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의 날 선언문 / 한국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다. 우리는 시로써 저마다의 가슴을 노래로 채워 막힘에는 열림을, 어둠에는 빛을, 끊어짐에는 이어짐을 있게 하는 슬기를 얻는다. 우리 겨레가 밝고 깨끗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그러한 시심을 끊임없이 일구어 왔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이에 시의 무한한 뜻과 그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하여 신시 80년을 맞이하는 해 육당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소년」지에 처음 발표된 날, 십일월 초하루를 '시의 날' 로 정한다
낭독 황봉학 강수연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꽃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 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낭송 노금선
낭송 노금선
계월향에게 / 한용운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낭송 송보라 장학임
그대는 나의 소중한 별 / 김소엽
우리네 인생길이
팍팍한 사막 같아도
그 광야길 위에도 찬란한 별은 뜨나니
그대여,
인생이 고달프다고 말하지 말라
잎새가 가시가 되기까지
온몸을 오그려 수분을 보존하여
생존하고 있는 저 사막의 가시나무처럼
삶이 아무리 구겨지고 인생이 기구할지라도
삶은 위대하고 인생은 경이로운 것이어니
그대여,
삶이 비참하다고도 말하지 말라
내가 외롭고 아프고 슬플 때
그대의 따뜻한 눈빛 한 올이 별이 되고
그대의 다정한 미소 한 자락이 꽃이 되고
그대의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이슬 되어
내 인생길을 적셔주고 가꾸어 준
그대여
이제 마지막 종착역도 얼마 남지 않았거니
서럽고 아프고 쓰라린 기억일랑
다 저 모래바람에 날려 보내고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만을
찬란한 별로 띄우자
그대가 나의 소중한 별이 되어 준 것처럼
나도 그대의 소중한 별이 되어 주마
이 세상 어딘가에 그대가 살아 있어
나와 함께 이 땅에서 호흡하고 있는
그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는 고맙고 행복하나니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그대는 나의 가장 빛나는 별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낭송 권영희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바람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낭송 송순복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이근배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 길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고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 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멧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이제 손에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나
한 식구 한 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낭송 이미숙
나는 강도다 / 이정하
89세 엄마는
돈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제 돈에.
엄마는 투석환자입니다
시 쓴답시고 평소 놀고 먹는 제가 평일에 두 번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닙니다
토요일은 직장을 쉬는 형이 당번이고. 그러니까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어김없이 제 지갑 점검을 합니다
“어디 보자”
“말라꼬?”
“돈 있나 없나 한 번 보자카이”
“내 참 돈 없다케도”
“이노무 자슥이......”
제가 끝내 보여주지 않으면 엄마는 주섬주섬
비닐봉지로 돌돌 만 당신의 지갑을 꺼내십니다.
“사나가 지갑 비어 있으면 몬 쓴데이. 니 나이나 적나.”
인생의 우여곡절은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잘나간 한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늘 돈에 곤궁한 막내아들이 당신에겐 애처럽고 딱하고
아픈 손가락입니다
저는 차마 받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봅니다
“어여 에미 팔 떨어지겠다”
나는 당신의 강도입니다
한평생 내어주고도 얼마나 더 그러시렵니까
꼬깃꼬깃 꿍쳐둔 노령연금까지 빼앗아 가는
나는 당신의 강도입니다
낭송 최여연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는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낭송 이루다
내가 바라는 세상 / 이기철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 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욱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요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 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입니다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밝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낭송 윤인국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 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낭송 이종숙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인생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 없고
인생이 무엇인가
정말로 알고 인생을 사는 사람 없다.
어쪄면 인생은 무정의용어 같은 것
무작정 살아보아야 하는 것
옛날 사람들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오래 그래야 할 것
사람들 인생이 고달프다 지쳤다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가끔은 화가 나서
내다 버리고 싶다고까지 불평을 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비록 그러한 인생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조금쯤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인생은 고행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다
우리 여기서 ‘고행’이란 말
‘여행’이란 말로 한번 바꾸어보자
인생은 여행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너와 함께라면
인생은 얼마나 가슴 벅찬 하루하루일 것이며
아기자기 즐겁고 아름다운 발길일 거냐
너도 부디 나와 함께
힘들고 지치고 고달픈 날들
여행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지구 여행 잘 마치고 지구를 떠나자꾸나
낭송 안정심
돌아보면 모두가 사랑이더라 / 장시하
낭송 김태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 밥상 /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 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 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 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 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에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애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 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 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 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낭송 서문순
목포항 /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개 바늘을 꽃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을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냥송 송혜정 잔옥희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어디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일까
한 시대 에둘러 돌아와 후득이던
고향의 예감 같던 바람 소리
한 시절 바람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몸 전체가 온통 한 포대의 바람이었다
나는 날마다 들끓는 바람이 되어
세상의 끝을 헤매다녔고
돌아오는 길은 고향 뒷산 밤나무 숲
밤꽃 향기에 목이 메었다
그 시절 바람은 열이면 열 눈먼 장님이어서
분수처럼 산화하고 자폭했다
어디를 가도 꿈꾸던 나라, 도시는 없었다
인생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눈감고 돌아서는 뒷모습
그 등에 붉은 저녁노을 실의의 그림자
길게 멀어져 가고
젊고 푸르던 바람은 그렇게 이별했다
그 바람 언제부턴가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하늬바람 되어
내 가슴 시리게 후비고
밤새 눈뜨고 먼 하늘 중천에 길도 없이 떠돌고
한 주름 빗방울로 운명해 갔다 남은 생애.
이제 바람 한 점 없는 아득한 변경
어디로 갈까 길을 물어도
대답 없는 내 안의 산골짝에서
가랑잎 한 장 부서지는 소리로
귀를 씻는다
섬으로 쌓인 세월의 부피 키를 넘어 숨이 차고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아
가슴엔 길로 자란 백발의 그리움 하나
출구 없는 빈집 혼자 지킨다
낭송 김춘경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낭송 박성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서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는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 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음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ㅡ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것네
낭송 홍정해
시인공화국 /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그곳에도 저렇게,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따사롭고 싱그러이,소리 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능금들이 자꾸 익고,꽃목들 흔들리고벌이 와서 작업하고,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그가난하나 다정하고,외로우나 자랑에 찬,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그리하여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못 내려온 것일까?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이 땅 위엔 아무 데도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사랑과 연민과 기다림과 기도의,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이 땅 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낭송 이분엽
신발 한 켤레 / 허석
신발 한 켤레-허석
어머니 작은 아파트 현관에
상표도 없는 허름한 작업화 한 켤레
혼자 살기 무서워
남정네 신발 하나 두었다고 하지만
낯익은 조각 그림이 풍경처럼 걸어 다닌다
감물 든 베적삼처럼
멍울진 그리움은 흔적으로 깃드는 법
거친 세상을 맨몸으로 부딪쳐온 낮선 상처들
하여, 발을 잃은 그 신발은
길바닥에 젖은 빗물 같은 이력서를 가졌다
신을 일도 없는 구두보다
사시사철 공사장마다 평생을 동무하던 작업화
바깥 관절이 다 뭉개져 삐걱대던 시간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걷느라
집에 돌아와서도 홀로 구부정한 밤을 지새웠다
양탄자 한 번 밟아본 적 없이
가장의 끈 동여맨 흙투성이 길 위의 신발
쉼표도 없는 삶의 등짐
흔들리는 버스에[서나 잠시 쉬었을 뿐
봄 햇살에 산뜻하게 광내보는 날도 없었다
살며시 열어본 속살
발바닥 지문 사라진 노동의 무게에
몸으로만 닳고 닳은 오목가슴의 뒤축
더 이상 길 위에 나설 일도 없는 지금
새척지근한 땀내만 낙오병처럼 남아
바람을 앞질러 가던
아버지 발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낭송 홍성례
억새 / 박덕은
가끔은 억새처럼
당신의 손길 잡고 싶다
밤이 긴 추억의 터미널에서
막차 탄 사랑을 떠나보내며
창문 밖으로 내민 아쉬움 잡고 싶다
머나먼 강가를 함께 걸으며
그대의 향기가 손끝에서 녹아
노을로 번지는 걸 다시 느끼고 싶다
사랑도 만남도
가슴 떨리는 기다림도 필요 없다는 듯
요즘은 카톡이 오고가고
바쁘게 영상 주고받으며
가벼운 연애를 한다
스마트폰이 삼켜 버린 관계 속에는
떨리는 손 내미는 이가
그 어디에도 없다
산을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며칠 뒤면 떠난다는 가을에게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며
눈시울 붉게 손잡고 있는
억새가 서 있다
가끔은 억새처럼
당신의 손길 잡고 싶다
가장 순결히
가을로 물들어 가는
당신의 손길을
어깨뼈 / 한강
낭송 엄경숙
어머니 / 박경리
낭송 송지현
어머니의 기억 / 신석정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 처럼 부서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 먼 바다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 꽃이 들어왔다.
산수유 꽃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히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 고갤 넘던 내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낭송 안옥희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심순덕
낭송 최혜영
역사 / 신석정
1
저 하잘것없는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드래도, 다사롭게 타오르는 햇볕이라거나, 보드라운 바람이라거나 거기 모여드는 벌나비라거나 그보다도 이 하늘과 땅 사이를 어렴풋이 이끌고 가는 크나큰 그 어느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어 저리도 조촐하게 한 송이의 달래꽃은 피어나는 것이요 길이 멸하지 않을 것이다.
2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저 애잔한 달래꽃의 긴긴 역사라거나 그 막아낼 수 없는 위대한 힘이라거나 이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내가 찬양하는 것도 오래오래 우리 마음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푸른 수의를 자작나무 허울 벗듯 훌훌 벗고 싶은 달래꽃같이 위대한 역사와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드래도 햇볕과 바람과 벌나비와 그리고 또 무한한 마음과 입맞추고 살아가듯 너의 뜨거운 심장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샘처럼 왼통 괴어 있는 그 눈망울과 그리고 항상 내가 꼬옥 쥘 수 있는 그 뜨거운 핏줄이 나무가지처럼 타고 오는 뱅어같이 예쁘디예쁜 손과 네 고운 청춘이 나와 더불어 가야 할 저 환히 트인 길이 있어 늘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낭송 김창영
역천 / 이상화
이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같은 바람은 길을 끄으려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 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여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 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과도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하게 지천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낭송 박숙경 박은이
윤동주의 하늘 / 정태운
님의 하늘은 어땠을까
좁은 감방에 하늘이 어디 있을까만
마루타로 눕혀진 천정 위로
동간도 명동촌의 하늘이 보였을까
평양의 하늘이 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서울의 하늘이 보였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거늘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절규가 죄가 된다면
삼천만 동포 모두를 죽여야 했었거늘
죄인이 정의를 벌하는 세상에서
하늘의 별들은 왜 그리 초롱초롱 빛났느냐
오늘 밤 별이 바람에 스치우니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리라
순수한 삶에 대한 의지와
광복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보고 싶었으리라
해방된 하늘의 별 하나하나 세며
오늘 밤 못 헤아리면
쉬이 아침이 오겠지만
되찾은 조국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고
조국의 미래가 창창하기 때문입니다
ㄱ수동주의 하늘은
오늘의 우리 하늘입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윤동주의 하늘
우러러봅니다
낭송 이자영
임진강가에 서서 / 원재훈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면 그대여
임진강가에 선다
아주 잠깐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강물을 바라본다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얼굴
내 마음엔 어느새 강물이 흘러들어와
그 사람의 얼굴을 말갛게 씻어준다
그래, 내가 미워했던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의 얼굴에 끼어있던
삶의 고단한 먼지, 때, 얼룩이 아니었을까
그래, 그 사람의 아픔이 아니었을까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나의 상처가 아니었을까
내가 미워한 것은
내가 사랑할 수 업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임진강가에 서면
막 세수를 한 아이의 얼굴 같은 강물만
강물만 반짝이면서 내 마음의 빈틈으로 스며들어 온다
누군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면
그대여, 임진강가에 서서 새벽 강물로 세수를 하라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속에 그대가 미처 보지 못했던
치욕스러운 삶의 눈물을 보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강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라
낭송 신자윤
입관 / 마경덕
하얀 보에 덮여 누워있는 어머니
둥근 베개 하나가 무거운 잠을 받치고 있었다
장례지도사인 젊은 염습사는
보 밑으로 손을 넣어 익숙하게 몸을 닦았다
감정은 삭제되고 절차만 기억하는 손길로
미처 살아보지 못한 생의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주검을 갈무리하여 먼 길을 떠나보냈을까
저 숙련된 손길은 어느 날, 떨어져나간 단추를 주워 제자리에 달듯
벌어진 틈을 메우고 있는 것
하얀 종이로 싸늘한 몸을 감싸는 동안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아온 족적이 다 찍힐 것 같은 순백의 백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속옷이었다
자식들이 사준 속옷은 장롱에 켜켜이 쌓아두고 구멍 난 내복만 입던 어머니
며느리에게 퍼붓던 불같은 성깔도 다 시들어
몇 장의 종이에 차곡차곡 담기는 순간,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 젖었다
어머니, 편히 가세요, 그동안 미워했던 것 다 잊으세요
진심으로 시어머니를 부르며 딸인 듯 목이 메었다
습신을 신은 발, 앙상한 손을 감싼 악수幄手를
꼭 쥐어보았다. 이 작은 손이
밥상을 밀치고 내 가슴을 후볐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막내시누이는 꺽꺽 짐승처럼 울고
나는 입을 막고 흐느껴 울었다
당신이 손수 장만한 치자 빛 수의를 입고
허리띠를 나비리본처럼 단정히 묶은 어머니
어느새 떠날 채비를 다 마치었다
지긋지긋한 암 덩어리는 곱게 포장되어 입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낭송 임정민
접는다는 것 /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서문순 낭송
추억을 읽다 / 강지애
책보 허리춤에 매고 신작로 뜀박질 할 때면
필통 속 몽당연필이 나의 느림을 질책했던
그 길을 걷는다
낯익은 중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건너왔다
하굣길 무 서리해 먹고
아린 맛에 콧물 옷소매로 쓰윽 훔치는
나를 부르면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든 삼밭까지 따라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며
내 주위를 빙빙 돌던 추억까지
지금은 삶을 모조리 정지시켜 놓고 별이 된 아버지
기도하듯 창백한 얼굴로 눈빛 창가에 두면
지난 일들이 고백하듯 쏟아지는
침묵의 강만 흐릅니다
먼 나라에서 아버지는 소녀에게 오늘도 편지를 쓰는지
바람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삐걱거립니다
그 추억을 읽는 날은
그리움이 아리도록 마음에 스며
하늘을 콕콕 구멍을 내 훔쳐봅니다
이제 꿈에서라도 한번 마음껏 안아 보고 싶은
낭송 서수옥
춤만 남았다 / 유대준
낭송 유미숙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낭송 문은경 민병헌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 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매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바라리요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평생 홀로 견딘 이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낭송 오순찬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영어일본어 번역시집『해, 저 붉은 얼굴』(시와소금, 2018)
황옥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首露,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耶蘇라는 남자가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神託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二萬五千里 뱃길 내내 初夜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 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王朝의 피를 만들고 그 피 世世年年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許씨 성을 가진 黃玉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首露, 그대에게 갑니다
낭송 최송자
흘러라 동강, 이 땅의 힘이 되어서 / 신경림
낭송 조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