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색소폰
임영희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삼복더위를 이기려고 백숙을 먹던 기억이 새롭다. 닭 한 마리를 잡아 열 식구가 먹어야하니 내 차지는 언제나 모가지뿐이고 아버지께서는 내게 닭 모가지를 먹어라 주시며 “이걸 먹으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 미안해하시는 마음 조금은 알 것 같다. 뼈가 많고 먹잘 것 없는 작은 부위니 말이다. 닭 한 마리로 많은 식구가 나누어 먹으려니 어쩔 수 없었던 시절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내 노래 솜씨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고 내 노래를 들은 친지들로부터 적지 않은 칭찬을 받기도 했다.
40여 년 전 낯설고 물선 서울생활이 고단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고향역이라는 노랫말을 넣어 편지를 보내 주셨다. “너에게 편지를 쓰는데 나훈아의 고향역이 나오는구나.”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으로 시작하는 나훈아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불러보며 아버지의 편지를 음미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또한 그때부터 서울이 몹시 싫어지기 시작했고 부모님과 고향생각이 절로 나고 특히 해 질 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고향집이 그리워 당장 귀향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노래는 나의 벗이 되었다. TV도 없던 시절이어서 FM 라디오방송에서 나오는 노래를 유일한 벗으로 삼았던 시절이니 이는 모두 아버님께서 보내신 편지의 조화 때문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십대부터 색소폰을 불기 시작해서 클라리넷까지 60년을 함께 해 오신 음악의 마니아이시다. 직장이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사랑채의 방 하나를 작은 연주실로 만드셨다. 천정을 뚫을 듯 커다란 콘트라베이스와 기타, 그리고 색소폰, 클라리넷, 트럼본, 트럼펫 등 목관악기와 금관악기가 제각기 주인을 찾아 연습에 여념이 없는 부친의 친구 분들로 짜여진 방은 그야말로 작은 연주실을 방불케 했다.
나의 아버님은 본업은 국가공무원이시다. 하지만 워낙 음악연주에 몰두해서 어머님을 매우 힘들게 하셨다. 그 시절 악기 값이 얼마나 비싼지 웬만한 집 한 채 값과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귀향했을 땐 큰 책장 두 개에 음악책과 악보가 가득하였고 LP음반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였으며, 우스운 사연은 KBS에서 방송국에도 없는 악보와 레코드판을 나의 아버님에게 빌려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미수(米壽)지나 구순에 이르러 작고하셨지만 운명하시기 수 년 전까지 악기와 동무하셨다. 아내와 자녀들이 고생은 되었지만 아버지의 연주에 맞춰 노래할 때는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즐겁고 평온한 가족으로 하나 되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웃음 띤 모습으로 흐뭇해하셨고 가족들은 부친의 영향을 받은 건지 유독 음악을 가까이했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먼저 곡을 듣고 나중에 가사를 적어 배우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존재의 이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편지, 창밖의 여자, 9월의 노래 등은 나의 삶이 힘들 때면 나를 치유해 주는 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음악이라는 보약은 만병통치약이고 음악이라는 바이러스에 걸리면 나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는 모양이다.
청아한 피아노 소리를 좋아해 혼자 배워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을 즐겼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한곡을 제대로 치려면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이 찢어질 만큼 연습을 해야 하며, 이런 어려움은 나를 혹독한 연습 벌레로 만들었다. 4년간 매일 8시간씩 연습하면서 생활 속의 음악을 즐겼는데 요즘은 하루에 1시간 연습하기도 쉽지 않다. 아마 지금이라면 음악의 달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가족을 돌보기보다는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음악에 심취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싫었고, 아버님의 끈기와 인내를 배워가며 나팔소리를 날마다 몇 시간씩 듣는다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악기를 공부해 보니 아버지의 속마음을 읽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하루를 쉬면 악기가 알고, 이틀을 쉬면 본인이 알며 사흘을 쉬면 청중이 안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래서 악기 연주는 하루만 쉬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갈고 닦았는가는 음악의 깊이에서 나타난다.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악가들은 평생을 쉬지 않고 연마하여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을 감동시킨다.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지나가는 날이면 지난 옛 추억이 생각나며 아버지의 색소폰 소리가 그립다. 남은 여정 아버지의 추억을 더듬어 글감으로 사용하여 즐겁게 글을 쓰면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삶으로 나를 치유하는 보약으로 삼고 싶다.
첫댓글 나의 오빠는 트럼펫 연주자셨다.
고등학교때 학교관현악단에 트럼펫을
연주한탓에 경희대 음대에 진학했고
밀성중학 음악교사로 예술발전에
이바지한 공이컷다.
오빠의 딸이 바이올린연주자로 경북도향
에서 활동했고 72살인 나의 언니는 서울서
가요강사로 활동중이다.
이 글을 읽어면서 오빠생각이 많이 났다.
저 하늘에서도 트럼펫을 불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