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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日記抄, 1980년 겨울
황 석 영
창문 위쪽에 희뿌염하게 떠 있던 큰 산의 모습이 회색빛 하늘 속에서 차츰 녹아 사라지는 중이었다. 창문이 덜컹 대기 시작했다. 들판이 어두워지더니 그 어둠이 재빠르게 다가오면서 유리창이 젖어갔다. 폭풍우였다.
나는 쓰던 편지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아니나다를까, 부엌으로 나가보니 깨어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들이쳐서 부엌 바닥이 젖어가는 중이었다. 뻣뻣하게 얼어 있던 속옷 빨래들이 좁은 베란다 위에 늘어져서 흔들거렸다. 바람은 뼛속에 스미는 듯 차가웠고, 빙수 같은 얼음 부스러기가 베란다 가녘에 쌓인 걸 보니 진눈깨비가 분명했다. 나는 라면상자의 뚜껑을 찢어내어 부엌의 깨어진 유리창 구멍을 틀어막았다. 먼곳에서도 시멘트 빛깔로 펼쳐진 바다의 곳곳에서 솟구쳤다가 흩어지는 높은 물결 이랑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일까. 지금 여기 한반도의 남쪽에서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나는 다시 편지를 이어나가려고 앞에 썼던 것들을 읽어보았다.
언젠가 저를 취조했던 어느 젊은 수사관의 회한 섞인 농담처럼 삶은 허섭스레기같이 욕스러운 것입니까. 사는 게 다 욕이지……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자의 꾸민 것 같은 활발한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그래요, 우리는 이렇게 욕된 것으로만 남고 그해 광주의 아우들은 아무런 길도 없는 가시덤불과 돌멩이들뿐인 험로를 향하여 드디어는 깎아지른 절벽을 바라고 일직 선으로 달려가버렸습니다. 저는 길바닥에 내던져진 죽은 쥐의 찢긴 내장처럼 벌려진 상처 위에 벌겋게 핏물든 시트를 감고, 저 아득한 어둠 속을 건너온 바람소리같이 한 마디씩 토해내던 젊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듣고 있습니다. 민, 족, 통, 일, 만세…… 그러나 그건 그저 낱말일 뿐, 그야말로 익치 않은 음절일 뿐, 아직도 불기를 머금고 아궁이 어귀에 흐트러진 생솔나무 가지처럼 여리게 구부러져 시멘트 바닥 이곳저곳에서 꿈틀거리던 젊은이들의 가녀린 사지들만이 그런 말보다 더욱 또렷했지요. 꿈틀거림이 차츰 풀리고 작아지면서 멎어가고 그들은 우리 시대와 작별했습니다.
나는 앞에 썼던 글귀를 북북 그었다. 그러고는 편지를 구겨버렸다. 수식과 형용사와 조사와 문장들.
내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벌써 일곱 달이 넘어가는데 나는 전혀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편지의 답장마저 쓸 수가 없었다. 책꽂이 위쪽에는 빨간 바탕에 나무로 액자를 두른 녹두장군의 혹 달린 초상이 상투적으로 얹혀 있었고, 문에는 일정표, 그리고 그 귀퉁이에는 빨간 볼펜 글씨로 써붙인 ‘피를 잊지 말라’, 압핀으로 눌러둔 마지막 날의 도청 광장 앞 사진, 찢어진 사진 옆으로는 외국어의 낱말들이 중간중간 잘린 채로 꼬물댔다.
내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도시에 크달 말쯤에 그림자처럼 몰래 스며들었을 때, 주변에 얼굴 아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들은 나를 방안에 꽁꽁 잠가두고 숨도 쉬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는 척추암인 줄 몰랐지만 허리가 아프다며 노상 누워서 지냈다.
널 찾으러 왔대서, 난두 문을 가로막구 누워서 뻗대는데두 막 신 신구 들어와 이방 저방 둘러보두나. 얘 이러다 전쟁나는 거이 아니가. 하긴 나 같은 늙은이레 또 아네? 통일 되믄 고향 갈디. 거저 너이들, 저 어린것들 까탄에 걱덩이디.
아내는 내가 첫번 명단에는 들어 있었는데 다음에 웬일인지 빠졌다고 말했다. 정다운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도시는 원래가 타향이었지만 더욱 낯설어지고 말았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나절에 부모를 따라 내리게 된 낯선 도시나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다. 그 분위기는 이를테면 우리를 감싸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담에 죽어서 영혼이 이승의 위를 떠서 흘러 지나칠 때와 같은, 이쪽과는 절연을 냉정히 드러내는 그런 분위기였다. 개 짖는 소리, 아이의 울음,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 놀러 나간 아이를 찾는 식구들의 긴 목소리, 음식 냄새, 그리고 흐릿한 창문의 불빛들, 가운데 서게 되면 이 세상에는 영영 내 집이 없다는, 여기는 딴 나라라는, 여긴 내 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점령된 도시에서 나는 탈향(脫鄕)을 절감했다. 어느 날 검은 지프차가 집 앞에 섰다. 방문객은 스포츠 머리로 짧게 깎고 눈이 가늘고 날카로우며 피부가 꺼칠한 키 작은 중년의 사내였다. 현관에 들어선 그는 내 어릴 적 이름을 대며 물었고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욕지거리를 했다.
이 새끼, 넌 군기가 싹 빠졌어, 빨갱이 새끼, 사상적으로 아주 틀려 먹었어!
내무반에 점호를 받으러 온 주번사령처럼 그는 어수선한 내 방을 둘러보았다. 허엽스레 밤색 빛깔로 바랜 단벌 교복을 입고 강원도 시골에서 올라온 그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늘 졸았다.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를 다닌 그가 사관학교엘 갔다던가, 여하튼 이제 우리는 중년이었다. 그가 여름방학이 끝난 뒤에 내게 주었던 단도 비슷하게 생긴 그물 깁는 대나무 바늘이 생각났다. 그가 얘기하던 밤바다, 등불에 반사되는 은빛 오징어떼, 그리고 만선의 새벽. 우리는 어색했고 아내도 굳어진 채로 입만 웃었다. 그가 내게 떠나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 도시에 앞으로 육개월쯤 머문다. 이사를 가든지 어쨌든 나하구 부딪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서화(書畵) 얘기만 꺼냈다. 무슨 산(山)이 어떻고 무슨 당(堂)이 저떻고 무슨 암(岩)이 그렇다는 둥, 나는 젊은이의 죽음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 말했던가.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을 줄 알았다.
중년의 군인 친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내가 펀지를 써주지. 너를 안전지대로 쫓아낼 거다.
나는 이번에는 조금만 내밀어보았다.
세상에는 무서운 게 있다. 역사라는 게 있다.
그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새끼야, 역사두 힘이 만드는 거다.
그는 다시 나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 뒤로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계급이 올랐을까. 그런 임무였다니 그는 운이 나빴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신이 사상적으로 아주 글러먹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초여름에 육지와 멀리 떨어진 이 섬으로 떨어져나왔고 새로운 방문자가 나를 찾아왔다.
환경이 좋지요?
방문자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은 내게는 바깥세상과의 단절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새로운 방문자는 내가 가져왔던 편지를 받아 안심하고 돌아갔다. 내가 짐을 푼 곳은 월세를 내는 열 평 남짓한 낡은 공무원 아파트였다. 아, 빼먹은 게 있다. 방문자는 문 앞에서,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라고 말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나는 보름 동안이나 꼼짝 않고 거기 틀어박혀 지냈다. 남으로는 섬외 큰 산과 북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똑같은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며 지냈다. 태양과 돌멩이가 어떻고 바다와 모래의 만남이 저떻고 하는 때가
아니라, 한마디로 그 팔십년 여름의 섬은 비계엄지구(非戒嚴地區)였다. 바다가 그렇듯 모든 움직여 사는 것에는 반동이 있는가. 그렇지만 밀물에서도 보면 흐름은 역류와 부딪치면서 더 높은 곡선을 만들어냈다가는 합쳐지거나 삼키면서 와장창 부서져 거세게 밀어나간다. 나는 일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 뒤 두 해 이상을 한 줄도 쓰지 못하게 되지만. 이를테면 그때는 내 삶의 반동기였던 셈이라 할까.
문득 협죽도가 만발하고 종려의 화려한 잎새가 빗속에 출렁이더니 어느새 동백이 눈 속에 피어나고, 하늘 높이 떠 있는 희고 큰 산은 참으로 대륙에서나 이 시대와 절연된 아득한 어느 저승의 산과도 같았다. 옛날 설산 모퉁이에 숨어 있다는 별유천지의 골짜기처럼 그 안에 들어가면 세계와 단절되어 수백년을 평화롭게 산다는, 그러나 세상 걱정, 집 걱정이 되어 한번 빠져나오면 낙원의 입구를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전설 속의 산과도 같았다.
숨어 살까. 다 때려치우고 숨어버릴까.
나는 그때부터 표어를 적어서 방문에 꽂기도 하고 일정표를 짜기도 했다. 가으내 맑은 날마다 저쯤에 멀리 그리움처럼 떠 있던 큰 산에서 피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잔뜩 흐려서 곧 비가 올 것 같은 어느 아침에 김(金)이 나를 찾아왔다. 김은 내가 섬에 오기 전부터 잘 알던 청년이었다. 그는 육지에 나와서 공장도 다니고 이리저리 긴급조치에 몰려 도망도 다니더니 어느새 돌아와 술도 먹고 싸움질도 하고 지방 유지들 골탕도 먹이며 시큰둥하게 살다가 골수의 향토주의자가 되어버린 청년이었다. 독립해버릴까부다, 하며 그는 농담을 했다. 선언서를 품속에 간직한 밀사가 되어 그는 유엔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광경을 신나게 얘기했었다.
여기는 갇혀서 사는 데지요.
하며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고향을 헐뜯었다. 하여튼 잔뜩 흐려서는 개가 살살 뿌려대던 날 아침에 김은 등산복 차림에 도시락까지 챙겨가지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무턱대고 그날의 산행에 내가 동행하여주기를 요청했다. 김 이 큰 산에 자주 오르내렸고 거의 전문가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스산한 날에 가랑비 속에서 청승을 떨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는 물론 거절했다. 김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서 다시 권유했다.
이 섬에서 이런 구경은…… 아마도 우리 생전에 다시 보기 어려울 겁니다.
내가 무슨 구경거리냐고 대수롭지 않게 묻자, 김이 나의 미간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전설의 발굴현장에 가는 겁니다.
그의 말투와 표정이 평소와는 다른 과장된 꼴이라 나는 갑자기 흥미가 생겨나서 그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섬의 서쪽 방향으로 돌아나가 거기서부터 다시 큰 산의 서남쪽 계곡으로 타고 올랐다. 키 작은 관목숲과 덩굴이 뒤덮인 바위의 비탈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순경과 흰 가운의 의사며 면직원인 것 같은 녹색 새마을모자를 쓴 사내도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산아래 마을에서 아낙네들과 노인들 몇 사람이 올라왔다. 김은 사람들의 무리를 떠나 뒷전에 혼자 앉았던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차양 큰
낚시모자를 쓰고 잠바를 걸친 초로의 사내는 혼자 바위에 걸터앉아서 이홉들이 소주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김이 그에게 인사하고 나서 나를 소개했다.
교수님, 어째…… 기자들은 안 보입니다?
김이 사람들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고 식물학자는 픽, 하는 입바람을 불었다.
햇빛에 드러나선 안 될 일인데 오면 뭘 하나?
처음에 동굴을 발견했던 것은 식물학자였으며 김이 그 안으로 들어갔었다. 맹감나무의 잎새 뒤편에 컴컴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안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고 있었다. 김은 손전등을 켜들고 잔뜩 허리를 낮추어 구멍 깊숙이 기어들어갔다. 차츰 굴 안이 넓어지더니 작은 방과 빈터가 연이어 나타났다. 김이 맨 처음 본 것은 오지 항아리와 무쇠솥과 돌로 대충 쌓은 아궁이와 검은 그을음이었다. 암벽 아래 이곳저곳에 분필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잔해가 보였다. 근처에는 신발 뒤축과 단추 따위가 눈짐작으로 알아볼 만한 거리에 흐트러져 있었다. 우리는 거기 앉아서 교수의 소주를 몇 잔 얻어 마셨으며, 의사와 순경이 굴 안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서성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입구 쪽으로 나아가 안을 기웃거렸다. 손전등의 훤한 불빛에 따라 그들의 움직임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들은 줄자로 잔해의 길이를 재기도 하고 저희끼리 이건 여잔데, 또는 이쪽은 어린애요, 라고 짤막하게 주고 받았다. 바로 내 뒷전에서 자꾸 떠밀고 넘겨다보려고 애쓰는 이가 있어서 돌아보니 늙은 아낙네였는데 벌써부터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비틀려 있었다. 하이고, 하이고오 하는 푸념 섞인 한숨에 나도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만 굴의 입구에서 물러나버렸다. 그들은 굶어죽었을까, 얼어죽었을까, 무엇이 저 굴 안의 사람들을 그렇듯 철저하게 유폐시켜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삼십여년 전에 이 섬을 휩쓸었던 살육의 진상을 나는 말똥종이의 퇴색한 자료에서나 접 했을 뿐이었다. 동굴 안의 주검들은 나중에 굴 밖에 나온 의사의 발표대로 모두 자연사였다. 아니 사실은 자살이었달까. 공포 때문에 스스로를 한 시대로부터 유폐시켰던 양민들의 몇 줌 안 되는 목숨의 흔적들은, 차라리 네이팜이 휩쓸고 지나간 밀림의 촌락들보다도 잔혹했다. 내가 쫓겨난 도시에서의 엊그제 같던 일들도 저렇게 냉혹하고 정밀하게 묻혀져갈 것이 아닌가. 동굴 안에서 사람을 뺀 모든 것은 정지된 채 그대로였다. 공기마저 그대로 정지된 저 숨막힐 듯한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이다, 라고 되새기자마자 나는 뜨거운 물을 삼킨 것처럼 흠칫, 했다. 눈은 내리고, 눈보라와 폭풍이 아우성치는 가운데, 까무룩하게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할 즈음에, 그들은 마지막으로 무엇을 생각했을까. 의사는 흰 종이쪽지를 들고 단조롭게 읽어나갔다. 키 백육십팔센티 정도, 이십오세에서 삼십세 가량의 남자, 작업복 농구화 착용. 어느 아낙네가 손뼉을 치며 부르짖었다. 아이구우, 그거 바루 내 동생이외다. 햇볕에 그을고 주름살이 깊게 팬 노파의 눈가에서는 살아 있는 자의 표징인 눈물이 질금질금 솟아나오고 있었다. 의사가 계속해서 읽어나갔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기억을 더듬어 낙원 저쪽으로 사라져갔던 마을 사람들을 맞혀내고는 했다.
그래, 내가 그날 있었던 일과 오후 내내 느꼈던 내 감정의 미세한 부분들까지도 모두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의 우편물 때문이었다. 한 가지는 아침에 온 편지였고 또 하나는 내가 답장을 모두 쓰고 나서 식은밥을 데워 먹을 때에 도착한 전보였다. 온 세상이 적막강산으로 내다보이던 눈보라까지도 그해에 내린 가장 큰 눈이었다. 눈은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껏 강산처럼 내렸다. 편지는 잘라낸 노트장 위에 깨알처럼 잔글씨로 씌어 있었다.
먼저 제 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저는 세상 사정도 잘 모르고 이제 결혼한 지 십년이 채 못 되는, 아기를 둘 가진 가정주부입니다. 저희 남편은 교회에 재직하고 있는 전도사이고 일요일에 교회 가는 일과 일주일에 한두 번 신도 댁에 심방을 가는 일 말고는 저도 평범한 가정살림을 하며 별 걱정 없이 살아온 셈이지요. 제가 선생님께 갑자기 이런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의 일로 제 마음이 몹시 아프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이 일로 하여 제가 아무 짝에도 쓰잘데없는 하찮은 사람이란 걸 깨닫고 괴로워하고 있어요. 저는 선생님의 글도 읽었고, 또 선생님의 경험의 폭에 대해서도 나름대로만 짐작하고 있답니다. 제 일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유방암이란 선고를 받고 나서였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두 아이들의 장래문제로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그 다음에 주변머리없이 착하기만 한 제 남편과, 친정 어머니, 그리고 나중에야 병원에서 만나게 되었던 수많은 죽어가는 이들과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들의 마음속에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강한 생의 미련과, 주위를 용서하고 착하게 남은 인생을 마무리짓겠다는 두 가지의 마음이 날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찍 발견된 셈이어서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저는 다행히도 수술을 받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지요. 가슴 한쪽을 도려내고 마치 심장이 없어진 것처럼 허전하여 내가 여자로서 모두 끝이 난 것만 같았어요. 양지바른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기도 하고 아이들을 재워둔 옆에서 일부러 뜨개질도 열심히 하다가, 저는 이런 시간이 너무 아깝고 귀하다는 걸 다시 생각했고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의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하느님! 제가 되살아나 건강해진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북돋우며 살아가겠나이다, 이렇게 기도했거든요. 저는 여러가지로 궁리하다가 제 남편의 선배가 되시는 어느 신부님 께 제가 하고픈 역할이 없는가 여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래서 제게 진이를 소개하게 되었던 거예요. 신부님은 장기수가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하고 나서 진이는 좌익수라고 조심스럽게 알려주었습니다.
빨갱이. 물론 그들이 머리에 뿔 달리고 얼굴이 빨간 도깨비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어쨌든 얼음처럼 냉혹하고 사람의 목숨 따위는 정치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벌레처럼 여기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저는 믿고 배웠기 때문에 신부님의 뜻을 처음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기독교인이고 제 남편은 공산주의와는 정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빨갱이로 죄를 지은 사람을 돕는 길이 어째서 가장 외롭고 따돌림받는 사람을 돕는 길이어야 하는지 저는 신부님의 생각을 몰랐지요. 저는 사실 그것이 당국의 정책적 배려에 의한 일인지 몰랐고 또 앞으로도 그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지만 하여튼 내게 인연이 닿은 빨갱이 청년에게 먼저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 내가 살아온 평범한 생활과 질병 속에서의 고통, 그 변화, 바깥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들, 가령 봄에 뿌렸던 분꽃의 개화, 해피가 강아지를 다섯 마리나 낳은 일, 그런 생활 잡사들을 담담하게 써서 보냈습니다. 서너 달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지만 저는 참을성 있게 그치지 않고 편지를 쓰고 부치고 했어요. 처음에는 벽에다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기분이었지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빨갱이란 어떤 자들인지 부딪쳐보아야겠다는 오기도 생겨났거든요. 답장이 왔어요! 그는 감옥의 창살 사이로 기어든 햇볕을 손가락으로 가지고 노는 얘기며 식사라든가 반찬 얘기도 썼고 무엇보다도 마당에 흔히 심는 일년초에 관해서 자세히 썼습니다. 채송화 나팔꽃 백일홍 봉선화 맨드라미 수세미 표주박 등등에 대하여 언제 씨를 뿌리고 주의할 점은 뭐라는 둥 모르는 게 없었어요. 진이는 감옥에서도 꽃밭을 내주고 꽃을 가꾸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해마다 한 알씩만 따서 모은다면 나팔꽃씨 열 개를 모아가지고 나가서 누님 댁의 화단에 뿌려드릴 수가 있을 텐데요,라고 썼지요. 몇 달 더 지나서 나는 진이가 빨갱이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답니다. 진이는 고아원 출신이래요. 여섯 살 때에 그 사람 엄마가 고아원에 맡기고 갔답니다. 진이는 고아원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목공일을 배웠대요. 나는 지금도 진이가 출역 나간 틈틈이 만들어준 목각의 호랑이 상을 가지고 있어요. 능숙한 목공이 되어서 한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 진이가 여자를 알게 되었답니다. 진이는 혈혈단신으로 이제껏 세상 누구와도 주고받지 못한 정을 그 여자에게 쏟았다나봅니다. 둘이는 결혼하자 약속하고 여자의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지요. 하지만 여자 부모는 진이가 고아라는 사실과 중학교밖에 못 나왔다는 걸 알고는 여자에게 진이와 관계를 끊도록 강요하고 진이에게도 단념하라고 그랬다는군요. 이 젊은이는 절망한 젊은이들이 쉽게 저지르는 방식대로 여자가 다른 곳에 시집가던 날 밤에 음독을 했습니다. 살아났지요. 살아난 진이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을 했대요. 고아원에서의 뼈저리게 쓸쓸하던 저녁 식탁과 잠자리와 귀가하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활기며 더 이상 진학할 수 없었던 중학교 졸업식날의 운동장과 톱밥가루 날리는 목공소에서의 노동의 나날들, 그런 여러가지 지난날들을 생각했겠지요. 스물두 살의 고독한 젊은이는 그 여자애를 만나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던 옛말을 이루는 줄 믿었겠지요. 그런데 이제껏 아슬아슬 견디어오던 삶이 장기알을 쌓아올리다가 끝에 가서 좌르르 무너지듯이 폭삭 흐트러져버린 거예요. 진이는 얼른 생각했대요. 이곳은 나같은 사람이 살 세상이 아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했겠어요? 진이는 일선으로 가는 버스를 탔대요. 날고구마를 캐어 먹으면서 임진강을 건너려고 갈숲 속에서 사흘 밤낮을 숨어 지냈어요. 진이는 그렇게 해서 휴전선에서 월북 기도자로 체포당했어요. 수사관이 어디로 가려고 했느냐니까 진이는 이북에 가서 새로 살아보려 했다고 순순히 대답했대요. 처음엔 정신감정도 해보고 그랬지만 진이는 너무도 정상인이라 용서를 받을 수가 없었다는군요. 그와 한동안 편지가 오고 간 뒤에 저는 교도소 당국과 협의하여 직접 면회를 하게 되었어요. 철망을 사이에 두고 그냥 겉도는 얘기만 하는 그런 면회가 아니라, 교도소장의 특별지시로 저는 진이를 사무실에서 편안하게 만나볼 수가 있었지요. 어두운 세월을 살아온 청년답지 않게 진이는 아주 맑고 때가 묻지 않은 표정이었어요. 저는 한 달에 한번쯤 지방에 내려가서 그 애를 만나보곤 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난 가을 무렵부터 진이는 저와의 면회를 거절하는 것이었지요. 과장이란 사람이 달래고 야단도 치고 했다지만 진이는 완강하게 저와 만나는 걸 거부하고 있었지요. 신부님이 저 대신 잠깐 만났는데 전처럼 기도도 하지 않고 아무 말이 없더래요. 더 공손하게 굴더랍니다. 무슨 나쁜 물이 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신부님이나 저는 다만 진이가 사회에 나와서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지요. 지난번에 내려가서도 진이는 못 만나고 교도관이 작은 쪽지 하나만 건네주었어요. 편지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누님, 저는 정말 바보 천치였습니다. 제가 이제껏 잘못 살아왔음을 요즘에야 겨우 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의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여기서 이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어디든 제게는 마찬가지니까요. 누님, 아이들과 내내 행복하십시오.
저는 쪽지를 움켜쥐고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이상하지요? 남녀의 그런 감정도 아니고 혈육 사이의 정과도 다른 깊은 느낌을 진이와 나누어갖고 있었나봐요. 저는 수술 뒤에 진이와 한달에 한번씩 만나는 일로 정상생활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진이는 연고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또는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다는데, 어쨌든 보다 더 엄중한 곳으로 옮겨갔다나봐요. 제 힘으로는 그 애를 다시는 만나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가 저와의 면회를 거부하게 된 속사정이나 변화를 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여 가슴이 늘 짓눌려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진이를 도울 길은 아주 없는 건가요. 저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진이의 실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가요. 오늘도 아이들의 속옷 빨래를 하얗게 빨아 널어두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겨울의 짧은 양광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이런 때마다 저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이 일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지요.
나는 편지를 읽고 나서 몇 번이나 답장을 쓰려고 해보았지만 문장이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모두가 겉돌고 있는 것만 같아서 조금 쓰다가는 곧 구겨버리고 말았다. 누구인가 이 편지들을 뜯어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니 바로 등뒤에서 누군가가 한자 한자의 글씨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어차피 생각대로의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답장은 영영 써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훈계조의 상투적인 답장을 쓰리라 작정했다. 내 속의 저 겉잡을 수 없었던 갈등 따위는 모조리 감추고서 점잖게 시작했다.
부인의 편지를 읽고 여러가지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지난번에 겪은 그 도시에서의 참변 이래로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뜻 아닌 유배생활을 자청하고 있는 셈입니다. 부인과 진이라는 청년이 맺게 된 인간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저도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경험이 있어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글쎄요, 부인이나 저처럼 어느 정도 교육도 받고 일정한 규모의 생활을 하고 있는 중간층들이란 물론 어느 부분은 할 수없이 포기하고 살아가지만, 여기서의 삶이 진이가 느끼듯 그렇게까지 엄혹하다고 느끼기는 좀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일상의 잡다한 현재의 일에서부터 앞으로 어찌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우리들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문득 돌아다보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속박 당하고 있는가를 대번에 알게 되는군요. 누구나 말로는 아주 쉽게 남북 분단이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제한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익숙해져서 마치 무너진 집의 벽 한쪽에 받침대 대신 동시대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세워두고, 그들로 하여금 무너져내리는 지붕을 쳐들고 있도록 해두면서 임시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꼴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정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임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부인이나 저와 같은 사람들은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실직을 당하거나 생활에 변화가 와서 이제까지 안일하던 일상이 깨어지기 시작하면, 일시에 삶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줄 압니다. 집 한칸 장만하는 데 반평생, 아이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알량한 중간층으로라도 자라도록 도서관이다 과외다 입시다 하면서 대학 보내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변화를 일으킬 기미짝 보여도 우리의 일생은 몽땅 허물어져버릴 것처럼 안달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삶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세상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 건가요. 우리는 은연 중에 지금과 같은 삶의 질서는 절대 불변할 것이라는 생각과 뒷구멍으로는 야합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전혀 불안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척 멀쩡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내 자식이 최소한은 우리처럼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해라 숙제해라 할지언정, 그들이 인생과 세상을 올바르게 조화시킬 능력이나 사람답게 살아갈 원칙들을 알게 하기보다는 노동자나 농민 같은 생산계층이 되지는 말지어다라고 열심히 교육시키며 평생 보내는 거 아닌가요. 이런 따위 일상들 가운데 진이의 젊음은 무엇입니까? 어렵고 고되다고 혼자서 훌쩍 아무데로나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분단으로 병든 사회의 질병을 온몸으로 앓아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노동에 찌들려 스스로 불에 타죽고 똥벼락을 맞고 시멘트길 위에 내동댕이질쳐서 머리가 깨어져 죽고,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눈이 빛나는 젊은이들이 죄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바로 이 바닥의 죽음과 고통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여기서 씨름하고 자빠지고 여기서 일어서야 합니다. 부인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진이에 대한 깊고 자상한 사량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부인과 나 같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의 요 만큼의 알량한 일상의 기반 위에서 바로 진이가 휴전선을 헤매기 전까지의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바꾸어나가는 일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은 드디어 휴전선을 무너뜨리겠지요. 다시는 진이를 찾지 마십시오. 다른 많은 성숙해진 진이가 우리와의 관계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나는 편지를 그렇게 끝냈다. 그러나 다시 읽지는 않기로 했고, 또한 다음에 전도사 부인의 편지가 오더라도 두번째의 답장은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의 편지는 일단 검열을 통과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지당한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편지투는 당시에 여성지와 신문의 책광고 귀퉁이에서 나날이 번성해가고 있던 지당로사들의 수필집과 같은 투였다. 지당한 말씀이란 꼭 한번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게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부끄러움을 오래 간직하는 일은 남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부엌 쪽으로 나가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탐스러운 함박눈이 빡빡하게 날리는 가운데 우체부의 노란 헬멧이 또렷했다. 나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기분이 되어서 아파트의 철물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아파트의 층계를 돌아서 계속 올라오고 있는 우체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의 손잡이가 몹시 차가웠다. 벨이 울리자마자 내가 문을 열었더니 우체부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의 노란색 우의 위에는 눈이 아직도 두껍게 얹혀 있었다. 나는 전보용지 위에서 꼬물거리는 타자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모친 위독 급래.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몇 달 동안 계속 앓고 누워 계셨던 터였다. 나는 전보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한동안 멍청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동치미를 마실 적에도 녹두부침을 지질 때에도 언제나 제맛이 나질 않는다고 꼭 한마디씩 했다. 내가 언젠가 때가 오면 이사를 가야겠거니 이곳은 임시로 사는 곳이려니 하고 본능적으로 안달을 느꼈던 것은 어머니의 일관된 그러한 감정의 영향이었으리라. 나는 어머니의 망향의 감정이 단순히 살던 곳을 그리워함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말년의 어머니의 가슴속에는 그보다는 훨씬 짙은 것이 싹트고 있었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지방으로 내려오신 지 며칠 안 되어서 어머니는 화단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태우고 있었다.
뭘 태우세요?
하면서 기웃이 넘겨다보니 우리가 이사할 적마다 어려서부터 늘 짐 보따리 밑에 맨 먼저 들어가던 검은 가죽가방이 어머니 발치에 놓여있었고, 그 안에서 삐져나온 누렇게 퇴색한 서류 나부랭이가 보였다. 그 가죽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이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일본 은행에서 내준 채권 따위들이며 해방될 때 미처 바꾸지 못했던 일본 돈이며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에 있다는 전답의 문서 따위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사남매희 자식을 데리고 혼자서 전후의 험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그 가죽가방을 가까이 두고 확인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나는 막 불이 붙어 연기를 올리며 타오르는 서류뭉치를 자세히 보고 놀라서 외쳤다.
아니, 어머니 이건……
그래. 느이 아부지 고향의 땅문서다.
나는 애초에 이북의 땅문서를 가죽가방에 애지중지 보관하는 일 자체가 어리석은 노릇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어머니가 가끔씩 깊은 밤중에 고리짝에서 그런 잡동사니들을 꺼내어 펴보기도 하고 되읽어보기도 하면서, 실재하는 저 먼 고향의 언저리를 빙빙 돌아다니는 것을 눈치 채고는 과연 가죽가방이 귀중한 까닭이 있다고 고쳐 생각했던 것이다.
헌데 왜 태우세요?
당신께서는 이제는 다시 귀향할 수도 없고 통일이 될 가망도 없으니 차라리 잊고 말겠다는 뜻인지 영문을 알 도리가 없었다.
인제 고향은 아예 안 가실 작정이세요?
나는 그저 가법게 농으로 말을 던져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와 안 가. 가야디. 갈라구 태우는 거야. 이까짓 거 머하간. 이런 거 까탄에 고향에 못 가디. 문서가 머이가. 쪽박을 차두 가야디.
나는 그때 이미 어머니의 주름살 사이로 날카롭게 지나가던 결의 비슷한 표정을 보면서 섬뜩하게 어머니가 얼마 못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사실 어머니는 그 뒤에 얼마 안 있어서 앓아눕게 되었던 것이다. 전보용지를 받아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아내가 친 전보임을 알았고, 또 아내의 성격으로 보아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계시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앓고 있었던 사실을 내가 알고 왕래하기가 번거로운 곳에 위독하다며 오라고 한 것은, 실상 어머니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였다. 벨이 울렸다. 나가보니 파카를 머리 위까지 둘러쓴 김이 눈을 어깨에 잔뜩 얹고 서 있었다.
형수한테서 전화 왔습니다.
뭐라고……
아니 그냥, 집에 전화하래요.
나는 에게 전보를 내밀었다.
아까 왔어. 어머니 돌아가신 모양인데.
난 몰라요. 하여튼 전화를 하시구요…… 이건 표예요.
김은 아직 내 기분을 짐작하지 못하여 조심스럽게 대하는 눈치였다. 김은 벌써 연안부두에 나가서 배표를 사온 터였다. 벌써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는 별로 얘기를 나눌 사이도 없이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쳐오는 언덕을 내려갔다. 이 지방의 눈은 내리는 대로 녹아서 길바닥에 빙수를 뿌린 듯했다. 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지만 부두에 나가봐야 배가 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역시 대합실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매표구 위에 조그만 벽보가 붙어 있었다. 해상에 폭풍경보가 발효중이오니 출항할 수 없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나왔다.
응, 나요. 전보는 받았어. 폭풍으로 배를 못 탔는데 어머니 어떻게 되셨어?
예, 저 연락…… 받으셨죠?
돌아가셨소?
네, 하지만 아주 편안히 가셨어요. 당신을 기다리셨는데. 제게 여러 가지 당부하셨어요.
아내는 어머니와 같은 투로 말했다.
곁에 사람들 있소?
그럼요. 많이들 오셨어요. 준이가 상주노릇을 하지요.
미안하군.
아뇨…… 장지는 당신 오셔서 의논해야겠지만 어머니 소원대로 거기가 좋을 거 같아요.
거기라니……
하다가 나는 알았다. 아내가 말했다.
몇 년 전에 북한강 갔다가……
아, 알아요.
나는 코스모스 다발이 손짓하듯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강변길과 짙은 산그늘이 깔린 저녁 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머니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아버지를 저런 데다 이장하고 싶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저녁의 강물은 마치 저승의 초입처럼 쓸쓸하고 적막하게 흘러갔다.
그래요, 어쨌든 지금 배가 안 뜨니까 날씨가 나아지면 첫배로 가지. 고생이 많았소.
아이들도 보고 싶어해요. 오세요.
아내의 억제된 목소리가 전화가 끊긴 뒤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김과 나는 대합실의 유리창 밖으로 미칠 듯이 출렁이며 밀려와 방파제를 원없이 때려부수는 파도를 내다보았다.
갑시다, 형님 쏘주 한잔 해야죠.
김이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대합실 건너편에 보이는 나직한 술집으로 뛰어갔다. 나무의자와 비닐을 씌운 식탁이 두어 군데 있는 목로인데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찌개와 굴회를 놓고 소주를 마셨다. 날씨며 기분 탓인지 술맛이 그럴듯했고 김과 나는 차츰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바깥에 어둠이 깔렸을 즈음에 한 사내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나는 문 쪽을 향하고 앉아 있었으므로 그 사내가 들어오기 전에 술집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들어올까말까 망설이는지 몇 번 길을 오르내리며 서성대는 모양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계면쩍게 목례를 보내는 시늉을 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로 우리의 옆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주모가 뭘 드실 거냐고 물었는데 그는 내 쪽을 자꾸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하여 허리를 깊숙이 꺾으며 인사했다.
선상님, 죄송헌 말씀이지만서도 술 한잔 먹을 수 없을까요?
뭐요?
저어, 거시기 돈이 없응게요, 술 한잔만 얻어묵어볼라는디.
사내는 뒤통수에 한손을 얹고 다시 꿉벅했다. 나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합석하자는 얘기는 아니었다. 주모에게 내가 말했다.
이 아저씨에게 소주 한병하구 안주 한 접시 주쇼. 계산은 우리 앞으루 하시 구요.
사내는 염색한 군용잠바에 예비군복 바지를 입고 작은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보아 쉰살쯤 먹었을까, 얼굴은 깊게 팬 주름살 때문에 표정이 없어 보였다. 그가 적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를 향하여 웃을 적마다 벌어지는 입술도 마치 두꺼운 종이가 주욱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김과 마주앉아 소주잔을 보고 있는 척 했지만 실은 사내의 거동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사내는 두 손을 맞비비더니 우선 주모에게 대접 하나를 달라고서는 내게 씩 웃어 보였다.
참, 꼭 일 년만이네요.
우리는 그의 말이 무슨 소린지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고 또 한번 두 손을 비비더니 주모가 갖다준 대접에다 술 한 병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대접을 양 손바닥에 쥐고 쳐드는 사내의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는 주모와 김과 나, 셋이 눈치볼 것 없이 사내의 음주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장엄한 광경이었다. 한 대접에 따라진 술 한 병이 꿀꺽이며 사내의 목젖을 타고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세면기의 물이 빠질 때처럼 마지막으로 꼬로록, 하는 소리를 냈다. 사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길게 내뿜고는 점잖게 입가를 소매로 씻었다. 그는 사이를 두었다가 안주 한 점을 엄지와 검지로 앙증맞게 집어올려 날름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아, 하는 한숨이 사내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우리는 아직도 그를 바라보는 중이었고 그는 우리를 향하여 또 입술을 주욱 찢었다. 그는 잠시 동안 빈 대접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술 한병 가지구 되겠어요? 한잔 더 하시지요.
예? 한잔 더요?
사내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술 한병 더 주시지요.
내가 말하자 주모는 갑자기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저씨 같은 손님만 오시면 우리집 술이 바닥나겠네.
사내는 이번에는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한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김이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배에서 내리셨어요?
예? 아니오. 큰집서 나오는 길이어라우.
하더니 사내가 잠바의 윗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흔들었다.
시방 귀향증 떼어갖고 배 타고 갈라고 왔지라. 배도 못 타고 눈은 오지게 오는디.
몇 년 살았어요?
뭐 이참에는 한바퀴 돌고 나왔는디 사범이구먼요.
사내는 보기보다는 시원시원했다. 당한 일들에 비해서는 오히려 너그러운 데가 있었고 그런 유의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겸손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지만 술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을 거였다. 내가 마음을 좀 놓으며 그를 이끌어들였다.
예이 여보쇼, 아 그래 한두 번두 아니구 별을 네 개나 달면 어쩔려구 그러슈?
사내는 고개를 숙이더니 술 한 잔을 부어서 탁 털어넣었다.
사는 게 맘대루 안되드만요.
고향은 어디요?
쩌어, 전라도 짐제지라우.
사내는 곡창지방의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랑스러운 일꾼, 소작농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어린 자식들. 서울로 갔겠지. 막노동판, 산동네, 봉지쌀, 도로공사판, 밀가루, 새마을사업, 철거. 그런 건 묻지 않기로 했다. 김이 말했다.
고향엔 가족들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구먼요. 애들은 서울 보육원에 맡겼는디.
여기까진 뭣하러 오셨소?
여그 무슨 대학 짓는다고 공사하러 왔습니다. 십장이 시계를 잊어 묵었는디 아 그 염병할 놈이 나더러 가져갔다고 혀서 몇 대 패고…… 한바퀴 묵어 부렀 당게요.
아무도 없다는데 고향 가서 뭣하시게?
사내는 허허 웃으며 다시 종이쪽지를 쳐들어 손가락으로 글씨를 짚었다.
내가 뭣을 알간디요. 본적지가 거그라고 가라능만요. 오늘밤은 경찰서 가서 귀향증 보여주고 하룻밤 자고 낼 가야겠구만요.
사내가 차츰 조용해지더니 술잔을 잡은 채로 눈발이 날리는 유리창 쪽을 물끄러미 보고 앉아 있었다. 우리도 다시 이쪽 탁자로 돌아와서 김과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감옥의 철문에 머리를 짓찧어서 뇌를 다친 철영이 얘기도 나오고 우유배달을 하는 그의 아내와 두 딸아이의 얘기도 나오고, 그가 싸지른 똥을 치우며 그를 달래고 어르다 울던 철영이 아내의 피눈물 얘기, 그리고 첫아기 가진 아내를 잃은 김선생의 ―—여보 우리 천극에서 만나요一—로 시작되는 묘비명 얘기도 나왔다.
우리두 좀 알지라우. 다 알지라.
갑자기 사내가 큰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그는 어느 결에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이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내에서 좀 시끄런 일이 있었어라우. 밥 묵는 것도 그렇고 폭행 문제도 있어서 야문 사람들 몇이 주동이 돼갖고 일어났지요. 나도 서대문 영등포 많이 돌았으니께 학생들 하는 짓도 보고요이. 아무리 야물어도 헐 수 없습디다. 개털 도둑놈들만 있으니 씨알이 먹힙니까. 콱 밟혔당께요. 교도관도 이노꼬리 잡아놓고 혔으니 책임이 크지요. 무기에 장기에 모두들 징역 복이 터져갖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절에서 구경허던 작것들은 내처럼 일찍 풀려나오고요. 좆도 팍 찌그러졌지요.
김과 나는 그의 흥분이 갑작스러운 것이라 대답하지 않고 탁자만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는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났다. 탁자가 울리는 바람에 뛰어오른 알루미늄 대접이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대접을 집어서 탁자에 다시 올려놓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상반신을 내 쪽으로 숙였다. 그의 눈이 이상스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불온하게 떨려나왔다.
니미…… 이따위로 살 바엔 차라리 저쪽이 나슬 것이오, 암만. 그때에 다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김이 이쪽 탁자를 내려쳤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반쯤 들어 있던 술병이 떨어져 박살이 났다.
이 사람 이거 안되겠군. 여보, 우릴 뭘루 보는 거요? 그따위 말두 안되는 소릴 함부로 지껄여두 되는 거요? 이 사람 아직 혼이 날려면 멀었구만.
나는 옷 위에 번진 술을 휴지로 닦으면서 사내에게 말했다.
여보쇼, 아무리 그렇다고 한두 번두 아니고 네 번씩이나 큰집 엘 간단 말요? 당신 열심히 살았다구 할 수 있는 거냐 말야. 애들은 고아원에 맡겨두고, 성실하게 일해서 먹구 살았다구 어디 말해보쇼. 그렇게 저질르구 이제 와서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요?
사내는 말뚝처럼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이 그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면서 다그쳤다.
사과하쇼. 그리구 아까 한 말 취소하쇼.
사과 못허겄시우.
사내는 당당하게 말하고 나서 보퉁이를 챙겨들더니 유리문 앞에 가서 돌아섰다. 사내는 아까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술 잘 먹었구먼요.
유리문이 조용히 닫혔다. 김과 나는 흐트러진 탁자 앞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바람소리는 여전했다. 창문이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김이 말했다.
술 더 하실래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돈을 치렀다. 밤이 되어서인지 눈이 제법 쌓여 갔다. 눈발은 여전했다. 어쨌든 어머니의 영가(靈駕)를 모시고 그 머리맡을 지킬 수는 없었으나 초상술은 마신 셈이었다. 김과 나는 눈발 때문에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었다. 김 이 뒤따라오며 말했다.
형님,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아, 들어가서 자야겠어 .
내일 떠나실 거조?
응, 폭풍이 멎으면.
건널목에서 나는 김에게 손을 쳐들어 보이고는 길을 건너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택시를 타고 졸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사방에 희끗희끗한 눈송이뿐이었다. 사과를 하라고, 너는 반공법에 걸린다고, 나는 끼여들기 싫다고, 너나 뒤집어쓰고 꺼지라고, 살아 있음이 싸움인 사람들에게, 이따위로 살 수는 없다는 사람들에게 빨갱이 혐의나 뒤집어씌우면서 살아갈 건가. 날마다 이 술집 저 골목으로 막걸리 반공법에나 걸리기 똑 알맞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김제 사내. 정말 전도사 부인처럼 진이에게 면회도 못 가면서. 그래 우리가 이 고통받는 상황의 주인이라는 건 안다. 그러면 그 고통의 정말 주인은 누구냐, 누구야.
나는 눈밭에 빠진 채로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먼 바다에서 아우성 치는 폭풍과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울었다. 옛날 얘기의 첫줄은 어떻게 시작되던가. 옛날 옛날에 한 나그네가 산중에서 길을 잃었대. 그래서 한참을 헤매는데 저어 아득한 어둠속에서 불빛이 반짝반짝하더래. 나그네는 힘을 내어 인가가 있겠거니 하고 불빛을 찾아갔대. 주인장 계시오.나는 옛날 얘기대로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비틀거리며 걸어올라갔다.
〔문학예술운동 제1호 1987. 8; 골짜기, 인동 1987〕
2016년 7월 1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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