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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거짓 목자를 경계합시다!
요즘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거짓 목자, 즉 양들을 섬기고 구원하는 목자가 아닌 잡아먹는 삯꾼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대마귀들이요 악령들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하고 등장해 어린 양떼를 현혹시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양들을 섬김의 대상이나 사목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먹잇감이요 욕구충족의 대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거짓 목자들은 가짜 뉴스를 진짜인 양 목숨 걸고 퍼뜨리고 있습니다.
목자로서의 가장 기본인 인성이나 품위, 겸손의 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박한 언행과 기이한 억지 논리로 양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베엘제불입니다.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거짓 목자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습니다. 홀로 식별이 어려울 때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톨릭교회 목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거짓 목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주님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예수님이 목자시라면 나는 양인가? 그럼 문지기는?>
복음: 요한 10,1-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 등장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헛갈릴 수 없습니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부르심은 마치 “마리아야!”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목소리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아이는 어머니의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여기는 이들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면서 절대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목자는 한 명입니다. 어머니가 하나인 것처럼. 어머니가 여럿일 수 없듯, 아버지께 가는 길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어머니를 좇아가면 잘못된 아버지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풀밭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양들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양들이라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양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목자와는 구별되는 일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문지기’입니다. 문지기는 양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제가 다른 신부님과 몇 명의 평신도분들과 함께 시작한 작은 공동체 모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미사하고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눕니다. 가끔은 힘든 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끔은 기쁘게 웃고 떠들기도 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공동체가 미사를 하고 나눔을 하기에 그 직무를 담당합니다. 미사와 나눔이 빠지면 이 공동체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사제로서 이 공동체의 울타리가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공동체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사람, 혹은 세례 받았더라도 오랜 냉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들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불교를 믿던 한 자매가 명동성당에서 교리를 받고 있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자매는 이번 모임 때 30년 만에 고해 성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부활 전에 모임을 하고 헤어질 때 제가 “이번 부활 땐 꼭 미사 나가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하나의 명령처럼 들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혹은 고해성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 지를 고민하며 망설였는데 막상 고해성사하고 성체를 영해 보니 그동안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30년 만에 성체를 영한 그분은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문지기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불러주실 때까지 양들을 지키는 역할입니다. 공동체가 유지되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역할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불린 이는 새롭게 공동체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리나 거짓 목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참 목자에게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 기다리는.
저도 교사회를 하다가 교사 피정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뒤돌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묶어 주는 공동체가 없었다면 그 부르심을 받는 게 가능했을까요? 우리에겐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엮어주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부르심을 기다리는 양들이 아닌, 양 우리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는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 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며 인도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3절) 문지기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문이시며 진리이시다.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이 목자는 양들을 앞에서 이끄신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친다.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된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본당에서 사목 위원으로 봉사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아주 열정적이라서 신부님과 함께 즐겁게 사목한다는 것입니다. 전의 신부님 때보다 일이 많이 늘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 너무 즉흥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럽게 전례가 바뀌거나 일정이 변경되어 혼란스럽다고 하십니다. “이 점만 아니라면….”이라는 말씀에 뜨끔했습니다. 그 본당신부님 모습이 제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신자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생각을 뒤로 미루면 괜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로 행동했습니다. 문제는 이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 박자 늦추는 삶이 필요함을 그리고 이 역시 또 다른 배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행동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누구는 그 좋은 의도로 곤란한 상황에서 힘들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겸손은 기다림이 아닐까요? 나서서 행동하면 물론 빠른 일 처리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이에 따라 힘들고 아플 수 있다는 것도 떠올려야 했습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모습이 예수님의 주특기였음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기다려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예수님께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의 주님임을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문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옮길까요? 문은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래야 양들이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양들에게 이 문은 구원의 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주님이 계시기에 길을 잃었다가도 얼른 그 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을 통해 들어올 때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사람들이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오노레 드 발자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요한 10,10)
목자가
양들의 문으로
자기 양들을 인도하듯
사제는
성경의 문으로
신자들을 인도한다네.
참된 목자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틈틈이
도둑처럼 들어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이단 교리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해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진정한 앎은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그 사람들에게 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 고통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절규를
귀담아 듣게 됩니다.
하느님을 대신해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 등을 다독거려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를 건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할 줄 아는 게 사제의 삶입니다.
그게 진짜 사제가 뭔지 아는 겁니다.
그래야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게 됩니다.
나는 양들이 나의 음성을
알아듣게 하는 목자인지부터 살펴야 하겠습니다.
복음 말씀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