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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바람을 안고 절을 찾았던 사람들은 어떤 위안을 받았을까? 사연 많은 인간사의 저마다의 아픈 사연이 모이는 사원에는 그렇게 쌓인 세월의 사연들이 돌계단, 법당 기둥에 스며있다. 밝고 행복했던 이들은 그저 지나쳐 가고, 상처입고 슬픈 비운의 생채기를 품은 이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머물렀으리라.
애월에서 만난 법당들은 그래서 처연하게 아름답다. 위로를 위한 공간이기에 더욱 정갈하고 치유를 위한 자비로움으로 다가가기 위해 소홀하지 않은 꾸밈이 지나치지만은 않다.
당신이 문득 위안이 필요하거나, 에너지가 솟지 않아 활력이 떨어졌을 때 간절하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절들이 있다. 봄빛살이 못견디겠다면, 애월의 예쁜 절들을 한 번 찾아가 보자.
극락사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극락사는 대웅전, 원토전, 삼성각 등의 전각이 자못 웅장하다. 극락사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를 지켜본 보리수나무를 만날 수 있다. 해탈문 정문입구에 유리온실이 솟아있는데, 그 안에 보리수가 반긴다. 인도여행을 해본 불자라면 그 보리수잎이 반가울 것이다.
극락사 종루의 미륵반가사유상
극락사가 원래 위치했던 곳은 유수암 극라봉 기슭, 고려시대 폐사지 절터에 변덕립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4·3사건으로 소실되어 다시 전란이 마무리되고 나라가 안정되어 가는 195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극락사는 원통전 석조 관세음보살상과 5층석탑이 수작이다. 경내에는 수변 정원과 나무정원의 단정한 미학과 항파두리 토성으로 오르는 산책로에도 지천이 꽃밭이다.
절제미가 담긴 석가모니불을 모셔진 대웅전과 원통전에 모셔진 화려한 관세음보살의 균형미는 불교미술의 수작이다.
중창주인 월명 스님이 부산 범어사에서 수학 후 돌아와 1944년 대웅전 35평을 중건했으나 1948년 10월 4․3으로 소개되었다. 그 후 1953년 극락오름 자락에 유수암 소재 절산 수원지 정상으로 옮겨 법당 25평과 요사채 15평을 임시로 재건했고, 4․3이 안정된 후 1957년 현재 위치한 애월읍 상귀리 786번지에 법당과 요사채를 짓고 사찰을 이전했다. 1993년에는 현 대웅전 98평을 완공하고 2001년에 다시 구 대웅전을 헐고, 그 자리에 적광전 45평을 신축했다.
극락사의 어린왕자
항바드리 토성
극락사에서 바로 오를 수 있는 항바드리 토성은 고려 삼별초 방어유적이다. 삼별초는 특수정예군으로 몽골군과의 싸움에 있어서 전위대 역할을 하였다. 몽골에 저항하던 그들은 원종12년(1271) 5월 15일에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자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진도를 탈출한 사병을 거느리고 탐라로 들어왔다. 그때 김통정이 한라산 북쪽 귀일촌(貴日村)에 외성은 토성을 쌓고 내성은 돌로 성을 쌓은 것이 오늘의 항바드리성이다.
항파두리 토성길
토성안에는 곳곳에 양귀비와 보리, 해바라기를 심어 사시사철 관광객들에게 인생샷을 찍도록 하고 있다. 고려 삼별초가 2년반 동안 탐라사회에 미친 문화중에는 고려중앙의 불교문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월지역은 고려대장경 목판 제작지로도 알려져 있어 불교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무주선원(無住禪苑)
창건한지 10여년 된 무주선원의 주지 본연 스님은 청화스님의 상좌이다. 가람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다. 무주선원 개원당시 더불어 수행하는 여법한 수행도량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요사채와 공양간 선방도 지어야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고 지나친 불사는 삼갔다. 스님께서 출가 전에 돈으로 너무나 많은 신경을 썼던 전례가 있어서다. 스님이 되었으니 출가사문의 본업인 수행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조 때문이다.
무주선원의 잘 정돈 된 정원
스님은 미타행자로 자처하며 기도의 원력으로 수행의 업을 잇는다. 수행자의 가장 큰 덕목은 재물로써 일체중생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서 헌신하는 것이며 기도 자체가 마음으로서의 헌신이라고 강조한다.
무주선원은 ‘청화큰스님의 당호(堂號)가 무주당(無住堂)이기에 무주(無住)라 했고 선원(禪苑)에 원자를 동산 원(苑)자를 사용한 것은 기록에 보면 옛 고려 시대 때는 선원(禪苑)이라 하였다’는데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백제사
무주선원에서 항파두리성을 올라가는 삼거리로 내려와 백제사로 향한다.
법당의 한글 현판
백제사에 가면 ‘깨침터’라고 쓴 현판이 크게 걸린 법당이 감동적이다. 다른 전각도 모두 한글 현판이다. 백제사는 원오 스님이 타 지역에서 수행을 하다 제주에 내려와 이곳에서 토굴수행을 하던 중 시절인연이 닿아 창건한 사찰이다. 백제사가 아래 고성 극락사에서 수행하던 큰스님이 어느 날 이 땅을 보시더니 “이곳에서 토굴을 짓고 6년 동안 도량석만 잘 돌면 큰 불사가 이룩될 곳이니 수행에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이곳에 터를 잡고 큰스님 말처럼 열심히 정진하다보니 지금의 절터에 극락전이 세워졌다.
백제사 깨침터(법당) 아미타부처님
백제사는 창건 이래 깨달음을 구하는 수도승과 기도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또 제주도교육청의 학교폭력 가해·피해 학생 및 학부모 교육·치료 지원을 위한 ‘대안교실 위탁교육기관’에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이 지정되면서 백제사가 운영을 맡게 돼 청소년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템플스테이와 삼독의 치유를 위한 심리상담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백제사의 본당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제주의 전통 기와집 양식으로 소박하지만 실내는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극락전 안에는 주불로 모신 아미타불과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법장사
골머리오름 석굴암에서 법장 스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애월읍 광령리 법장사는 법장 스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절이름으로 스님의 법명을 사용 했다. 법장스님은 불사 원력을 세웠지만 갑작스런 입적으로 중단되다가 지난 2000년 현 대웅전을 낙성했다.
제주 보리수선원
위빠사나 수행처 보리수선원은 애월읍 광령리에 지난 2022년 11월 문을 열었다. 선원은 현대식 건물로 법당(수행홀)은 아직 갖추지 못했지만, 남자 수행자의 수행 공간과 숙소,여자 수행자의 수행 공간과 숙소가 1층과 2층으로 분리되어 있다.
보리수선원
현재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요 수행반은 3월27일부터 10월23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1:30~4:30에 진행된다. 토요 사마타와 위빠사나 기본수행반은 4월20일부터 11월 23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1:30~4:30에 진행하고 있다.
법문은 붓다락키따 스님이 맡고 있으며, 학생과 장애인, 기초수급자, 70세 이상자는 무료이다.
보리수선원은 종교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위빠사나 수행처이다. 선원장인 붓다락키따 스님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얀마 참매 수행센터에서 우 자나카 참매 사야도에게 비구계를 받은 후, 미얀마, 라오스, 태국에서 두팅 수행(두타행)에 전념하였다. 1999년도에 귀국하여 보리수선원을 창립했다. 자비심 가득한 스님과 대화를 하다보면 저절로 청정한 본성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오월의 순례길은 출렁이는 보리밭길을 따라 초록과 각종 형형색색 꽃들이 생명의 환희를 뽐내는 시절인연이다. 그래서 절들은 아름답고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연등도 절 마당마다 꽃을 피웠다. 모든 것이 여여하다. 오월처럼만 시절인연이 계속된다면 좋겠다. 비록 찰라생멸하는 속절없는 생명과 무쌍한 변신의 계절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아가는 것도 이 계절에는 나무랄 것 없으리라. / 김은리(후마니타스편집위원)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