삼았다.
기둥 하나에 19mm 철근 70개씩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5개 정도씩밖에
쓰지 않았다.
또 - - 콘크리트 배합 비율이 엉망이었다.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내어 콘크리트라기보다는 모래와 자갈의 반죽에 가까웠고,
반죽할 때의 물도 불순물이 많은 하수도 물을 썼다.
또한 기둥의 깊이는 2m밖에 되지 않는, 암반이 아닌 부토(敷土) 위에 세웠다.
결국 해빙기인 4월 지층이 내려앉아 건물이 무너졌다.
이 사고로 인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이 일주일 뒤인
4월 16일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까지 지어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총 대상 405동 중 349동이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한편 사고가 발생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와우아파트 다동 뒤의 높이 3m 축대가
다시 무너지는 사고가 났으며, 1984년에는 2동 뒤편 와우산 일부가 폭우로 무너져
내리면서 204호와 205호를 덮쳐 다시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
현재 와우아파트는 철거되었고, 철거 부지는 녹지 공간 와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여파
와우아파트 사건 이후 시민아파트 전체에 대한 안전도 검사가 벌어진 결과
시민아파트가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결과 1971~1977년 동안 시민아파트 가운데 101동이 철거되었고
철거비용이 447동 건립비용에 거의 맞먹는 50억 700만원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충격적 사건과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부실공사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는 1990년대에 일어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 이어졌다.
이렇듯 연이은 사고는 1970~80년대의 하도급 비리와 준공검사의 허점을 드러냈다.
tip - - 또다른 붕괴 사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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