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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는 1817년 전역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이 때 영국은 스리랑카를 지배하기 위해 당시 스리랑카에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종교이자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상좌부 불교를 박살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힌두교를 믿던 타밀족을 일부러 이주시켜서 상좌부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의 주류 민족인 싱할리족을 견제하고 적극적인 개신교 선교를 실시하는 한편,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 사원과 대장경을 파괴하는 등의 행동을 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도저히 불교 기세가 꺾이지 않고 저항이 이어지자 아예 불교의 교리 자체를 깎아내리고 논리성으로 박살내려는 시도를 하게 되죠.
그 일환으로 1873년 파아나두라 대논쟁이라는 종교 끝장토론을 엽니다.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서 영국 제국주의자 눈에 미개하다고 생각되던 스리랑카인들과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식인인 상좌부 불교 승려들에게 망신을 주려고 했죠. 토론도 보면 개신교측이 먼저 발언하면서 불교 교리를 비난하면 그걸 불교측 대표 승려가 막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불공평한 방식이죠.
그런데 개신교측 대표로 나온 두 명의 선교사들은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로 미개인을 대하듯 불교측 대표 구나난다 데라를 공격했지만 전혀 공격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구나난다 데라는 논리적으로 개신교의 공격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존재, 윤리 도덕, 성경 해석 등으로 역공을 펼쳐 개신교측 선교사들이 망신을 당했죠.
더구나 이 토론은 첫날 5천, 둘쩻날 1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데다가 기자들과 지식인들도 모여서 기록하고 있었기에 개신교가 교리 논쟁에서 패배한 사실이 왜곡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스리랑카 전역에 전달되었으며, 토론 패배 이후에도 개신교측은 치졸한 태도를 보여 여론을 더 악화시켰죠.
이후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는 급속도로 부흥하기 시작했으며 상좌부 불교가 싱할리족들의 민족 종교화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1865년부터 1873년에 걸쳐, 불교와 기독교 교단간의 합의하여 종교적 합리성과 본질에 대하여 대규모의 토론이 군중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다섯 번 거행되었다. 계속된 논쟁 중에서, 다섯 번째 대론, 즉 1873년 8월26일과 8월28일 양일간에 걸쳐 파아나두라에서 행해진 파아나두라 논쟁은 논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대립해 왔던 두 종교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그 교리상(敎理上)의 치밀함이나 객관성(客觀性) 그리고 합리성(合理性)의 차원에서 서로를 검증(檢證)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어느 종교가 논쟁에서 이겼는가는 상관없이, 이 논쟁은 역사적(歷史的) 및 종교사(宗敎史)적으로 큰 의미(意味)를 가지고 있다. 십자군 원정(遠征)에 의한 전쟁의 여파가 오늘날의 중동 사태의 한가지 먼 원인(原因)으로 계승(繼承)되어 오는 것이,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진 평화적, 철학적 논의는 그 중요성의 재평가(再評價)가 요구되는 이유 이다. 종교 통합주의(統合主義) /다원주의(多元主義)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이 시점에서, 이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논쟁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함께 음미(吟味)하여야 할 필요성(必要性)이 요구되어 지는 것이다.
파나두라 대논쟁 승리(勝利)에 힘입은 불교계는 파나두라 대논쟁에서 기독교도들 의 불교에 대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우수(優秀)함 을 널리 확인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활(役活)을 하였던 구나아난다 스님을 중심으로 단결(團結) 하였다. 이때부터 스리랑카인들은 불교를 자신들의 민족 종교로 생각을 하고 승단의 불교 부흥(復興)운동에 열심히 동참하였다.
불교도들은 기존의 불교 대학인 위디오디아와 쌍벽을 이루는 위디오랑카를 세워 불교의 체계적 연구를 시작하는 남아시아 두 곳의 대학(大學)을 설립하였으며 초.중.고교급으로는 아난다와 나알란다 콜리지를 세워 기초적(基礎的)인 교육사업에도 기여(寄與)하기 시작했다. 한편 신지 협회(神知協會)를 세운 미국인 올코트는 현재 고따헤나에서 있었던 가톨릭 교도들의 폭력행위에 대해 세계적인 여론을 환기(喚起) 시키는데 성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전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불교기(박띠 기)의 제정, 찬불가의 보급, 다함파살이라는 일요 어린이 법회(法會) 등을 시작하여 다양한 세대의 신도 확보의 길을 터 놓았다. 이 어린이 법회는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의 모든 사찰에서 전통적으로 이어 져 오고 있다.
다만 오늘 아침에 말씀하신 전도사의 반론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삼귀의 문제, 구족계(具足戒)에 대한 논쟁 문제, 아라라카라마와 웃다카라 라마풋타라는 선인(仙人)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는 불타가 이미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에게 귀의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불타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전혀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바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불타의 죽음에 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불타의 죽음은 3단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죽음은 번뇌의 죽음(Kle a Parinirv a, 煩惱般涅槃)이며, 두 번째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Skandha Parinirv a, 蘊般涅槃)이며, 세 번째 죽음은 불사리의 죽음(Dh tu Parinirv a, 舍利般涅槃)인 것입니다. 첫 번째 죽음은 불타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우침을 성취했을 때였으며, 두 번째 죽음은 말라바(Mallava; 부처님 당시 인도의 16대국의 하나) 왕국의 사알라(S la; 娑羅)라고 하는 마을 숲 속에서 육체의 5가지 각 구성 부분(色, 受, 想, 行, 識)이 끝났을 때, 즉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며, 세 번째 죽음은 불타의 사후(死後) 5천년 뒤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불타의 사후 5천년 후에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불타의 모든 사리(유골)가 그가 깨우침을 얻었던 인도의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저절로 집결되어 생전에 불타의 육신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천신들에게 극히 짧은 시간에 법을 설하고 불사리 그 자신이 화장되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2500년 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때까지 불사리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불타가 완전히 죽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이미 죽어 없어져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전도사의 의견은 결코 올바른 의견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타가 생존 시와 똑같이 선근 공덕을 쌓아 부처님을 안치하고 있는 사리탑에 공양하고 불상이 모셔져 있는 곳에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며, 이 같은 실천 행위는 불교 신도로서 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을 언제나 새롭게 하며 공양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자에게는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늘 살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또 법(Dharma, 진리)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경에 귀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불타의 가르침이며, 그 법은 불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실행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그것에 의해서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승가(Sangha, 승단)에 귀의한다 함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승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승가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승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리야(arya, 성스런, 성자) 승가이며, 두 번째는 삼무티(sammuti, 집단에 의한 선출•선정) 승가입니다. 아리야 승가라고 하는 것은 4가지 과(四果)를 증득한 수행승들을 가리키며, 삼무티 승가는 4가지 계율의 방법에 따른 구족계의 의식에 의해서 비구승의 한 사람이 된 자를 의미합니다. 승가에 귀의하는 우리들은 아리야 승가에의 귀의인 것입니다. 아리야 승가를 숭배하고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들은 무한한 선근 공덕을 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말에는 이상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 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비유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괴로움은 불타에게는 없습니다. 언제나 일체 사물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불타는 항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항상 사물을 관찰할 수 있는 여호와의 지혜의 눈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필요로 할 때만 그 지혜를 발휘해서 관찰할 수 있는 불타의 지혜의 눈은 대단히 행복한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라라카라마와 웃다카라마에 관한 문제는 이상으로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기독교인 친구들이시여!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주의 깊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성도들은 천지 창조자가 그 누구인가를 잘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한 증거가 기독교 성경 자신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1장 제2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물 위에 떠 있어 운행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물 표면에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 것도 창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이라 하는 것은 대기의 공기가 통하게 되면 반드시 그곳에 미생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공기, 불, 그리고 물의 요소들은 상호 합성되면 그 무엇인가 미생물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물 위에 떠 있어 운행하신다.’라고 기록한 성경의 저자는 다른 의미가 아니고, 만물이 탄생하는 원인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물은 공기, 불, 물의 세 가지 요소가 존재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천지의 창조자는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의 요소, 즉 공기, 불, 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구제자도 수호신도 이상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요소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으로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편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처음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틀린 논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항상 공존(共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기의 요소 속에서 불과 물이 항상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일체라고 말하는 것도 옳은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소의 명칭들도 기독교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인 것입니다. 또 이 세 가지 요소들을 그들의 하나님(God)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Brahm), 비슈누(Visunu), 마헤슈바라(M he var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명칭은 어찌되었건 이것들은 모두 조물주(造物主)인 것입니다. 이 외에는 조물주 혹은 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기독교의 신자들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금단의 나무(Forbidden Tree) 열매, 그 나무 열매를 먹는 것, 그리고 뱀이 아담을 속여서 과일을 먹게 하는 것,과일 따먹은 아담을 처벌한 것 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신이라고 기독교 신자들은 결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는 것, 그리고 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고 그들이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계시지 못한 이러한 것들을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금단(對象)의 나무 열매는 아담이며, 뱀(柱:마음)은 성적인 음욕이며,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성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 열매를 먹은 이브에게 내린 처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임신과 출산이었습니다. 그녀가 받은 처벌 때문에 이브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의 그 괴로움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구약성서 창세기 제3장 16절)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그 나무 열매를 먹은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성경 작성자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에 의해서 탄생된 것과, 아담과 이브의 성교에 의해 출산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는 이유로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처벌로서 부과한다고 정했을까요? 그것은 마치 스리랑카에 호박(pumpkin)도둑은 그의 어깨에 남은 자국을 보면 안다.는 말에 상당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속담과 같이 현명한 사람들은 이브에게 가해진 처벌을 보고서 금단나무 그리고 뱀과 과일을 따먹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 여러분! 당신들께서는 인간의 생식(生殖)에 관한 성경의 우화를 이해하지 않은 채 창조신이 있다고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 드린 충분한 자료의 입증으로서 기독교인 여러분들께서는 지금까지의 환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며,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 인간들이 고뇌와 고통 속에서 구제 받기 위해서 신앙 할 필요가 있는 종교가 아님을 적어도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 바입니다. 아직도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몇 분 남아있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불교가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인가를 몇 가지만 더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최후를 장식하는 저의 견해이므로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더욱 더 자기 자신들이 고차원적이며 정신적 양식인 일상생활의 종교문제에 대해서 재고해야 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진정 보람 있는 삶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은 올바른 종교에 귀의하여 그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선근 공덕을 쌓고 노력하지 않는 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교, 진리의 종교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예컨대 황금의 장신구를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기 전에 황금 세공인에게 그 금이 순금인가 아니면 18금인가 등의 가치를 판단해 받은 다음에 사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모르고 18금을 순금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사고 나면 반드시 손해를 볼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도 그 선택에 있어서 현인(賢人)들에게 묻고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예전의 현인들은 이 지구의 대지와 같은 무한의 지혜와 선견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수행 뿐만이 아니라 세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학문, 기술, 예술 등 각 분야를 완전히 습득하여 인망과 덕망을 겸비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인들은 예전의 현인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몇 만 분의 일도 지혜와 덕망을 겸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날의 현인들이라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없는 모든 지혜와 덕망은, 그들은 이미 존재치 않으나 예전의 현인들이 남겨 두었던 우수한 저서들 속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들에 의해 기록된 주옥과 같은 저서를 보고서 진정한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들의 저서는 베다(Veda)99), 푸라나(Pura)100), 의학, 천문학 등 지혜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 저는 베다비야사(Vedavysa)라고 하는 현인에 의해 저술된 <바가바타푸라나(Bhagavathapur a)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계문이 실려 있습니다. 현대적인(이 문헌 서술 시대에서 본) 시대가 되면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미혹(迷惑)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불타라고 하는 성인이 쿠카타테스(Kuka e u)라는 곳에 탄생할 것이다. 현 시대를 카리유가(Kaliyuga)라 하고 그 이전의 시대를 드바파라유가(Dvaparayuga)라 하며, 이 드바파라 시대에 생존했던 선인(仙人)이 이것을 저술한 것입니다. 드바파라 시대의 선인이 위에서 말씀드린 계문 속에서 현대적인 시대가 오면 현재 인도의 부다 가야(Gaya Seersa)라는 곳에 불타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가 성도하기 수천 년 이전에 벌써 선인들이 부처님 탄생을 예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가바타푸라나>는 불교 관계의 책이 아닌 선인들의 말들을 기록한 저술입니다. 그러므로 불타의 출현을 예언한 것은 불교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종교의 선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선인들이 예언한 것들 중에서, 이 세상에 여호와라고 하는 창조신이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제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와 그리스도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육식을 좋아하는 자들이 기록한 것과 같이, 살해한 비둘기, 양, 염소, 가축 등의 수를 기록한 성경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패된 성경을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 누구도 신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한 서양의 학자들도 선뜻 신앙하려고 하지 않는 기독교를 왜 전통적인 불교국인 우리가 믿어야 합니까? 우리들은 이와 같은 기독교를 결코 신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기독교를 신앙했던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기독교를 멀리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의학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해와 같은 자비심으로써 고대의 선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과학입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의학은 고대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전해 오는 아유르베에다101)를 의미함) 유명한 의학 서적의 하나인 <바이삿자 칼파(Baisajja Kalpa)>에 불교의 위대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계문에 의하면, 핏팔리(Pipphal , 학명: Piper Longum), 바아사(V s , 학명: Adhatoda vasica), 부루(Bullu, 학명: Myrobalam), 슌티( u h , 학명: Zingiber Offloinale), 카삼빌리야(Kasambiliya, 학명: Tragia Involucrata)이 5가지 나무 열매 및 약초를 푹 달여 마시면 기침병과 열병이 치료되는 것은 마치 불교를 실천해서 윤회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전생이 없다고 부정하는 기독교는 참 종교가 아닌 그릇된 종교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사쿠마라차리타(Da akum racarita)라는 시를 지은 당대의 시성(詩聖) 단딘(Da in)의 저술인 <카비야다르샤(K vy dar a)>103)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말씀은 오직 진리뿐이며, 추호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행무상이라고 불타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닌 분명한 진리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주석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멸하고 생한다는 진리는 불타의 가르침이다.’라고 불교의 참 진리성을 찬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그 어느 종교보다도 수승한 종교임을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타 문헌에서도 얼마든지 증명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월등히 수승한 진정한 종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으로서 불교와 기독교를 이해하시는 데는 충분한 자료와 논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기독교를 버리고 진정한 진리의 종교인 불교를 신앙 하시고 실천수행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께서는 불교의 수미산설에 관해서, 세계를 항해하는 항해자가 수미산과 같은 거대한 산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수미산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께서 말씀하듯이 우리들 인간의 육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금단의 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자들이 ‘금단의 나무’가 생식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한 일은 문헌이나 새 소식에서도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수미산이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았음이 명백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저는 아트만(atman, 영혼)과 푸라마(prma, 생명) 등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만, 그것은 특별히 어려운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 일상생활 중에서 극히 일반적으로 사용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의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참된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시어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멀리 떠나 열반(nirvana,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이라고 하는 안락한 세계에서 생활하도록 노력 정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는 바입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이 끝나자 1만여 명의 불교, 기독교 신자들이 일제히 사두, 사두(S dhu, S dhu)라고 소리 높여서 제창했다. 어느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에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불교인들, 기독교인들 그 어느 쪽에서도 소동과 난동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평온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과 목사님이 청중들에게 정숙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군중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때 불교 신자들은 대단한 기쁨에 차서 집회에서 해산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불만이 끓어올라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기분으로 집회장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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