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들과, 조금 늦은 퇴근을 하는 꿈과 함께 회의 또한 가득한 젊은 회사원들의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얼굴이 헬쓱한 아주머니가 바닥에 풀어놓은 한 두어번 가지고 놀면 망가져버릴것만 같은 허술한 장난감들이 네댓살 먹은 어린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달도 잘 뜨지 않는 밤 여덟시 지하철 역의 그 뻥 뚫린 허공을 향해 뿜어나가는 하얀 불빛이 시혁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출입구 계단 중간쯤에 걸터앉은 채 그는 밝은 빛을 찾아 역으로 걸어들어오는, 그리고 또 어둠에 맞서 걸어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꽤나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모두들 웃음없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듯한, 하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은 수많은 의무에 시달려야만 하는 따분한 일상에 지쳐 힘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혁을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들중 대부분은 아마도 시혁이 그곳에 앉아 그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던것 같다. 어쩌다 시혁의 골똘한 주시를 깨달은 몇몇 이들은 이상한 눈으로, 조금은 불쾌한 감정을 담고서 그를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바로 지나쳐 갔다.
집에 들어가지 않은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세어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혁에게 있어서 시간의 흐름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예정되지 않았던 이별과, 괴로움과 외로움, 그의 아버지의 파국과 그의 그것이 온통 얽히고 섥혀갈때 시혁은 이미 시간이 가는 것에 무뎌져 있었다. 그의 하루하루는 그저 진전도 소득도 없는 전쟁이었고 세월의 흐름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꿈도 희망도 될수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급한걸까, 넘어질듯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이들을 보며 시혁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들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이유를 알고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지만 남들이 옆에서 달리는 것을 보고 그저
따라 함께 달리는 것일까? 저렇게 한참을 뛰어가다 보면 자신이 그렇게 가고 있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달을수 있을까? 다시, 시혁은 그 어느곳에도 해당되지 않음을 알았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다 하니까 그저 따라서 ‘척하는’ 사람들을 시혁은 경멸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중심을 이미 잃은 시혁은 단지 자신보다 열등한 부류 혹은 마음껏 욕을 하고 흉을 볼수 있는 상대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자신의 사고방식에 구토를 느끼고 미치도록 증오했다.
“저기, 뭐하세요?”
“…누구…? 어, 안녕하세요?”
놀랍게도 시혁의 등뒤에는 휘가 서 있었다. 휘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시혁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고는,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인연이란 것을 믿지 않는 시혁이었다. 아니,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할 작은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휘를 춥고 외로웠던 어느 날 밤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때, 시혁은 그녀와 같은 사람을 그의 일상속에서 매일 만날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혼자 남겨진 아픔을 이해할수 있을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휘의 습관적인 뒤를 돌아보는 행위를 시혁은 눈여겨보았고, 그의 직관은 휘 역시 홀로 외로워 하는, 친구들과 몰려다니기보다는 늘 무리에서 동떨어져 겉도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일을 시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하고 집을 뛰쳐나왔을 때, 시혁은 쓸쓸히 그 포장마차 주위를 맴돌아 걸으며 혹시나 휘가 오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다렸다. 하지만 휘는 오지 않았고, 시혁은 잠시나마 품었던 그 인연에의 희망을 바로 버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휘가 다시 온 것이다! 시혁은 너무나도 가슴이 부풀었다. 휘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그녀가 그렇게 바람같이,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나타나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때로는 타인의 등장이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 시혁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을 빼앗기에 –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그의 곁에 다가오는 이들을 피하고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누군가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
그런데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혁은 어색한 웃음만을 히히 흘리며 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그렇게 어설프게밖에 행동할수 없는 자신을 속으로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이런 바보,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할수밖에 없는거지, 하고.
하지만 휘는 그런 시혁의 모습을 비웃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은 어설플수밖에 없는 동물이니까, 휘는 그녀 자신 역시 불완전하고 미숙한 사람일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시혁의 꾸밈없는 서먹서먹한 행동에 되려 따뜻함을 느꼈다. 휘는 시혁의 옆에 말없이 앉았고,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휘가 나타나기 전, 시혁이 홀로 앉아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사실 휘는 시혁을 쳐다보지 않는 척 하면서 옆눈으로 흘끗흘끗 돌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시혁은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옆에 턱을 괴고 앉아 삶을 갈구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지난 몇년간 잊고 살았던,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았던, 사람 냄새를 너무 오랜만에 맡고 부풀은 심장의 고동이었다.
입 안열고 말 안하기 대회라도 하듯 침묵을 지키며 몇분간을 마냥 허공을 응시하며 앉아있었던 시혁과 휘의 턱에 차디찬 겨울바람이 다가왔다. 결국, 휘가 얇고 허름한 시혁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먼저 말을 걸었다.
“……”
“춥지 않아요? 옷좀 잘 입고 다니지…”
“아, 아니 괜찮아요…”
“……”
“……”
더듬지 않고 두 마디 이상 지속되기 힘든 그들의 대화를 또다른 무거운 침묵이 다가와 단절시키려고 할때였다. 휘는 입가에 조금 허무해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시혁에게 말을 건네었다.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저, 저요? 그냥 앉아서…”
“외로운가봐요?”
“...네…?”
“정말 그래요?”
“……”
정곡을 찌르는 휘의 질문에 시혁은 다시 굳어버린듯 멈춰서고야 말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입가에 잠시 일은 약한 경련에 불과했다. 휘는 아무렇지도 않은것처럼 보였다. 툭 내뱉듯 시혁에게 질문하고는, 뜻밖의 직선적인 질문에 당황해하는 시혁에게 정말 그렇냐고 다지고 다져 또 묻는것은 뭐람. 냉소 혹은 조소가 담긴 말투는 전혀 아니었으나, 시혁은 그녀의 횡한 웃음에 머뭇거릴수밖에 없었다.
“……”
“난…외로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