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켜고 된장을 만드는 것과 무당을 하는 게 서로 다른 게 아니더라고요. 된장을 만들어 사람들의 육체적인 건강을 보살폈다면 음악과 무당은 정신적인 부분을 보살피는 거죠.” 서울대 음대를 나와 독일 브람스 음악원에서 강사로 활동할 만큼 잘나가던 첼리스트가 스님과 결혼, 된장사업가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던 도완녀(61) 씨는 지금은 무당이다. 2010년 3월 지리산과 계룡산에 들어가 백일기도 끝에 신내림을 받았고 그해 9월14일 서울 강동구 둔촌역 인근에 ‘도완녀 신당’을 차렸다.
1993년 경전번역가이자 조계종 학승으로 유명했던 돈연(69) 스님과 결혼해 강원 정선군 두메산골에서 무공해 된장을 빚어 한창 때는 연 매출이 60억 원이나 되는 된장회사를 키웠던 도 씨는 어느날 갑자기 무당이 됐다. 사회통념상 사업가에서 무당으로 변신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도 씨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무당이라는 직업에 대단히 만족한다며 더 이상의 변신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명상과 단식과 기다림의 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그땐 그게 뭔지 잘 몰랐지만… 음악이 명상이고 된장을 만드는 것도 수행이잖아요. 그리고 무당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2005년도에 미국 가서 명상을 하게 됐는데 어떤 동굴에서 수염이 허연 도사님이 일어섰다가 앉았다를 반복해요. 그때는 내가 명상이 덜 돼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는데 2009년 명상 때도 똑같은 도사님이 탁 일어서더니 동굴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데 가슴이 무지무지 시원하더라고요. 그때 나는 이제 밖에서 사람들의 정신적인 부분을 도와줘야 하는 구나라고 생각했죠. 그해 12월31일 남편하고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 있잖아, 산에 가서 백일기도 하고 무당돼야 해’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남편이 당혹스러웠을 것 같은데, 한참 생각을 하더니 ‘그래 마누라가 공부하겠다는데 말리면 안되지’라며 산에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도 씨에겐 돈연 스님과 사이에 낳은 큰딸 여래(19), 아들 문수(18), 작은딸 보현(16)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큰딸은 고등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가 패션디자이너 공부를 하고 있다. 막내딸은 애니고에 들어갔다가 뮤지컬학교로 옮겼다. 중학교를 마친 아들은 아버지가 있는 정선에서 주로 살면서 소설공부를 하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 결혼하면서 승적을 떠난 남편이지만 여전히 불교경전 번역에 매진하면서 정선에서 계속 농사를 짓고 있고 가끔 서울 집에 들른다.
갑자기 무당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이 아이들에게 설명을 잘 해줬어요. ‘엄마는 굉장히 훌륭한 분이라 다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그리고 섬세하게 무당의 역사라든가 이런 것을 아주 진지하면서도 쉽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무당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어요. 요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자유로워요. 부모들 직업을 쓸 때 아빠는 ‘농사’ ‘시인’ 이렇게 쓰는데 어머니는 ‘무당’ 이렇게 적어요. 그래서 제가 옆에다 괄호 열고 첼리스트라고 적으면 안될까라고 슬쩍 떠봤더니 아이들이 ‘엄마 본업이 무당이잖아’라더군요.
돈연 스님과 도완녀 씨의 첫 만남은 1977년 독일문화원에서 이루어졌다. 경전번역을 서원했던 돈연스님은 독일로 건너가 앞선 학문을 배우고 싶어 했고,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도완녀 씨는 독일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천주교인이던 도완녀 씨에게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돈연 스님은 그저 박학하고 유머 많은 한사람의 친구에 불과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공연 등 음악활동에 매진하던 도완녀 씨는 한국예술기획을 설립, 1992년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나움 그루버트 초청연주회를 개최했다. 평소 불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루버트는 연주회 후 참선에 대해 배우길 원했는데 도완녀 씨는 당시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스님, 돈연을 수소문하게 됐다. 첫 만남 이후 16년만의 일이다.
명예와 부귀를 내던지고 모 일간지에 연재하던 원고를 팩스로 보내놓고 교정을 봐달라던 것도 연애라면 연애랄까, 제대로 된 연애 한번 없었다. 1993년 3월 “강원도 정선에 와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소?” 란 무덤덤한 프러포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5월 정선으로 옮겨와 7월6일 결혼했다. 빛바랜 승복과 10년도 넘은 낡은 한복을 입은 기이한 신랑신부의 결혼식은 세간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조계종 초대 교육국장을 지냈고, 걸출한 학승으로 이름을 날리던 스님이 25년간 쌓아올린 명예를 한순간에 내던지고, 서울대 음대와 독일 유학까지 마친 유망한 첼리스트와 결혼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잊지 못할 도반 영조스님의 주례사 한마디 “지금도 나는 이 결혼이 꼭 이뤄져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다시는 우리 주위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첫댓글 제가 마포구 상수동에 살 때 이웃에 사셨던 도완녀씨... 그 당시 별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스님과 재혼하면서 세간의 화제를 모았지요. 참 사람의 한 평생이 변화무쌍하다는 생각^ 자유롭다면 자유로운 영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