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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원문보기 글쓴이: 윤거사
기획연재 활어회(活魚膾)와 능지처사(凌遲處死) 김지수 (전남대 법대 조교수) 새 숲에 웬 바닷바람? 내가 대학 다닐 적만 해도 신림동(新林洞)은 서울의 한적한 변두리로서, 문자 그대로 풋풋한 새 숲내음이 나는 전원 풍경이었다. 그 뒤로 20여 해가 지나면서 그야말로 눈부시게 변모했건만, 그 동안 나는 그러한 환경의 변화에 매우 둔감하게 지내왔다. 그 사이 대만(臺灣)에 3년간 유학 다녀오고, 그 때 배워온 채식 실험에다 박사논문 집필에 몰두하느라 세상 물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가끔씩 운동 삼아 관악산에 다니는 걸 빼고는, 10년 가량 거의 칩거(蟄居)하다시피 했으니, 내 눈에 띄는 것은 고작 신림동 거리뿐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조용하고 평온하게만 느껴지던 신림동에 최근 몇 년 전에 갑자기 이상한 바닷바람이 불어닥쳤다. 남부순환도로가에 2-3층 짜리 대규모 가건물같은 철골 구조가 올라서고 어느새 근사한 모습으로 단장하더니, 인천 부두가에나 있을 법한 ‘회집’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등산 갔다 귀가하는 길에 보면, 거의 언제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갯바람과 비린내 속에서 보낸 인연으로 낯설지 않은 생선 음식 문화이련만, 채식 실험을 하기 시작한 뒤로는, 알게 모르게 마주치지 않고 싶고 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재작년 3월 대학에 취직하여 이 곳 빛고을(光州)에 내려오면서, 내 생활에는 상당한 진통 어린 변화의 압박(stress)이 닥쳤다. 신임 교원 연수차 외박하는 일도 큰 고통이었거니와, 마지막날 회식 장소인 무슨 생선회집은, 들어가기조차 몹시 싫고도 힘든 수난 그 자체였다. 취직 자체를 하나의 실험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터라, 남들한테는 희색만면의 환영식이었을 통과의례조차 내게는 선택의 대가로 치러야 할 불가피한 십자가일 수밖에 없었다. 직장 선배님들한테는 술 안 마시고 채식한다는 내 기본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양해를 구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열리는 회식은 아예 참석하지 않기는 좀 뭐해서, 일단 같이 따라가서 내 본분만 스스로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웬놈의 고기집과 생선집은 그리도 많은지? 재작년 한해 동안 글쎄 스무 번 가량 내키지 않은 나들이를 했을까?
활어회(活魚膾)의 현신설법(現身說法) 마침내 결단의 인연이 다가왔다. 취직한 지 꼭 1년쯤 되던 지난 2월말, 그 날도 직장 회의 뒤끝으로 가까운 생선회집에 갔다. 그 날도 나는 맨 끝 자리에 어정쩡하게 앉아, 남들 먹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지못해 바라보아야(觀照)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보지 말아야 할 잔인하고 참혹한 진풍경을 차마 눈뜨고 보고 말았다. 무슨 물고기인지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상당히 크면서 좀 넓적한 (도미나 넙치류?) 생선회를 떠 왔는데, 회집에서 펄펄 살아 있는 생선임을 실물로 증명하기 위해서, 양쪽으로 회를 뜨고 남은 생선의 뼈대를, 즉 감지도 껌벅이지도 못하는 물고기 특유의 동그란 눈을 부릅뜬 채 머리와 꼬리 및 등배 지느러미, 그리고 앙상한 가시만 남은 척추뼈대의 몸통을 넓은 접시에 받쳐 깔고, 그 위에 회를 가지런히 담아 내 온 것이었다. 진짜 이런 ‘활어회(活魚膾)’는 처음이었다. 내가 눈이 나쁜데도 안경을 잘 안 쓰는 까닭은, 바깥 사물을 유심히 자세하게 관찰하고 싶지 않은 소망 탓이기도 하다. 헌데 이 날은 내가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보고 싶어한 것도 아닌데 진짜 활어회의 모습이 접시 통째로〔全盤〕 한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예리한 칼날에 도대체 몇 번에 걸쳐 섬뜩섬뜩 온 몸의 살이 도려져 나갔을지 모를 생선이, 글쎄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알몸이 된 겨울나무처럼 이랄까,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산 해골 모습으로 아가미를 벌름벌름 거리며, 눈물도 못 흘리며 원한(怨恨)의 읍소(泣訴)를 하는지 체념(諦念)의 탄식(歎息)을 하는지, 여하튼 온 몸을 나투어 마지막 생명의 빛으로 뭔가 진리를 설파(說破)하는 것만 같았다. ‘현신설법(現身說法)’이란 말이 이토록 생생하고 절실하게 체현된 적은 여태껏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끓는 탕 속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접시채 들려 나갔다. 나는 내심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처했다.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도록 잡아끄는 이상하고 미묘한 힘을 느꼈다. 선배 어른들의 즐거운 향연(香宴)의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세속의 인사예절도 알게 모르게 상당히 의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아니 그 이상의 어떤 무의식적인 정신(精神)과 심기(心氣)가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물고기가 전생(前生)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왜 금생(今生)에 그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을 도마 위에 접시 위에 희생으로 바쳐 나를 사로잡았을까?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진리를 설하기 위해서? 나는 그 소식(消息)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분명히 모르지만, 그 때 그 접시 위에서 벌어진 사실과 모습을 그대로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그 자리에서 확실해졌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뼈저린 회한(悔恨)의 추억(追憶) 나는 이제 생선집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제목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내가 어렸을 적 자란 바닷가 경험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참회(懺悔)와 사죄(謝罪)의 마음이 간절해졌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내 고향은 위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황금 조기들이 펄떡펄떡 산 채로 경매되는 활기찬 항구였고, 선친(先親)께서 그 부두노동조합장을 하시는 동안, 우리 집은 그런 산 생선을 곧잘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런 생선 맛이 아마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 때는 복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커다란 죄업(罪業)만 지었음에 틀림없다. 어린 나도 가끔 어판장에 나가 그렇게 펄펄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며, 박대나 쥐치 껍질을 벗기고 갈치 창자를 도려내는 모습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도 보았다. 그리고 특히 마음에 걸리는 죄악은, 내가 손수 닭 모가지도 죄어 죽여 잡아보고, 아마도 대학 초년쯤일까, 조그만 배를 타고 고향 앞바다에 나가 처음이자 끝으로 줄 낚시질을 하여, 잡혀 올라온 망둥이를 그 자리에서 산채로 토막내어 초장 찍어 먹었던 일이다. 아무리 참회하고 사죄해도 지워지지 않는 죄업의 기억이다. 철 없던 시절, 생명의 존엄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중생심(衆生心)의 과오(過誤)지만, 되돌이킬 수 없는 회한(悔恨)으로 뼈저리게 되살아 나는 것이다. 여하튼 지난 2월말 목도(目睹)한 활어회는 나한테 깊은 상념(想念)과 참회(懺悔)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고, 법제사(法制史) 전공에 걸맞게 ‘능지처사(凌遲處死)’의 비유를 영감(靈感)으로 내려주었다. 그렇다! 수십 번씩 섬뜩한 칼날에 그 연약한 살이 얇게 썰려 나가면서 극도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외마디 비명(悲鳴)이나 신음(呻吟)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아니, 그 비명과 신음 소리가 너무 작아서 16Hzeh 못되거나 아니면 너무 커서 2만Hz를 넘는 까닭에 우리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것뿐이리라!) 마지막 생명의 숨결을 벌름벌름 거리다가 마침내 끓는 탕(火湯) 속에 들어가 숨이 끊어지는 그 활어회는, 분명히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시행한 적이 있던 잔인하고 참혹한 ‘능지처사’의 형벌과 너무도 똑같이 닮아 있다!(생선회를 뜻하는 일본어 ‘사시미(さしみ)’는 한자(漢字)로 몸을 찌른다는 뜻의 ‘刺身(자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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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캄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