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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북유럽 여행 ⑤ : 북유럽 맹주의 숨결을 느끼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712 17.10.23 03: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4() : 스톡홀름(구시가지인 감라스탄, 왕궁, 시청사, 바사박물관)

 

여행 다섯째 날 : 스웨덴의 스톡홀름(Stockholm)

 

특징 : 스웨덴(Sweden, Kingdom of Sweden) : 스칸디나비아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게르만족인 스웨덴인이 95를 차지하며, 핀란드인이 4% 정도이다. 스웨덴어가 공용어이며, 전국민의 87가 기독교의 한 분파인 복음루터교를 믿으며, 가톨릭교가 1.5% 이다. 이 나라의 역사는 500년경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인이 쇼넨지방에 정착하였고, 600년경 스비아인이 웁살라부근에 정착하였는데, 이 두 민족이 융합하여 스웨덴인이 형성되었다. 911세기의 바이킹시대를 거쳐 13세기 초에 신왕조를 창시한 비르에르얄(Birger Jarl)이 통일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말 인접한 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칼마르동맹을 결성하였고, 1523년 구스타브 에릭슨(Gustav Eriksson)의 지휘 아래 독립할 때까지 사실상 덴마크왕조의 지배를 받아왔다. 18096월 헌법을 제정하였고, 17세기 후반에는 한때 유럽의 강대국으로 국세를 떨치기도 했다. 현재의 영토는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함에 따라 만들어졌다. 1946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외교정책의 기조는 한마디로 전시의 중립을 목표로 한 평화시의 비동맹이다. 따라서 완벽한 방위능력을 보유하고, 유사시에는 입체적으로 격퇴한다는 총력방위개념으로서, 주요 물자 비축, 생산대체 태세 및 전시 대비 병력 동원체제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59년에야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선을 파견했고, 휴전 후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으로 활약했으나 그 이전부터 관계를 맺었다고 봐야하겠다. 1960년에는 양국관계가 대사급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톡홀름(Stockholm) : 스웨덴의 수도이며 발트해로부터 약 30km 정도를 거슬러 올라온 멜라렌호() 동쪽에 위치한다. 많은 반도와 작은 섬들의 위에 시가지가 자리한 탓에 넓은 수면과 운하가 많다고 해서 흔히 북구의 베네치아로도 불린다. 스톡홀름은 1250년에 스타덴섬에서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 무렵의 교회와 시장의 광장, 불규칙한 도로 등이 남아 있다. 1255년경부터는 한자동맹(Hansa League)에 속하는 항만도시로서 번영하였는데, 당시에는 독일계 시민의 세력이 컸다. 1520년에는 스웨덴 국왕을 겸하고 있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반대세력을 탄압하여 스웨덴계 귀족을 학살했다. 이를 계기로 구스타브 바사(후일의 구스타브 1) 아래 결속한 세력은 1523년에 한자동맹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7세기에는 크리스티나 여왕 치하에서 시의 정비가 진행되었으며, 그동안의 수도였던 웁살라 대신 수도가 되어 북유럽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그런 특징은 바로크풍의 건물에 잘 나타나 있다. 1850년부터는 제3의 발전기에 들어갔으며, 낭만적인 전원도시에서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1950년부터는 대규모의 도시계획으로 도심지를 헐어 새로운 비즈니스가()와 공원을 건설하였다. 특히 빈민가가 전혀 없는 것이 스톡홀름의 자랑이다. 참고로 스톡홀름(Stockholm)‘stock’은 목재, ‘holm’은 섬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곳이 과거에는 목재의 집결지로서 경제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배에서 내리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현지가이드가 동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감라스탄(Gamla stan)’ 지역이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내려준 곳 역시 물가이다. 바닷가를 벗어나 호숫가에 다다랐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 스톡홀름은 발트해와 멜라렌호()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항구인 것이다. 우리가 내린 곳은 감라스탄(Gamla stan)’, 감라스탄이란 스웨덴어로 옛 도시를 뜻한다. 따라서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구 시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감라스탄은 스타스홀멘 섬(Stadsholmen)’에 위치하며 다리 사이에 위치한 거리를 뜻하는 스타덴 멜란 브로아르나(Staden mellan broarna)’라고 부르기도 한다. 감라스탄 주변에 있는 작은 섬들로는 리다르홀멘 섬(Riddarholmen), 헬게안스홀멘 섬(Helgeandsholmen), 스트룀스보리 섬(Str?msborg) 등이 있다.





널따란 광장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아마 스톡홀름궁 남쪽 길이자 광장인 슬로츠바켄(Slottsbacken)일 것이다. 오른편에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정면으로 성 니콜라스교회(Storkyrkan, The Great Church)’라고도 불리는 스톡홀름 대성당(Stockholms domkyrka)‘이 나타난다. ’감라트탄지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축물이지만 일단은 제켜두고 왕궁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놓은 왕궁 또한 두 번째 가라하면 서러워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입헌군주제인 이 나라에서는 왕실의 거주지인 이곳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그 외에도 이곳 감라스탄에는 노벨 박물관과 스웨덴 왕실의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리다르홀름 교회(Riddarholm)‘ 등이 있다. 감라스탄 북서쪽에는 기사의 관저(Riddarhuset)가 들어서 있다.



광장 쪽으로 나있는 왕궁의 문 앞에는 근위병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 근무교대 의식을 치르고 있다.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참을 구경해본다. 그런데 교대를 하고 있는 4명 가운데 1명이 여성이다. 남자들 일색이었던 다른 나라의 근위병들만 보아왔기에 낯선 풍경으로 비쳐진다.



성당의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의 정문이 나있는 광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 아니 왕궁을 오른편에 끼고 걷다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왕궁의 주인인 스웨덴 왕실(Swedish Monarchy)970-1060년의 웁살라(Uppsala)왕가로부터 시작되어 스텐킬(Stenkil)왕가’, ‘스베르커(Sverker), 에릭크(Erik)왕가‘, ’벨보(Bjelbo)왕가등을 거쳐 1818년부터는 나도테(Bernadotte)왕가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실권은 없다. 국왕은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지만 1975년의 헌법 개정으로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국왕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며 국회의 개원, 외교사절의 임명 및 접수 등 의례적인 직무만 행한다. 현재의 국왕은 1973년에 즉위한 구스타브 16이다. 1976년에 결혼한 실비아 소머래스(Silvia Sommerlath)왕비와의 사이에 왕세녀 빅토리아(Victoria:1977년생)와 칼 필립(Carl Philip:1979년생), 마델라이네(Madeleine:1982년생) 12녀를 두었다.



안으로 들면 둥근 반원형 날개 건물 둘이 에워싼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아니 한쪽 귀퉁이에 적혀있는 지도를 보니 ‘yttre borgg?rden’이라고 적혀 있다. ‘yttre borgg?rden’‘yttre’는 스웨덴어로 바깥의또는 외부의’, 그리고 ‘borgg?rd’성내의 마당을 뜻하는 각각의 단어이니 바깥쪽에 있는 왕실 정원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말이 정원이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다. 이럴 때는 바깥마당이라고 표현하면 될 듯도 싶다. 아무튼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왕궁 건물이 자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안마당(위에 첨부된 사진에는 Inre borgg?rden로 나와 있다)과 대비시킨 이름이지 싶다.



왕궁의 정문(正門)은 이곳 외부 정원으로 나있다. 정문 또한 근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다.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이 결합된 건물이다. 13세기에 요새로 처음 지어진 후 왕궁으로 발전했으나, 1697년 대화재로 피해를 입어 오랜 복원 공사 끝에 1754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1982년까지 왕과 왕비가 실제로 거주하던 곳이었지만 스톡홀름 외곽의 드로트닝홀름 궁전(Drottningholm Palace)’으로 이사하면서 지금은 외교 사절단의 숙소나 스웨덴 왕족이 집무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3층 높이의 건물 안에는 유명한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길로 아름답게 장식된 방 1430개가 있는데 일부는 관람객들에게 공개된다. 그중 압권은 보물의 방(Royal Treasury)’이라고 한다. 에릭 14세의 왕관을 비롯한 역대 왕실의 보물들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223일부터 1230일까지 시기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만 왕궁 내부를 일반에게 공개하기 때문에 운영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가야 한다. 이를 대비 못한 우리는 내부 관람을 할 수 없었다. 하긴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여행사에서 일정을 잡는 게 먼저이겠지만 말이다.



동서 89m에 남북이 77m'바깥마당'은 궁전 본 건물을 타원형으로 생긴 두 개의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본 건물을 가운데에 두고 전면의 양쪽에서 둥글게 뻗어 나온 날개 회랑(回廊)이 에워싼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오른편 날개 회랑 앞에는 몇 문의 대포가 진열되어 있다.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니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근위병이 고함을 지른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가 되어있다. 넘어가지 말아야할 요소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무슨 행사 준비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왼편 날개 회랑 뒤로는 스톡홀름 대성당의 첨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무튼 날개화랑의 프리즈(frieze, 고전건축에서 주두에 의해 지지되는 부분인 엔타블레이처3부분 중 가운데 것)를 따라 띠처럼 옛 투구와 갑옷, 무기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왼쪽 날개화랑의 한가운데에는 여인의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주인공은 종교의 개종(改宗)을 위해 여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크리스티나 여왕(Drottning Kristina, 재위 1632-1654)이다. 본명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Maria Christina Alexandra, 1626-1689)‘인 그녀는 부왕인 구스타브 2(Gustav II Adolf of Sweden)‘가 가톨릭국가와 개신교(루터교회) 사이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 뤼첸전투(1632)’에서 죽자 불과 6세의 나이로 추정상속인으로서 스웨덴의 왕좌를 물려받는다. 어린 크리스티나는 부친 재임 시절 재상을 역임했던 청렴한 성품의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5명의 섭정 대신의 헌신적 도움을 받아가며 정치, 행정, 군사, 외교를 위한 다양한 외국어 교육을 이수 받는다. 이때 그녀를 가르치던 유럽의 1급 석학(碩學)들 가운데 한 명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이다. 164418세가 된 크리스티나는 섭정에서 벗어나 정식 여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재임 중에 ‘30년 전쟁을 종식 시키면서 독일과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체결해 막대한 토지와 전쟁 배상금을 받아낸다. 또한 신문 발간, 웁살라 종합대학 설립, 미술품 구입 등 문화와 교육, 예술에 대한 지속적 투자를 시도해 스웨덴을 서유럽 국가와 버금가는 부국강병으로 만드는 초석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한다. 개신교가 국교인 나라의 여왕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왕위를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재임 10년째인 1654년에 전격적으로 퇴위를 선언한다.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위해 서슴없이 왕위를 버린 것이다. 당시 그녀는 왕권을 행사하는데 절정의 나이인 28세였으니 스웨덴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퇴위한 뒤에도 그녀는 도나 여백작(Countess Dohna)’으로 활동한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크리스티나는 모국 스웨덴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로마 체류 중이던 1689년 향년 63세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힌다.



왕궁을 다 둘러봤으면 이젠 감라스탄의 옛 골목을 거닐어볼 차례이다. ‘스톡홀름 대성당의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된다. 감라스탄은 13세기부터 형성되었으며 중세 시대에 건설된 도로와 거리,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이전에 지어진 수많은 건축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곳 감라스탄은 슬럼으로 간주되었고 역사적 건축물들 가운데 대부분은 방치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수많은 벽돌들과 5개의 골목길이 스웨덴 의회의 확장 공사로 인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중세 시대의 거리와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이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감라스탄의 구시가지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혹자는 이곳의 분위기를 커피 집 광고에 나오면 딱 어울릴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밀레니엄 버그(millennium bug)’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던 1999년에 이곳 스톡홀름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당시 동행을 했던 국내 일간지의 중견기자와 이 부근의 뒷골목을 거닐었는데 그가 감탄사 끝에 내뱉던 넋두리도 이와 비슷했었다. 그런데 당시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도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눈에는 오죽 이질적인 풍경으로 다가오겠는가. 아무튼 이런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길바닥은 돌을 깔아놓았다. 오래 묵은 건물들과 함께 묶어지니 중세의 느낌은 한층 더 짙어진다. 어쩌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올 만한 길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좁디좁아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도 못 다닐 형편이다. 오롯이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를 걷다 보면 16세기 유럽의 어느 마을 속에 와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감라스탄은 13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 온 곳으로, 건물 외벽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역사다. 지금은 스톡홀름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고급 주택가로 거듭났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저렴하게 스웨덴 전통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많아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이 선호한다.



스톡홀름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곳으로 꼽는 곳이 바로 감라스탄 지구이다. 스웨덴의 옛 모습과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흡사 하나의 거대한 옥외 박물관(屋外 博物館) 같기 때문이란다. 고딕,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축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수많은 골목들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골목길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가지를 친다. 그렇게 이리저리 뻗어나간 오래된 골목을 걸어보는 게 감라스탄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옛 건물을 개조한 레스토랑과 카페들까지도 이색적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아 넘길 게 없다는 얘기이다.



골목길을 대충 돌았다 싶으면 옛 건물들이 에워싼 장방형의 광장이 나타난다.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데도 '큰 광장'이라는 뜻의 스투르토리에트(Stortorget)’란 이름을 얻었다. 감라스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만 해도 시청이 들어서 있던 중심 광장이자 스톡홀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152011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의 귀족들을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폭동과 내전이 일어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고 구스타프 1바사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 유명세 덕분에 이 광장은 감라스탄에 온 여행자라면 빼놓지 않고 꼭 들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광장의 복판에는 꼭대기에 화병 모양의 장식을 얹은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괴상하게 생긴 모양새처럼 '해골의 샘'이란 섬뜩한 별명을 갖고 있는 우물이다. 3국 연합시대 말기인 1520년 스웨덴을 지배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말을 듣지 않는 이유로 스웨덴 귀족 90명의 목을 쳐 묻은 곳에 세운 우물이어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단다. 그 귀족 중엔 독립 스웨덴 왕국을 세운 바사왕, 구스타브1세의 아버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스웨덴 독립의 기폭제가 된다. 3년 뒤 바사가 이끈 농민과 귀족들이 덴마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물의 설계는 노벨박물관을 설계했던 엘름 팔름스테트(Elm Palmstedt)가 맡았다. 참고로 이 우물은 더 이상은 샘물이 아니라고 한다. 1859년 샘물이 마르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1950년대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상수도로 연결을 시켜 놓았단다.



광장의 랜드 마크(landmark)노벨 박물관(Nobel Museum)’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노벨상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문을 열었는데 역대 노벨상 수상자 자료를 모두 전시하고 있으며 수상자들과 관련된 짧은 영상을 개관 시간 내내 상영한다. 또한 700여 점이 넘는 오리지널 발명품과 초기 컴퓨터가 전시되어 있으며, 세계를 바꾼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 다양한 발명 모형, 책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박물관 자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아서 약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모습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깊은 공간이다. 1층 카페의 의자 뒤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친필 사인도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건물은 '주식시장 건물(B?rshuset)'이었다. 시청이 인근 본데(Bonde)궁으로 옮겨 가고 난 1778년에 시청이 있던 그 자리에다 프랑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설계는 스웨덴의 건축가인 엘름 팔름스테트(Elm Palmstedt)’가 맡았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과 같은 외형이나 옥상에 랜턴형 돔(dome)을 올려 공공건물이라는 걸 강조했단다. 그러다가 일층에 있던 증권거래소가 1998년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2001년 노벨상 백년을 기념해 노벨박물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층에는 ?스웨덴 한림원(Svenska Akademien/ Swedish Academy)’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스웨덴 문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왕립 학술기관으로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 발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물리학상과 화학상,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가,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심사하여 선정한단다.



고색창연한 중세의 건물들이 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다. 16-18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란다. 그런데 노벨박물관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의 일층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어김없이 들어서 있다. 광장은 관광 성수기인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텅 비어있다. 그러니 카페나 레스토랑이라고 문을 열었을 리가 없다. 이른 시간이기도 하지만 비까지 내리는 게 원인이지 싶다. 겨울철이면 이 광장의 주변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선다니 참조한다.



그때 가이드의 손가락이 뭔가를 가리킨다. 아래 사진의 방향, 그러니까 광장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미색(米色) 건물이다. 건물의 2층 코너에 뭔가가 박혀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검고 둥글게 생긴 뭔가가 보인다. 가이드의 말로는 덴마크와 다툼이 있던 시절 날아온 탄환(彈丸)이 박힌 것이라지만 글쎄다.



주어진 시간에 여유가 있어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본다. 감라스탄에서도 가장 오래된 가게들이 들어서있다는 상인의 길’, ‘쾨프만가탄(K?pmangatan)’이 아닐까 싶다. 이곳 역시 옛 건물들 일색이다. 그런데 같은 외양을 가진 건물들이 거의 없고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런 건물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쾨프만가탄거리가 끝나는 곳에 작은 광장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도 기마상(騎馬像)이 하나 세워져 있다. '성 외란(Sankt G?ran)과 용'이라는 이름의 조각상이다. 이와 똑 같은 조각상은 스톡홀름대성당의 안에도 있다고 한다. 대성당의 목각 걸작을 1912년 복제해서 이곳에다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을 외형을 가질 수밖에 없겠다. 다만 진품이 나무로 만들어진 반면, 복제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다를 뿐이다.



옛 골목들을 대충 둘러보고 난 뒤, 아까 투어를 시작했던 광장으로 빠져나오면 스톡홀름 대성당(Stockholms domkyrka)‘이 나온다. 성 니콜라스교회(Storkyrkan, The Great Church)’로도 불리는 이 건축물은 1279년에 벽돌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원래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여러 번 증·개축을 반복하면서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이 섞인 독특한 모습을 지녔다. 예로부터 스웨덴의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열려왔으며, 특히 역대 국왕의 대관식과 결혼식 등이 거행된 장소로 유명하다. 이곳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문이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가와 귀족들의 문장으로 장식된 성당의 내부는 볼 것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89년에 성당에 기증되었다는 높이 4m의 나무조각상 성 예란(St. G?RAN)의 기사상(騎士像)‘이 유명하다. ()과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형상을 조각한 이 목조상은 섭정(攝政, 기간 1470-1497))이었던 스텐 스투레 1(Sten Sture )’와 그의 부인이 부룬케베리 전투(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를 크게 무찌른 전투)’의 승전에 대한 사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문이 열려있지 않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와 봤다.



문 앞에 마르틴 루터의 제자 울라우스 페트리(?Olaus Petri/ 1493~1552)’의 동상이 서있다. 바사왕으로 불리는 구스타브 1를 도와 루터의 종교개혁을 스웨덴에 전파한 종교지도자로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의 기반을 닦았다. 신약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설교집과 스웨덴연대기, 스웨덴 최초의 희곡을 쓴 스웨덴 문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동생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1499~1573)’는 스웨덴 최초의 신교(新敎) 대주교가 됐다고 한다.?



성당 앞에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세워져 있다. 스타브 3세가 18세기 말 러시아 전쟁에 나간 사이 스톡홀름을 지켜준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프랑스 출신 건축가 루이 장 데스프레즈에게 세우도록 했다. 5미터 기단까지 합쳐 높이가 22미터에 이르는데,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조각의 돌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이란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구조물은 스톡홀름의 모든 도로의 기준점이 되는 원표 구실까지 겸하고 있다니 참조한다. 아쉽게도 오벨리스크의 외관은 구경할 수 없었다. 보수공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슬로츠바켄(Slottsbacken)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14의 청동 기마상이 보인다. 그런데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아마 원래 있던 자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보다. 아무튼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의 스웨덴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7년 전쟁에 무의미하게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많은 영토까지 잃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처음의 반()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전환하여 러시아와 싸워 핀란드를 잃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장군 베르나도테를 황태자로 맞아들였다. 1809년 베르나도테는 칼 요한이라 칭하며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반 나폴레옹의 태도를 취했으며, 1814년에는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1818년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14이자 현 스웨덴 왕조의 시초이다



다음 행선지는 스톡홀름 시청사(Stockholm City Hall)’이다. 차에서 내리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이 나타난다. 언뜻 보아서는 교회처럼 보이지만 1923년에 건축된 스톡홀름 시청 건물이다. 무엇보다 매년 12, 노벨상 시상식 후 축하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건물은 저명한 건축가 라구날 오스트베리(Ragnar ?stberg, 1866-1945)’의 설계로 1911년에 시작해서 12년의 공사 끝에 1923년 완공되었다. 동서 너비 120m에 남북 폭이 60m쯤 되는 장방형의 벽돌 건물로 동쪽에 안마당 중정(中庭), 서쪽엔 시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블루홀과 황금의방을 두고, 남동쪽 모퉁이에다 106m 높이의 주탑(柱塔)을 세운 구조이다. ‘시청타워라고 불리는 메인타워의 맨 위는 종루(鍾樓)와 금도금(金鍍金)된 첨탑(尖塔)을 올렸다. 전망대를 겸한 종루까지는 나선형(螺旋形)으로 된 365계단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스톡홀름 시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대라는데도 우린 올라가 볼 수가 없었다. 여행사의 프로그램에도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녀올만한 시간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가이드의 위로가 뒤따른다. 5월부터 9월까지 개방하니 올라가 볼 수는 있지만 통로와 계단이 좁아서 40분마다 유료 입장객 서른 명까지만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에둘러서 말해주는 가이드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청사는 적벽돌을 즐겨 쓰는 북유럽 낭만주의 건축을 기조로 하고, 북구 고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비잔틴과 이슬람, 동양풍 장식, 아름다운 발코니와 조각상까지 다양한 문화 요소를 아름답게 섞어낸 절충식 건물이다. 영국 시인 예이츠가 이탈리아 도시들의 르네상스적 흥분 이래 거기에 견줄만한 건축물은 없었다.’고 찬미했을 정도이니 가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설계자 외스트베리는 베네치아 두칼레궁산마르코광장 종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는데 작년에 보았던 두칼레궁이나 종탑과는 하나도 닮은 것 같지가 않다.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말이다.



안으로 들어서서 조금만 더 걸으면 시청의 메인 홀(mein hall)블루 홀(Bl? hallenm, Blue Hall)?이 나온다. 그곳에 청사를 안내해주는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가이드가 안내하는 투어만 가능하다고 한다. 혼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예약은 기본이고 인원도 열 명 이상의 단체가 필수인데, 개인적으로 오면 다른 팀에 끼어 움직여야 하는 불편쯤은 감수해만 한다. 가이드의 설명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에게는 자체 가이드의 통역이 뒤따른다. 아무튼 홀은 엄청나게 넓다 아예 실내 광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남북 길이 50m에 동서 너비 30m, 그리고 천장의 높이는 22m에 달한단다. 바닥 넓이가 무려 15(3백 평)에 달한다니 대체 얼마나 넓은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이름은 블루홀이지만 색깔은 푸른빛이 아니다. 원래는 벽돌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다 파란 칠을 해서 스톡홀름의 푸른 호수를 상징하려고 했었는데, 설계자인 외스트베리가 벽돌 벽을 보고 나서는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해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홀의 남서쪽에 나있는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오른다. 블루홀에서 만찬을 즐긴 참석자들도 이렇게 올라와 발코니 북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 황금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다음 행사인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처음으로 도착한 방은 시 의회가 열리는 의사당(議事堂)이다. 그런데 상상 외로 규모가 작다. 크고 으리으리하던 국내의 지자체 의사당을 몇 군데 돌아본 나로서는 의외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검소함을 기본으로 삼는 루터교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의사당은 좁고 긴 공간에 배치했다. 방문객들은 왼쪽 통로를 따라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 의사당의 필수품인 방청석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입구 맞은편 위쪽에 200명쯤 앉을 수 있는 방청석이 마련되어 있다. 또 하나. 의장석 위에 달린 닫집이 눈길을 끈다. 권위의 상징일 것이다. 동양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격자형 벽을 비롯한 가구들은 당대의 유명 디자이너였던 카를 말름스텐(Malmsten 1888~1972)?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사당의 천장이 예술이다. ?높이가 19m나 되는 천장의 구조물인 트러스(truss)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네 전통가옥으로 치면 들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천정은 바이킹 배를 뒤집어놓은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이런 모든 결정 역시 설계자인 외스트베리의 발상이란다. 천장에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바이킹 전통 문양이란다. 옆방으로 이동하기 전에 하나 더 알고 넘어가자. 스톡홀름 시의회의 정원은 101명이다. 원래는 100명 이었으나 투표 때 가부(可否) 동수가 자주 생겨 이를 막기 위해 1명을 추가했단다. 또 하나, 회의는 3주에 한 번씩 월요일 오후에 열리는데, 의원들의 보수(報酬)는 없고 그저 교통비 같은 실비(實費)만 제공될 따름이란다. 다들 생업에 종사하면서 시민들을 위한 일에 자원봉사 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긴 이런 무보수 봉사는 선진국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랐으니 이런 좋은 점들은 스스로 따랐으면 좋겠다.



다음은 정면 남쪽 복도를 따라 만들어진 왕자갤러리이다. ’오스카르 2(Oscar II, 1829-1907)‘의 막내아들이자 구스타프 5(Gustav V, 1858-1950)‘의 동생으로 화가였던 유셴(Eugen, 1865-1947) 왕자의 프레스코(fresco) 벽화가 동쪽 벽을 따라 길게 붙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시청을 짓던 1917년부터 왕자가 이곳에 와서 호수 건너의 소데르말름섬과 남동쪽 리다르홀멘섬의 풍경을 벽에 그려 넣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벽화가 걸린 공간과 나무 바닥이 깔린 복도의 경계를 따라 줄지어선 열다섯 쌍의 열주(列柱)가 멋진 홀이다. 햇빛 드는 창가 벽면도 그냥 두지 않았다. 예술성이 있어 보이는 작품들을 부조(浮彫)로 새겨 넣었다.



시청사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황금의 방(Golden Hall)‘이다. 길이 44m의 장방형 홀인데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란다. 그래서 처음에는 만찬장으로 사용되다가 연회의 참석자가 1천명을 넘기면서 만찬은 블루홀로 옮겼고, 이곳에서는 만찬 후의 무도회장으로만 사용된단다. 정면의 벽에 그려진 여신은 멜라렌호와 스톡홀름의 수호 여신인 멜라렌호의 여왕(M?lardrottning)‘이다.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였던 ?에이나르 포르세트?(Einar Forseth 1892-1988)‘가 그렸는데, 여신의 큰 눈과 입은 세상을 살피고 바르게 말하는 의미이고?, 뱀 모양의 머리카락은 ?멜라렌호의 파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왼손에 든 왕관은 여신이 내준 스톡홀름을, 그리고 오른손의 홀()은 권위를 상징한단다.



벽은 물론이고 창문 주변까지 빈틈없이 금빛 모자이크가 들어차 있다. 아니 금빛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일일이 금박을 입힌 유리조각 1900만개로 만들었는데, 순금이라 할 수 있는 23.5K 금박이 11kg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아무튼 가이드의 설명은 꽤나 길게 이어진다. 그만큼 자랑할 게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녀가 가장 장황하게 늘어놓은 부분은 그림 안에 들어있는 상징물들 이었다. 여신이 옷으로 감싸 무릎 위에 얹은 건물은 스톡홀름 시청이라고 했고, 여신의 왼쪽 아래에 그려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 마천루 등은 서양을, 그리고 오른편에 보이는 코끼리나 낙타, 터키 국기 등은 동양을 각각 상징한단다. 따라서 스웨덴이 동서양의 중심에서 화합을 이끌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이동 중에는 만찬장의 테이블 차림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그릇과 접시는 하얀 본차이나를 기본으로 하고 포크와 나이프는 순은(純銀)인데, 생선나이프만 금도금(金鍍金)을 했다. 식탁에는 노벨 기념주화로 보이는 금화도 놓여있다. 아무튼 세 시간 정도 이어지는 만찬에는 식기와 컵, 커틀러리(cutlery)를 차리는 데만 160만 달러, 우리나라 화폐로는 18억 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감이 안 잡히는 숫자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웃고 넘어가는 얘기 하나. 만찬 한 번 치를 때마다 커피스푼이 100개 가깝게 없어진다고 한다. 참석자들이 왔다갔다는 기념품으로 몰래 챙겨가기 때문이란다. 혹시 내가 연회에 참석했었다면 나 또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게 뻔하다.



각종 메달들도 전시되어 있다. 새겨진 얼굴들이 거의 비슷한 걸 보면 노벨상 시상과 관련된 메달들이 아닐까 싶다.



청사 밖으로 나오면 바로 멜라렌 호반에 접해있는 잔디밭이다. 시원한 그늘 쪽에 벤치가 놓여있으니 잠깐의 짬을 내어 쉬었다 가면 어떨까 싶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남쪽(아래 사진의 스웨덴 국기 뒤쪽)으로 보이는 리다르홀멘(Riddarholmen)? '기사(귀족)의 섬'이라는 뜻이다. 구스타프 왕가와 왕족을 비롯한 스톡홀름 귀족들이 살던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은 섬엔 왕족, 귀족들의 옛 궁과 저택이 있었으나 1697년 대화재 때 트레 크로노르(세 왕관)성이 타버린 뒤로는 관공서, 법원, 국립도서관, 상인들의 사무실이 들어섰다고 한다.



코너를 돌자 황금빛의 관이 하나 모셔져 있다. ’비르예르 알 왕(Birger Jarl, 재위 1250~1266)‘의 황금관이란다. 그는 멜라렌(Maelaren)호와 발트 해가 만나는 지점에 떠있는 작은 섬(Gamla stan)에 성채(城砦)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섬 주위에는 통나무(Stock)로 목책을 친 다음 섬 양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수문으로 막아 선박의 입출항을 감시 통제했다. 스톡홀름의 시작이며, 그가 스톡홀름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또한 그는 법률을 정비함으로써 최초의 중앙집권형 왕국도 탄생시켰다. 그런 그가 왜 저런 곳에 누워있는지 모르겠다.



스톡홀름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바사박물관(The Vasa Museum)‘이다. ’구스타브 2(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8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Vasa) ()‘가 전시된 곳으로, 스톡홀름의 스칸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침몰된 이후 1956년에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침몰한 지 333년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다. 1962년 임시 박물관이 문을 열어 이곳에서 1979년까지 보호액을 뿌리는 작업이 계속되다가, 1988년 반 정도 완성된 새로운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1990년 정식으로 바사박물관이 개관되었다. 박물관은 누드 콘크리트로 골조와 벽을 세우고 지붕엔 구리판을 씌웠다. 윗부분 측면은 어두운 색으로 칠한 나무 패널(panel)을 붙였다. 전체적으로는 바사호를 추상화한 형상에다 돛을 세움으로써 배의 모양을 더 확실히 나타내려 했다.?



안으로 들면 바사호의 위용(威容)에 주눅부터 든다. 7층 정도의 높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을 바사호 한 척이 온통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돛대까지의 높이가 52.5m이며 함체 높이만 해도 19.3m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단다. 선체 길이는 47.5m, 뱃머리의 사자상이 내민 보우스피리트까지 합칠 경우엔 무려 69m에 이른단다. 전시된 바사호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바사호 발견 당시 해저탐색에 사용된 잠수복, 배 안에서 발견된 보석상자 등도 전시돼 있다. 4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의 각 층에서는 바사의 준공과 취항, 침몰, 인양의 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17세기 선박인 바사(Vasa) 는 원형의 95% 이상이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 배는 구스타브 2(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된 호화 전함이다. 총길이 69m, 최대 폭 11.7m, 높이 52.2m, 배수량 1210t, 적재 대포 64, 탑승 가능인원은 450명이었다. 1628810일 스웨덴의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스톡홀름 항에서 폴란드로 첫 항해에 나섰지만 불과 30분 만에 침몰해버리고 만다. 애초 계획보다 많은 대포와 포탄을 배에 싣는 바람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돌풍에 가라앉고만 것이다. 1956년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된 바사 호는 침몰 이후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됐다. 전함에서는 14000개 이상의 목조품과 700여 개의 조각상, 선원들의 유골과 유품들이 함께 발견됐다. 이 선박의 유물은 17세기 조선술 연구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박물관 내부는 배를 가운데다 놓고 지하까지 포함해 총 여섯 개 층에 빙 둘러 복도를 내어 관람 공간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배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만일 아래층에서부터 빙빙 돌면서 위로 올라갈 경우에는 배의 전모(全貌)를 빠짐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배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 가까이서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실물을 10분의 1로 축소했다는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실물에는 없는 돛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뱃머리, 꼬리, 뱃전의 조각상과 장식들을 원래 색깔대로 복원해 바사호의 당시 모습이 어땠는지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일반의 범선(帆船)도 전시하고 있다. 가이드는 뭔가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다른 것에 신경을 쏟다보니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무튼 박물관은 거대한 선박의 본체와 아름다운 선미의 조각, 선원들의 옷가지와 물품 등과 더불어 당시 선박의 구조와 선원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미니어처까지 세심하게 진열해 놓았다. '30년 전쟁' 때 발틱 해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 바사 호는 당시에는 적들을 하나도 죽이지 못했지만, 수백 년 뒤에는 세계의 여행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배의 선실을 실물크기로 복원해 선원들의 당시 생활상은 물론이고, 대포 등 무기들의 사용 방법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 그런가하면 배의 단면도(斷面圖)를 만들어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의 유골을 복원하고 그 유골의 흉상을 제작해 전시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당시 사람들의 외모와 의상과 심지어는 그들의 소지품까지 전시해 놓았고 배를 만드는 과정과 당시의 채색이나 장식들에 대한 자료들도 전시를 해 놓았는데 배를 칠했던 도료들과 조각들과 카펫까지 모두 전시했다. 화려한 색채와 조형성이 강조된 부조들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중세의 궁전을 닮은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바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노르디스카(Nordiska)박물관이라는데 여행사의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대신 그 내력이나 소개해 볼까 한다. ’노르디스카를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북방민족이라는 뜻이니 북방민족 박물관이라 부르면 되겠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민속박물관이란다. 박물관은 건축가 이삭 구스타프 클라손(Isak Gustaf Clason)‘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1907년에 개관했는데 전시분야는 인형의 집(Doll’s House), 테이블 세팅(Table Settings), 스웨덴 민속예술(Swedish Folk Art), 장남감(Toys), 인테리어(Interiors), 패션의 힘(Power of Fashion), 전통(Traditions), 섬유갤러리(Textile Gallery), 스웨덴 가정(Swedish Homes) 등이란다.



바사박물관을 빠져나오면서 스톡홀름 관광도 끝을 맺는다. 이어서 길고 긴 버스여행이 시작된다. 노르웨이와의 접경지역 근처에 있는 아르장(Arjang)’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400Km 정도 떨어진 아르장까지는 고속도로가 뚫려있다. 스웨덴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와 같은 110Km이다. 하지만 그건 말 뿐이다. 편도 2차선과 4차선이 번갈아 나타나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차량이 드문데도 불구하고 제 속도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울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이 지겨워지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호수들이 나타난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호수들이다. 스웨덴 전 국토에 21,500여 개의 호수가 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룻밤을 머무른 베스트 웨스턴 호텔 아르장(Best Western Hotel Arjang), 아르장(Arjang)은 노르웨이와의 접경지역 부근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읍() 정도의 크기인데 생각보다 호텔은 괜찮았다. 4층이라 규모도 제법 컸을 뿐만 아니라 내부시설도 깔끔했다. 제공되는 식사 또한 다른 호텔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특히 호텔 내에 볼링장까지 갖추고 있다. 마침 호텔 근처에 엄청나게 큰 슈퍼마켓까지 있으니 캔 맥주 두어 개 사다 놓고 게임을 즐기기에 딱 좋다.



호텔 앞에는 낯선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Arjang trollet‘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trollet‘을 영어로 바꾸면 트롤(troll), 즉 북구(北歐)의 민담이나 동화에 등장하는 요물(妖物)로 사람처럼 생겼으나 그 모습이 흉측하고 행동이 굼뜨며 주로 깊은 숲속이나 산에 산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 괴물은 이곳 아르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물이란 얘기일 것이다. 북유럽 사람들과 트롤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가 보다. 호텔의 앞에다 이런 무서운 조형물까지 스스럼없이 세워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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