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문을 공부할 때 토(吐)를 붙여서 글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상들은 토(吐)를 달아서 읽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의 어순과 한문의 어순의 차이를 토(吐)를 붙여서 보정(補正)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옛날에는 역관(譯官)이나 변방(邊方)의 백성들이 아닌 일반인들은 우리말과 어순이 다른 외국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순이 다른 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토(吐)를 붙여서 가능한 한 우리말의 어순과 비슷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영어를 공교육의 기본적 교과과정으로 받아들여서 교육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우리말과 다른 어순의 말에 대한 이해도 옛날과는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굳이 어순을 조정하기 위한 토(吐)를 붙여서 한문을 읽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토를 달아서 공부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영어나 독어에 토를 붙여서 읽지 않아도 하등의 문제가 없듯이, 한문에 토(吐)를 달지 않고 읽는다고 해서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토(懸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1) 토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토(吐)는 '잇가', '호되', '케이다', '런고', '이온여' 처럼 조선 시대의 말을 기준으로 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세 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케이다'가 무슨 뜻이며, '이온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이 한문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토(吐)가, 이 시대에 있어서는 오히려 문장의 이해를 방해하는 방해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2) 단문을 장문으로 변형시킨다
현토(懸吐)는 여러 개의 단문으로 구성된 문장을 '하고, 하니, 하신대, 호대, 호니, 이어늘, 언정, 언마는' 등의 접속사를 계속 연결시켜, 호흡이 긴 장문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토의 방식은 가뜩이나 한글로 된 긴 호흡의 문장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젊은 세대에게 더 큰 장애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문장은 점점 짧은 단문의 방식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갈수록 긴 호흡의 장문을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단문으로 끊어 읽어도 될 문장을, 붙이지 않아도 될 접속사를 억지로 붙여가며 기차처럼 길고 긴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과연 문장을 이해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3) 사람마다 다르다
또한 토(吐)는 관토(官吐)라는 기준이 있지만, 관토(官吐) 자체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율곡 선생께서 붙인 율곡토(栗谷吐)만 하더라도 관토(官吐)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율곡(栗谷)만이 관토(官吐)와 다른 토(吐)를 달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율곡의 토는 퇴계(退溪)의 토와도 달랐을 것이고, 남명(南冥)의 토와도 달랐을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시대에 와서도 토(吐)는 다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서점에 가서 《논어》의 토(吐)를 살펴보면, 번역서마다 토(吐)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쉽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학자(學者)마다 다르고 학파(學派)마다 토(吐)가 다르기에, 한 사람이 붙여놓은 토(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수정될 수 밖에 없고, 그 수정한 토는 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수정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4) 새로운 해석을 가로막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토(吐)는 한문의 새로운 해석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토(吐)를 붙이는 순간 그 문장의 해석은 고정되고 맙니다. 따라서 토(吐)를 붙이는 순간 그 문장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차단됩니다. 토(吐)가 붙은 문장을 다르게 해석하고자 하면, 우선 토(吐)부터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문(漢文)의 장점 중의 하나는 다양한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吐)를 붙이는 순간 부드럽고 말랑말랑 해서 살아있던 문장이 마치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고 굳은 문장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해서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해석을 방해하는 현토(懸吐)를 고집한다면, 우리가 한문 문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없게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문에 토(吐)를 붙여서 읽음으로 인해서 우리 조상들이 이해한 대로 한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자마다 토(吐)가 달랐고, 학파마다 해석이 달랐듯이, 어떤 하나의 고정된 토(吐)를 붙여 한문 문장을 읽는다고 해서 여러 학자들의 그 문장에 대한 이해를 다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옛사람들의 이해는 토(吐)가 아니라 문집이나 기타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시각이나 과거의 해석이 아닐 것입니다. 주자(朱子)도 기존의 해석과 다른 이단적인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듯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주자(朱子)의 해석과도 다른,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눈으로 문장을 보고,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해석으로 문장을 풀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 보편성의 상실
토(吐)를 달아놓은 한문은 오직 한글을 아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제한성이 있습니다. 토(吐)를 단 한문의 원문 서비스는 오직 한글 사용자만을 위한 한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활용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옛 사람들이 토(吐)를 달아서 읽었다고 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반드시 토(吐)를 달아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조들이 토를 달아서 읽었다고 해서 우리가 계속 현토(懸吐)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우리 나라의 한문의 위상을 세계로부터 스스로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토(吐)를 다는 방식의 한문 공부와 토(吐)를 다는 방식의 한문 원문 서비스는 보편성을 상실하여 세계인으로부터 외면받는, 오직 우리나라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공부가 되고, 한국인만을 위한 원문 서비스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점(標點)을 다는 방식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될 것입니다. 보편성을 갖추지 못한 방식은 세계인으로부터 외면받고 결국은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통의 존중과 보존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전통의 존중과 보존이, 전통의 고수(固守)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방해하는 방해요소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문장의 이해도 어렵게 하고, 활용도도 떨어지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도 가로막는 토(吐) 달기에 집중하기 보다, 만국 공통의 기호인 표점 중심의 한문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보다 더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한문 공부가 되고, 보다 더 세계적 요청에 부합하는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