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35-40)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로 교회에 박해가 몰아닥친다. 스테파노가
순교한 자리에 있었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포에 앞장선다. 그러나 흩어진 신자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에게 다가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하늘에서 오셨다고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특파원으로 한국에서 일했던 영국의 다니엘 튜더는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관찰한 내용을 담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 책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를 써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커다란 주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마침내 우뚝 서게 한 그 경쟁의 힘이, 오늘날
한국인을 괴롭히는 심리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나라의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수혜를 누리고 있지만, 이제는 그 그늘이 감출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드리워 있습니다. 경쟁의 논리에 따라 밀려난
사람들이 겪는 좌절뿐 아니라 치열한 경쟁에서 버텨 낸 사람들 역시 끊임없이 불안과 긴장을 안고 삽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 우리의 삶을
'기쁨을 잃은 삶'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생생하고 단순한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전 고별 담화에서, 부활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이 마음 깊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위로하셨습니다(요한 16,22 참조).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야말로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실천하는 증언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이러한 참기쁨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위기가 찾아왔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일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두려운 시간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 계기로 바뀝니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쁨을 체험합니다. 세상이 기쁨을 잃고 어두워질 때,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부활의 빛과 기쁨을 증언하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내 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자처하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배가 고픈 것은 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혼의 배가 고픈 것이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르고 일을 하면서도 왜 사는지를 모른다. 왜 사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산다면 아무리 밥을 푸지게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영혼이 채워져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공 자는 “朝聞道(조문도)면 夕死(석사)라도 可矣(가의)니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왜 사는가?’ 이 질문만큼 중차대한 일이 또 있을까?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를 몸소 체험하고 주창한 ‘의미요법(로고테라피)’에서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산다고 말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주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내 삶의 동력이 무엇인가? 하느님인가, 세상인가? 오늘 하루 나를 두고 성찰해 볼 일이다.
“나 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본질적 말씀”에 해당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시적,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는 일반 언어와 구별하기 위해 “본질적 말씀”이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한 의미를 따라 행했기 때문에 영원히 유효하다. 그러니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약속은 죽음보다 강하다. 순간 속에 영원을 담고, 지상에서 천국처럼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늘 하루 영원을 응시하면서 살자. 내 삶의 영원한 목적을 의식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내자.
-조명연신부-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종종 던지지요?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저 역시 이런 질문을 어렸을 때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계속해서 변했습니다. 대통령, 과학자, 경찰관, 소방관, 운동선수, 신부님…….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저의 꿈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변했지요.
대 통령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과학을 싫어하는 제가 과학자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겁이 많은 제가 경찰관이나 소방관 역시 불가능한 꿈이었지요. 또한 운동선수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탁구를 했었지만 너무나 힘들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요. 마지막으로 신부님. 이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때,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꿈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죄 많은 제가 거룩한 사제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래서 갖게 된 꿈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되어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들을 낳아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저의 구체적인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으니까요.
이 사실에 대해 저는 구체적인 계획도 시간이 나면 세우곤 했었습니다. 몇 살에 결혼하고, 몇 명의 아이를 낳을지(지금은 기억나지도 않지만 내 미래의 아이 이름도 미리 지어놓기도 했습니다), 또한 집은 어떤 형태로 지을까도 계획했지요. 그런데 지금 현재 저는 분명히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선생님’과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삶이 아니라, 당연하게 포기했었던 ‘신부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 래에 대한 저의 적중률은 이렇게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적중률 0%라는 어마어마한 확률을 자랑하네요.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적중률은 대부분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래를 잘 맞추지 못한다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져야 할까요? 어쩌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빤히 보이는 나의 미래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빤 히 보이는 미래를 주시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미래를 빤히 볼 수 있다면 지금을 열심히 살까요? 그래서 더욱 더 힘차게 지금이라는 현재를 살라고 미래를 보여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을 봐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00% 적중률을 이루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적 중률 0%를 확률을 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지레짐작하지 마십시오. 대신 100% 적중률을 자랑하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의 적중률에 동참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듣기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안광복). 여행 후유증 성 지순례를 다녀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돌아왔으니 겨우 4일 지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또 어딘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지순례나 여행을 갔을 때에는 집이 그립고,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다시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서 여행 사이트를 둘러보면서 사이버 여행을 떠났네요.
제 안에 방랑벽이 있어서일까요? 하지만 지금의 제 모습을 이러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있을 때에는 그곳이 그립고, 그곳에 있을 때에는 이곳이 그립다.’
그리워할 수 있는 곳, 바로 내가 원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있는 이곳 역시 내가 그리워하며 원하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그립고 좋은 곳을 지향하고 있지만, 이미 그러한 곳에 살고 있는 나는 아닐까요?
가장 좋은 곳에 살고 있는 나를 잊고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를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남의 자리만을 탐내고 욕심내기에 내 자리를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그리운 곳을 향해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습니까? 그런데 지금 내 자리가 바로 그리워할 곳임을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또 떠나고 싶기는 하네요. ㅋㅋㅋ
신앙의 열매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김대열신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요한6,36) ---- 어제 성당 마당에서 자매들과 이야기를 나고 있는데, 한 자매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진다. “신부님, 바람이 왜 부는지 아세요?”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어디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한데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왜 불지요?” 자매는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도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갑자기 떠올랐다고 하며 답변을 준다. “바람은 모습이 없잖아요. 그래서 가만 있으면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주지를 못한데요. 그래서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하네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 예쁜 이야기라 생각했다.
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지는 줄거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 만나를 먹을 수 있었듯이, 당신을 믿게 하는 표징도 보여달라고 예수님께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생각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조상들이 만나를 먹은 다음 보여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고기를 먹고 싶다고 난리를 친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메추리를 내리셨다고 성서는 전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하느님께 대한 반역은 계속된다. 그러면 예수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도 성령강림 체험 이전에는 항상 흔들리는 갈대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신앙이라는 것은 눈과 귀가 있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보고 들었다고 해서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말씀을 걸고 계신지도 모른다. 보고 들어도 쉽게 망각하고 마는 우리의 약한 본성에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산들바람처럼, 때로는 매서운 삭풍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걸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 말씀을, 그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싸움이 될 것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둘러본다면 하느님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알게 된다. 최소한 신앙을 청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실 것이고,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당신을 알려주실 것이라 믿는다
< 인륜은 없다. 모두가 천륜이다. > -전삼용신부- 어느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커녕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키웠습니다. 어느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 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칠’입니다. 윈 스턴 처칠은 어릴 때부터 관계란 것을 단순히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동양에서는 ‘인연’이라 하고 하늘에 맺어준 관계를 ‘천륜’이라 하는데 플레밍과의 만남을 하늘이 내려준 관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평생 생명의 은인을 한 명도 만나기 힘든데,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생명의 빚을 졌다면 천륜이 아니겠습니까? 관계를 내 자신이 만들어간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친구도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셨으니 내 맘대로 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 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당신을 믿는 이들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이들’로 표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셨으니 당신은 그들을 ‘책임지고’ 모두 다시 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원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사리 관계를 맺었다 끊었다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유다를 포기하시지 않았던 것은 그것도 천륜으로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플레밍의 예화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알렉산더 플레밍의 연구실은 매우 열악하고 협소했습니다. 창문의 유리창은 깨져서 바람과 먼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 연구실에서 곰팡이에 대한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깨진 창문을 통해 날아온 곰팡이의 포자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후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곰팡이에 페니실린의 원료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토대로 페니실린을 만들었습니다. 몇 년 후 한 친구가 플레밍의 연구실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연구실에서 페니실린을 만들다니, 만약 자네에게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엄청난 발견들을 했을 텐데.” 플레밍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 열악한 연구실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네. 창틈으로 날아온 먼지가 바로 페니실린의 재료가 됐다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라네.” 그 렇습니다. 내가 안 되는 것이 사람 탓이나 환경 탓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못한 환경에서 더 잘 해 낸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탓을 하니 관계가 좋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 탓을 할 때는 이미 하와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음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부부는 인륜이고, 자녀는 천륜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륜은 없습니다. 모두가 천륜입니다. 하느님이 맡겨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살리려는 의지와 살려는 의지
-김찬선신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어제 신앙의지와 불신의지에 대해서 나눔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살리려는 하느님 의지와 살려는 우리 의지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는 오늘 주님 말씀에서 우리를 살리시려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를 봅니다. 이런 주님의 의지에 대해 살려는 우리의 의지는 어떻습니까? 살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진정 있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을 하면서 우리는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왜냐면 살려는 의지가 어떤 의지인지 숙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산다고 다 사는 게 아닙니다.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저 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죽음의 그림자를 보며 하루하루 두려워 떨며 사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의 삶은 사실 살더라도 사는 거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살려는 의지도 죽지 못해서 살던 사람이 이제 삶의 의욕을 갖게 되었다거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삶의 애착을 갖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살려는 의지는 살리려는 주님의 의지에 부응하는 우리의 살려는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지는 어떤 의지입니까? 첫 째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삶의 의지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려고 하는 의지입니다. 제 주변에 암 투병을 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투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듯 병과 싸우지 말고 친구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병을 향하지 말고 생명을 향해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병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향하고 생명을 얻음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 생명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의지에 부응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살려는 의지입니다. 둘째 이 세상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란 이 세상 삶이 끝나고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 삶이 끝나고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리는 순간, 그 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는 마음을 버리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고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그때부터는 순간에서 영원이 시작되고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이 시작되며 순간에 영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어떤 세계적인 부자가 기자들의 이러한 물음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행운이죠. 두 번째도 행운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행운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행운을 이용할 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부를 축적한다는 것. 이 부자의 말처럼 분명히 행운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에서 성공한 기업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서도 이 말이 입증됩니다. 이 천 명 중에서 계획적으로 노력해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단 25%에 지나지 않았으며, 글쎄 나머지 75%는 우연한 기회에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주어지는 행운으로 성공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행운은 모든 이들에게 크든 작든 어떻게든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행운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성공한 사람과 보통사람의 차이가 구별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신앙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들 모두 넘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은총을 통해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은총을 감사하고 잘 활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적은 은총이 주어졌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빠지고 말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메시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희망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단순히 행운만을 쫓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 행운처럼 보이는 주님의 은총을 잘 이용하는 진실로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는 그녀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불평하는 일은 라디오를 켜는 일과 같다. 나는 라디오를 켤 수도 있고, 켜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늘 켜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2차 세계대전 안에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긍정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그녀의 글을 보면서 행복의 반대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행복의 반대말은 우리가 잘 아는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의 반대말은 바로 ‘불평’이었습니다.
하루를 되돌아보는 순간에 제일 후회되는 것은 사실 이 불평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이 불평을 왜 간직하며 살까요?
이제는 주님의 은총에 불평보다는 감사할 수 있도록, 또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법정).
‘누구나’라는 범주 -엄기선 신부- 하느님의 뜻은 그 외아들 예수를 보고 믿는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 ‘누구나’의 범주 안에 내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서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있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는 내가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려는 내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아는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나’의 범주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남도 있습니다. 함께하고 싶지 않은 남도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남이 있습니다. 내가 조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라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괜찮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하느님께는 자신에 대해 용서를 청하면서, 이웃에게는 무자비함을 드러내는 꼴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이 나에 대해 똑같이 ‘저 사람은 …’ 하면서 하느님 앞에 말씀드리는 꼴입니다. 잃고 싶지 않은 하느님과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싸움이 성체를 앞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배가 항구에 정착하듯 -김찬선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자주 개신교 성경과 같이 봅니다. 그러면 하느님 말씀이 풍요로워집니다. 오늘도 복음 묵상을 하다가 첫 번째 말씀이 이상해서 개신교 성경을 참조하였습니다. 가톨릭 번역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입니다. 개신교 번역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입니다.
우선 떡으로 번역한 것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좀 더 토착화된 느낌이 있습니다. 떡보다 빵을 더 좋아하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주님이 더 맛있게 느껴지고, 찰떡궁합이라는 말 때문일까요,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개신교 번역은 “나는”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가톨릭 번역은 “내가”라고 번역을 한 점입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개신교 번역은 주님께서 생명의 빵이심을 특별히 어디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서술한 것입니다. 이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생명”에 강조점을 두어 읽을 수도 있고, “빵”에 강조점을 두어 읽을 수도 있고, “나”에 강조점을 두어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그런데 가톨릭 번역은 “나”에 강조점을 두는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가톨릭은 왜 “나”를 강조하며 번역을 하였을까요?
어제 복음에서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그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당신이 바로 그 빵이라고 답하십니다. 그런 뜻에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옛 번역은 이것을 더 강조하고 분명히 하느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생명을 얻기 위해 다른 데 가지 말고 당신에게 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란 어디입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어제 석가 탄신일을 맞이하며 옛 생각을 좀 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예수님보다 더 부처님께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한 때는 오쇼 라즈니쉬의 글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노자의 글들은 한 동안 영혼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때 말하자면 저는 외도를 한 셈입니다. 예수님을 놔두고 다른 사람을 찾아 간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 분들에게 머물지 않고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깁니다. 이분들은 다 예수님께로 나를 잘 인도해준 분들이었고, 이렇게 얘기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예수님 안에 이분들이 다 녹아있습니다.
떠돌던 배가 항구에 정착하듯 진작 예수님께 정착하여 사는데 너무 안주하는 것이 이제는 문제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빵집에 왔으면 빵을 먹어야겠지요. 빵으로 배불리고 그 깊은 맛을 음미해야겠지요. 그런데 저는 드디어 빵집을 찾았다고 그저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이 복음도 예수님 가르침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일부를 따온 것이기 때문에 복음관상을 할 것이 아니라 묵상을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먼저 깊게 알아들어야 할 대목은 ‘생명의 빵’?에 대한 언급입니다. 당신 스스로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고, 당신을 믿는 이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인 믿음의 내용과 관련지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대단히 곡해하고 있었고, 우리 또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위험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 심하게 깨져 있고, 경쟁을 통한 줄세우기와 부의 분배의 불균형이 도를 넘은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생명의 빵을 통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어떤 차원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고 자라나는지 잘 살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들이 당신께로 와서 생명의 빵을 먹으며 살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지성과 이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으면서 뛰어넘는 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임을 깊게 알아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신앙생활 하면서 이 말마디를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한 병에 걸리거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혹은 가까운 이를 통해 죽음을 수용해야 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면, 이 대목에 대한 이해는 현실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요즘 제게 인사하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것도 성당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저를 아는 체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금강 생명평화미사에 가서도 깜짝 놀랐습니다. 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신부님, 평화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하면서 지나가시는 겁니다. 또한 새벽 카페에 들어와도 방송의 위력을 알겠습니다. 글쎄 새롭게 가입하시는 분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입하면서 던지는 질문인 “이 카페에 어떻게 오셨어요?”에 대한 답도 대부분이 “평화방송을 보고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평화방송 잘 안 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보시네요. 지난번 새벽 묵상 글에서도 썼듯이, 이번 평화방송 강의는 제게 있어서 정말로 부끄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준비도 부족했고, 내용이나 강의의 진행도 원활하지 못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요. 그래도 위안으로 삼았던 것은 ‘평화방송이니까 본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봤더군요.
얼굴을 들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저의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십니다.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족하다고 했던 그 강의 안에서도 주님께서 분명히 함께 하시지요. 따라서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이며, 엉망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주님을 엉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부끄러워 할 것이 무엇이며, 또한 소심한 자세를 취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제 자신에게 던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신감을 갖고 힘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라고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지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에서 주님을 제외시키면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 역시 주님을 제외시켰기에 부끄러움 속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이처럼 생명의 빵이며 생명의 물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 외적인 것들에 더 큰 믿음을 두는 순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으며, 마지막 날에 주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부족함을 알고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나를 나태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충만함 - 오민환-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충만한 삶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충만함은 어디서 올까요? 내 삶 안에서 언제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충만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내면의 삶이 조화롭게 형성된 성숙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이는 그의 내면이 주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이나 말씀으로 충만해지려 하기보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채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가 있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과 목마르지 않는 샘을 통해 아버지와 일치하여 충만하게 되었듯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매 순간 기도와 성체 조배, 그리고 미사 봉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충만한 샘으로 인도해줍니다.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할 때 우린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해져 내 삶도 풍요롭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만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 강을 건너 -김찬선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지난 주일 하나원에 가서 새터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 중에 한 가지를 아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하나원을 나가면 다단계하는 사람들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제가 대전에 있을 때 많은 새터민들이 이 다단계를 했습니다. 제가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의 말이 얼마나 솔깃했는지 제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는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왜 그랬을까요?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정말 그럴 듯해야겠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금한 과실을 따먹은 것은 좋고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 경험에서도 저를 실족케 한 유혹들은 많은 경우, 입에 달고 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냉큼 삼켜버립니다. 반대로 저를 성장케 하고 병든 저의 영혼을 치유한 것들은 입에 쓰고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마치 입에 쓴 약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들이 얼마나 솔깃합니까? 주님은 우릴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는 분이시랍니다. 이 말만 보면 매우 솔깃한데,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답니다.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리겠다는 것이 문제이고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은 지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기에 문제입니다.
사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지만 당신에게 오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도 하시지 않습니까?
이는 마치 강 건너편에 계시는 주님께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계시는 강 건너편에 가기만 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문제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죽음과 생명의 강입니다. 죽으면 사는 강입니다. 홍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 강을 건너셨습니다. 주님께서 강 건너편에서 손짓을 하십니다. 그러나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가야 한다고 하나 언제 갈지 망설입니다. 마지막 날 살리겠다고 하시는데 그 마지막 날이 언제가 될지 두렵기도 합니다. 아무튼 주님은 오늘 생명 강 건너편에서 손짓을 하십니다.
가시렵니까?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진정 우리를 살맛 나게 만드는 것> "왜 그렇게 식사를 적게 하냐?"는 물음에 저는 농담 삼아 "제가 요즘 워낙 영적으로 살다보니..."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사람을 진정으로 기쁘게 하고 살맛 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산해진미로 잘 차려진 진수성찬만이 결코 아닙니다. 몇 년은 마음놓고 써도 넉넉할 몇 억이나 되는 돈도 결코 행복의 원천이 아닙니다. 사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갈 그때뿐입니다. 육적인 것들은 대체로 잠시 지나가는 것, 언젠가는 우리를 질리게 하고,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게 만듭니다. 진정한 기쁨의 원천은 영적인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이며 초월적인 그 무엇입니다. 비가시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 한번 보십시오. 뭐가 좋은지 혼자서 괜히 벙긋벙긋 웃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그런 아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님들은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니 아무래도 야가 오늘 쫌 이상하네. 니, 미친나?"하고 묻습니다. 한끼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불같이 화를 잘 내곤 했었는데, 이제 아무리 놀려도 그저 웃기만 할 뿐입니다. 바로 사랑의 힘 때문입니다. 오늘 회의 차 지방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정확하게 아이들 야간수업이 끝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복도에서 만난 우리 아이들, 기나긴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어서 무척 피곤할텐데...표정들이 하나같이 밝고 맑았습니다. 저를 둘러싼 몇몇 아이들이 보란듯이 "종합장"을 펼치며 오늘 하루동안 배운 것들을 열심히 자랑했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은 제가 좋아하는 짜장면 곱배기 한 그릇 배부르게 먹은 것 이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침실로 올라가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꼭 안아주면서 세상의 모든 교육자들이 아이들에게 육적인 빵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빵, 예수님을 매일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신앙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점점 영적인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처방전은 "잘 준비된 고해성사"이며 "정성을 다한 영성체"입니다.
얼마 전 본당 교리교사들과 함께 어떤 신부님의 사제관으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들어갔습니다. 그 신부님 방에 가면 아주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신부님은 소위 바리스타(Barista)라고 불려도 될 만큼 전문가더라고요. 직접 생두를 사다가 로스팅을 하고, 커피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기계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커피 냄새가 너무나 좋았고, 직접 커피를 만드는 신부님의 모습이 멋있기도 했습니다. 물론 커피의 맛은 아주 끝내줬지요.
그런데 커피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저인지라, 나도 한번 저렇게 기계를 다 갖추고 전문적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셔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간 교리교사들도 “신부님,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신부님도 이렇게 꾸며서 저희에게 맛있는 커피 좀 만들어주세요.”라고 부추깁니다.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커피 재료, 커피 도구 등등……. 한 시간 정도를 살펴보다가 결국 내린 결론은 그냥 지금처럼 살자는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커피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지극정성을 쏟아서 커피 마실 정도는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냥 자판기 커피를 마셔야 할 때는 자판기 커피를, 믹스커피를 마셔야 할 때는 믹스커피를, 분위기 있는 곳에서 진한 향기를 품은 커피를 마실 때에는 그런 커피도 마실 수 있는 편안한 입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좋은 스피커와 앰프를 통해서 음악을 듣다보니 점점 귀가 고급이 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는 싸구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아예 듣기 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디오를 아예 없애고 나서는 이제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에도 만족하게 됩니다.
나의 수준을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편하게 사는 방법이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을 선호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러한 욕심들로 인해서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편하게 사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갖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욕심은 우리를 편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빵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말이지요. 그대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행복해지지 못한다. 소망을 버리고 목표도 욕망도 없고 행복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세상의 거친 파도는 그대 마음에 미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은 비로소 휴식을 알게 된다.(헤르만 헤세)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개미눈물꽃> 요즘 계속되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강조하고 계십니다. 은혜롭게도 그 생명의 빵은 아직까지도 매일 우리에게 나눠지고 있는데, 그 나눔은 지상에서 우리가 거행할 수 있는 가장 은혜롭고 축복된 성사인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살레시오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는 위대한 청소년 교육자, 일의 성인으로 유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체성사의 성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성인께서 창안한 탁월한 청소년 교육 방법인 ‘예방교육’의 중심에 성체성사를 두었습니다. 그는 매일의 미사를 마치 자신이 이 땅에서 바치는 마지막 미사처럼 아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그 분위기가 얼마나 경건하고 진지했던지 미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현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미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삶을 바꾸었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과 몸 전체, 온 신경과 정신 전체를 다해 정성스럽게 봉헌했던 미사는 성 요한 보스코 자신의 하루는 물론이고 그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하루를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미사에서 받은 은총과 에너지로 고된 하루를 기쁘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계속 우리 손바닥 위로 내려오시는 생명의 빵이신 성체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기적의 원천이 틀림없습니다. 매일 정성껏 영하는 성체는 우리의 흔들리는 삶을 붙들어주는 든든한 지주임이 틀림없습니다. 매일 고통과 시련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만큼 큰 힘과 위로를 주는 성사는 다시 또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내가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방황하고 흔들려도, 나란 존재가 아무리 실망스럽고 부끄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나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나를 향해 미소 짓게 만듭니다. 나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내 삶이 너무나 초라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매일의 성체는 우리의 삶의 질을 한껏 드높입니다. 매일의 성체는 우리의 삶을 성화시키고 새롭게 재창조하십니다. 매일의 성체는 우리 존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오르지 못할 산, 신기루 같은 세상 것에 너무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너무 소중한 나’, 매일 내게 다가오시는 ‘또 다른 하느님이신’ 성체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작은 꽃은 너무나 불행했습니다. 주변의 다른 꽃들은 모두 크고 아름다운데 자기만 작고 초라했으니까요. 작은 꽃은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매일매일 괴로워하다가 힘이 빠져 점점 아래로 쳐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자신보다 훨씬 작고 볼품없는 꽃 한송이가 있었습니다. 그 더 작은 꽃이 작은 꽃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넌 정말 크고 예쁘구나.” 더 작은 꽃의 칭찬에 신이 난 작은 꽃은 한껏 뽐냈습니다. 계속해서 더 작은 꽃이 물었습니다. “내 이름은 개미눈물꽃인데, 네 이름은 뭐니?” 작은 꽃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남들과 비교했을 뿐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 본적도 없었으니까요.
생명의 빵 -정명숙 수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식탁에 놓여 있는 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빵이 되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부서지고 반죽되어 ‘밀’의 본래 모습은 없어지고, 심지어 자기가 원하지 않은 여러 형태로 구워져 나옵니다. 빵을 만드는 사람의 손에 온전히 맡겨지면서 남김없이 다른 이의 것이 됩니다. 빵은 사람에게 먹힐 때 비로소 빵으로서의 소명을 다합니다. 먹히면서 빵으로서의 형태마저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생명이 될 때만이 빵으로서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먹히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면 그 빵은 썩고 맙니다. 예수님 역시 당신 스스로 부서지고 쪼개져서 우리에게 먹히러 오십니다. 우리의 헛된 야망과 계획에, 병든 사고방식에 새 살이 돋아나 건강해지도록 죽음을 통하여 빵이 되어 오십니다. 나에게 먹혀 내 살과 피가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는 나의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빵이 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된 나 역시 사람을 살리고자 먹히는 빵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로서 다른 이에게로 향하는 선물이 됩니다. 선물은 주는 이에게도 받는 이에게도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성체는 행복한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 오정순- 남편과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이 공금을 횡령해 증권에 투자하고 이익금을 챙긴 다음 원금을 갚으려다 들통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결재란에 남편의 도장이 없었다. 마침 교육 중이었다. 날마다 도장 찍는 일에 신경을 쓰라고 당부하는 내 말이 걸려 교육을 받던 중이라고 했다. 우선 책임 있는 사람들이 변제하고 사건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도의적인 책임으로 다른 사람의 절반을 물어냈다. 죄짓고 도망 다니는 사람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인데, 기도하며 지내던 때 놀랍게도 그가 우리 집을 직접 방문했다. 빈털터리였다. 돈을 갚아야 할 사람이 맨몸으로 나타나다니…. 평소에 500원짜리 아이스크림도 내 입에 넣기를 아끼며 모은 돈이라 남편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이미 죄는 저질러졌고 그 돈은 주어야 받는 것이므로 포기했다. 다만 사건을 통해 그 영혼이 구원되기를 나는 빌었다. “갚을 사람이 갚아야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께 의지하십시오. 나를 용서하고 인내로 참아주며 나를 도우신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참회하면 주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훗날 피해 다니다가 그가 잡히는 바람에 사건이 드러나고 우리는 변제한 돈을 돌려받았다. 질서를 벗어난 선택에는 언제나 화가 따르지만 그래도 주님께 가기만 하면 외면하지 않을 것이란 말씀은 항상 열린 문이라 좋다. 받은 것 우선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한 자매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영성적으로 조금은 잘못 나가고 있어 바로잡아 주려고 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단체에 들어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족보다도 주님께서 맺어주신 그 신심단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심단체가 주님께서 맺어주셨다면 남편이나 자녀들 역시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일 텐데 가족을 우선시하지 않고 단체를 더 중요시한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아버지께서 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우리들인데 어떻게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아들에게 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거나 그분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미 우리를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이끄시는 보이지 않는 전초작업이 있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을 때 성유를 두 번 바른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예비자 성유 (구마를 위한 성유)’, 또 세례를 받은 직후 ‘크리스마 성유’를 바릅니다. 이 전통은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기 이전과 이후에 주님께서 성유, 즉 성령님을 통해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세례 받은 후 크리스마 성유로 성령님께서 확실히 오시지만 그리스도를 모를 때조차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활동해 오셨던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성령님께서 악을 물리치고 귀를 열어주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고르넬리오라는 로마 백인대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를 그에게 보내어 요빠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또 다른 환시를 보여주시며 이방인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즉, 하늘에서 보자기 위에 온갖 짐승을 싣고 내려 보내며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율법에 적힌 부정한 짐승들을 먹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이방인들이 찾아올 터이니 주저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정말 고르넬리오가 보낸 이들이 베드로에게 왔고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엔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한 이방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따라가 고르넬리오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족에게 세례를 줍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에 작용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미 활동을 하셔서 교회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믿음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버지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얻은 신앙인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으시는 것이 당신의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더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양을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착한 목자의 모범인 것입니다. 나의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주님께서 나에게 신비한 성령님의 작용을 통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 먼저 지켜나가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를 찾는 것은 오늘 복음의 가르침에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양을 찾는 것보다는 맡겨진 양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듯,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는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더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떤 누구도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고통이라도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기에 예수님과 옆에 매달린 두 도둑의 고통은 같아 보입니다. 이 같은 십자가의 고통이 한 사람에겐 하느님을 저주하여 지옥의 고통이 되었고, 한 사람에겐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보속의 고통이 되었으며, 예수님께는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의 의미를 오늘 복음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즉, 당신 수난의 구체적 상징은 ‘성체’입니다. 밀떡은 밀알이 산산이 부서져서 물과 불에 단련 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도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부순 ‘수난’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지만, 당신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라고 하십니다. 즉, 당신 수난의 성체와 성혈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순종함은 아버지와의 일치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한 순종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한 순종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리에게 생명이 된 것입니다. 부부가 일치하면 새 생명인 자녀가 세상에 태어나듯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통은 생명의 열매를 맺어 다른 이에게도 생명을 전해주는 가치 있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것으로써 당신에게 맡기신 모든 영혼에게 생명을 주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듯이, 우리에게 오는 모든 고통도 하느님께 일치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생명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가치 있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밥투정 -김찬선신부- 제 조카들이 클 때이니 꽤 오래 전의 얘기입니다. 그들이 커서 결혼하고 애들을 낳았으니 말입니다. 아이들은 밥투정을 하고 엄마들은 먹이려고 하여 실랑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제가 보다 못해 “먹기 싫다고 하면 굶기라!”고 한 마디 하면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아이와 엄마의 이상한 싸움의 속내가 들통 났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자기를 위해 먹는 것이고, 안 먹으면 자기 손해인데 마치 엄마를 위해 먹는 것인 양 떼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 어린 아이가 엄마와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를 먹여도 나를 사랑하는지 엄마의 사랑을 테스트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주가를 올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아이가 많이 먹기를 안달하는 엄마의 사랑을 볼모로 놓고 심리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밥투정을 할 때 “먹기 싫으면 그만 둬!”하고 밥상을 치우면 엄마는 그 아이에게 계모가 되고 엄마의 사랑에 대한 아이의 믿음은 심대하게 상처받게 됩니다. 그러니 엄마는 아이의 버릇이 나빠져도 그 놈의 사랑 때문에, 계모가 될 수는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달래서라도 먹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은 꼭 이 형국입니다. 당신을 목말라 하지도 않고 배고파하지도 않는 우리에게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음식인지 깨닫게 하려고 주님은 안달이십니다. 당신을 먹으면 결코 다시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라고 아주 간절히 호소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한탄하시듯 우리는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볼모로 놓고 투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만일 주님께서 정말 당신을 밥으로 안 주시면 어떻게 하지요?
‘롱거버거’ 사는 오하이오 주의 시골 마을에 있는 바구니를 만들어 파는 회사입니다. 그러나 연 매출은 7억 달러나 되는 회사라고 하네요. 물론 처음에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게 시작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키운 사람이 바로 ‘롱거버거’입니다.
그는 소위 가방 끈이 무척 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출신이 아닌 시골 출신으로, 경영학은 물론 강의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또한 그는 머리도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해요.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 성공할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할 의지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면 쉽게 이룰 수 있다.”
그가 가진 재능은 오직 하나, ‘성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누구나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있으면 가능한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을 더욱 더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배경이 너무 좋지 않아. 나는 학력이 너무 좋지 않아. 나는 돈이 너무 없어.’
무일푼 그리고 무학력 출신이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 하나로 연 매출 7억 달러를 올리는 기업주가 된 롱거버거는 말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쉽게 이룰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과연 어떤 모습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군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말솜씨를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실히 수행했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롱거버거의 말을 인용해서 우리에게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도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쉽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열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을 갖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요. 바로 이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욕심 때문입니다.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있는 많은 것들……. 그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들을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소중한 한 표를 꼭 행사합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꽃잎처럼 내려오셨으면> 국회의원 총선거일입니다. 선거철만 가까워오면 어찌 그리 애국자들, 애향심으로 불타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는지 모릅니다. 말대로라면 이제 곧 지상천국이라도 건설 완료될 것처럼 고래고래 외치며 지나다니는 소리에 마음이 찹찹해집니다. 한때 무척이나 존경했던 분들, 그래서 그분들의 승승장구가 내 일처럼 기뻤었는데... 그러나 막상 뛰어든 정치판이란 것이 생각과는 달리 만만치 않았겠지요. 그래도 그 정도들 하셨으면 충분하고도 남는데, 이제 더 이상 기웃거리면 사람만 더 추해지는데, 쇠락이 길이 확연한데, 그래서 이제 제발 빨리 그 판에서 빠져나오셨으면 좋을 텐데... 결국 또 다시 욕심을 못 버리셔서, 아직도 서로 물어뜯고,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그래서 못난이, 찌질이, 쫌생이로 전락한 분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낙화의 때가 다가오면 그것이 하늘의 뜻임을 알기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나무와 작별하는 꽃잎처럼 화려하게 내려오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그간 쌩고생이 많으셨던 분들,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신기루를 쫓던 분들, 이번 가회에 제대로 하느님을 한번 만나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한번 만나 욕망의 길에서 돌아서시길 바랍니다. 올라선다고 그게 행복의 보증수표가 될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결국 평화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평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위쪽보다는 아래쪽에 더 많습니다. 결국 평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지니는 특징은 하느님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인해 행복합니다. 소설가 공지영님은 행복을 이렇게 정의하고 계십니다. “나는 노인정에서 광 팔고 나서 다른 사람들 열심히 화투치는 동안 뜨듯한 바닥에 등 대고 누워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던데.”(‘즐거운 나의 집’, 푸른숲) 행복, 그거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죽기보다 힘들지만, 억지로라도 무거운 짐들을 훌훌 내려놓고 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 사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견고한 성채처럼 대단해 보이는 감투들, 번쩍거리는 유혹들, 사실 다 신기루 같은 것들입니다. 집착으로 인해 흐려진 우리의 눈과 귀가 다시금 회복되길 청합니다. 비워야 다시 채워짐을, 버려야 다시 획득함을, 내려가야 다시 올라감을 항상 기억하길 청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 제일 소중한 것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청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길 바랍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순식간에 사라져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빵임을 잊지 않기를 청합니다. 그 생명의 빵으로 인해 더 이상 방황하지도, 더 이상 힘겨워하지도,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게 되길 청합니다. 우린 주님의 貴賓들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다시 살리는 것을 당신의 소명으로 인식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고 믿기만 하면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하나도 잃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인가요?
스테파노가 죽은 뒤 공동체는 다 흩어집니다. 우리 박해 시대에 교회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마저도 風飛雹散나던 것과 같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유다스 같은 사람도 나왔는데 그런데도 잃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 특히 성부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성자의 의지를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서라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그 사랑과 그 사랑의 의지를 표시하심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 정도는, 그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지나치거나 버려버리는 우리의 그 소홀함과 다릅니다.
얼마 전 편지를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의 귀찮은 편지였습니다. 무진장 바쁜데 이런 편지까지 답장을 해야 하나, 더군다나 요즘 이메일로 편하게 답장을 하는 세상에 편지지에 써서 우표까지 부쳐야하는 답장을 해야 하나,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말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버리지도, 답장하지도 못한 채 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버리는 순간, 저는 그 분을 버리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며 답장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성껏 답장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말 농담이 있지요. 귀빈은 V.I.P, 貴賓이 아니라 귀찮은 빈대라는 농담 말입니다. 하느님께는 하나도 잃지 말아야 할 貴賓이 나에게는 귀찮은 빈대가 되지 않는지 걱정입니다.
<독서> : 박해를 통해서 더 널리 전파되는 복음 - 경규봉 신부-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사이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사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도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박해로 인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키아에까지 이르기까지 널리 복음을 전파했다(11,19).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필립보가 소개되는데,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봉사 중의 한 사람이다(6,5).
그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믿었다. 그는 영적인 불구자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불구자까지 치유하였다. 소외된 불구자들의 쾌유,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은 복음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교회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초창기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5,39)라는 율법학자 가믈리엘의 말처럼 박해를 통하여 교회를 없앨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박해받고 순교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그럴수록 더 널리 전파되고 성장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곳마다 주님의 복음이 두루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많은 이들이 온갖 질병과 악령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박해 속에는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숨겨져 있었다. 당시 초대 교회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1,8)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함으로써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하셨고, 이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하셨던 것이다.
세상에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범죄와 악, 재앙, 온갖 불의와 부정부패 등등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하느님을 믿으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통과 억압을 당하고 죽기까지 한다. 이러한 속에서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울부짖으며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전도 8,1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까지 불의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죄와 악을 통해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라 참고 기다리자. 악을 통해서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 정 호 신부-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으로 나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바라심은 모든 이가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하느님의 뜻을 거절하고, 오히려 거부의 몸짓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찾고자 선택하신 이스라엘, 그 작은 민족마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그들 자신들의 현실과 미래의 축복으로만 여기고, 어떤 다른 것도 그 축복에 방해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을 지키는 제한적인 이기주의로 바꾸고 그분의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업신여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 아니라, 빛을 자신들 안에 가두어버린 굳게 닫혀진 어두운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써 당신 창조의 본모습을 사람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는 사랑이란 단 한 단어로 설명될 만큼 우리에게 이미 익숙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당신이 오신 이유를 생명의 빵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당신을 믿는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구원될 사람들을 한정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이 원하신 것은 모든 이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조차 거부당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처형하는 웃지 못할 살인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들을 선택하셨고 먼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내어주신 하느님을 그들의 이기심으로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이름만이 필요했을 뿐 그분의 사랑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런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문제가 더 극한으로 드러났을 뿐이었습니다. 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 초대교회는 박해에 빠져들고 맙니다. 착하고 어질게 사랑을 말한 스테파노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 박해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느님을 지키려 일으킨 박해였습니다. 후에 바오로 사도가 된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해야 하느님의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박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백성 사랑의 이스라엘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켜야겠다고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들. 그들의 굳은 마음에 마음 편한 지고 지순한 사랑을 찾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신앙만 지키면 우리는 잘 살 수 있고, 영원한 생명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에 세상은 하느님의 이름을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부르면서도 더 힘차게 자신을 닫아가기만 합니다.
우리는 분명 겉으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의 말씀이 사랑인지, 우리의 이익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하신 말씀 말입니다.
똑바로 예수님을 봅시다. 그분은 사랑하라 하셨지, 사랑을 차지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뢰심 -임준기 신부- ‘신뢰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요한 삶의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신뢰심을 잃게 되면 그 사람은 어느 집단에든지 쉽게 소속될 수 없으며, 결국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신뢰심을 얻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체가 바라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은 공동체의 신뢰심을 얻게 되고 또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신뢰심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우선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이웃보다는 내가 먼저, 하느님보다는 돈과 명예가 우선시 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통해 ‘신뢰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나’보다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세상’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 많을 때 서로에 대한 신뢰심은 회복될 것이고, 세상은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더 큰 사랑을 향하여 - 김우정 신부- 어릴 때 성당에 다니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말은 ‘지옥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우리 죄를 낱낱이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가서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신앙을 ‘벌 받지 않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에 대해 소극적이고, 해야 할 의무만 행하는 것으로 축소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당신이 오신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벌하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당신의 말씀처럼 그분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 아버지의 마음 또한 모든 이가 구원에 이르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분은 ‘심판하고 벌하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용서에 머물지 않고 더 사랑하시고, 우리가 죄를 범해도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는 성사 안에서 또 여러 경험을 통해 그분이 우리를 받아들이고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당신 말씀대로 친구이자 형제인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 복수를 다짐하지 않고 사랑을 베푸셨고, 마지막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여러 관계 안에서 수많은 갈등과 미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미워하지 않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상처 받지 않는 선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두를 다시 살리고자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용서를 받고 사랑을 입은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품에 안는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김수빈-
◆“사람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이다. 이 사실을 잊고 몸이 바로 ‘나’라는 착각에 갇혀 있기 때문에 아까운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양식도 바로 그것이다. 그 양식을 받아먹는 방법은 예수께 나아가 그분을 믿는 것이다. 맏는 것은 자기를 내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지난 사순절 특강 때 들은 말씀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의 책에서 발췌했다며 읽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매일 먹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일을 이루어지게 해주시고 저런 일은 해결해 주십사 하는지, 아니면 이럴 때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당신이 기뻐하시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고 싶으냐? 매일 너를 찾아가는 나를 먹는 네가 어째서 영원한 생명을 묻느냐?” 하시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수, 생명의 빵
+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강영구신부-
4월의 천지는 갖가지 꽃과 향기로 가득합니다.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는 연록(軟綠) 잎사귀들을 꽃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펼치고 싱싱한 생명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대지(大地) 깊이 뿌리내리고 수분과 영양을 빨아올립니다. 4월의 찬란한 햇빛과 하느님의 숨결 같은 공기로 숨을 쉬면서 늠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냅니다.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의식주(衣食住)입니다. 의식주(衣食住)는 생존을 위한 바탕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입고 먹으며 어디에 머무는지에 따라서 사는 모습과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호랑이가 풀을 먹고 살 수 없고 양이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호랑이는 고기를, 양은 풀을 먹어야 호랑이다움과 양다움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요한17,14)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인 예수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먹는 사람은 예수와 생명을 나누게 되고 예수를 닮게 됩니다. 예수를 닮는 사람은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고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를 먹고 예수와 하나 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려 합니까? 당신의 오늘 하루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뜻을 따르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양승국신부-
<언제나 제자리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파에 지쳐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 그 자체로 선물이며 기쁨이 되는 복음입니다.
제게는 무엇보다도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유난히 마음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는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에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또한 수도자로서의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저이지만 시시각각으로 겪게 되는 의혹이자 고민거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부끄러운데... 골백번 되풀이해서 노력해도 언제나 제자리인데...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불충실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이토록 나약하여 수시로 흔들리는데... 가녀린 미풍 앞에서도 이렇게 꺼질듯 말듯 흔들리는 데... 언젠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어떻게 그분을 뵙나?’
‘내가 아직도 이토록 심연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데... 끝도 모를 기나긴 어둠의 터널 안에 갇혀있는 데... 과연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서 어떡하나?’
그러나 이런 제게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힘 내거라. 아들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에 나는 너를 다시 살릴 것이다. 네 우유부단함, 네 지독한 결핍,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란다. 오히려 네 부끄러움과 네 측은함, 그것으로 인해 나는 너를 살릴 것이다. 이제 조금만 내게로 방향을 돌리거라. 조금만 내게로 고개를 돌리거라. 방향을 틀어 내 눈에 시선을 맞추는 자, 나를 향해 돌아서는 그 누구라도 나는 결코 그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다시 한번 동터오는 이 새벽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하루는 주님께서 다시 한번 베풀어주신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육을 따라 사는 삶을 접길 바랍니다. 오늘 다시 한번 아버지께로 돌아서는 구원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악과 음행이라는 묵은 누룩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내지 말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냅시다.”(고린토 전서 5장 8절)
스스로 기적이신 예수님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인 35절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이 구절을 반복한 이유는 이 구절이 요한복음 6장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빵' 신학의 키워드(keyword)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이 구절은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주제이며 예수님 자기계시의 코드(code)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하자,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으로서 모든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결국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 된다. 믿음을 가지는 데 굳이 기적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예수님 스스로가 기적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신적(神的) 계시(啓示)이며, 이 계시가 바로 기적인 것이다. 누구든지 이 기적을 '본다'면 '믿음' 안에 안주하게 된다.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봄'은 '눈먼 것'과 같은 것이며, 나아가 '죄'가 될 수도 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그러므로 기적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이 생명의 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향정립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불신을 지적하신다.(36절) 이 불신(不信)은 당장 이 자리(가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이 드러낸 불신이라기보다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의미한다. 유다인들이 믿음의 조건으로 기적을 요구한다면, 이미 충분한 기적이 전제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신 기적(표징)은 여럿 있었다.
실제적 상황으로 보도된 기적사화는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2,1-11), 고관아들을 치유한 기적(4,46-54), 베짜타 못가에서 행하신 중풍병자의 치유기적(5,1-18), 그리고 6장의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 외에도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다.(2,23 / 단순설명 형식의 보도) 이렇게 열거한 기적사화의 보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각각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됨을 알 수 있다.(6장 제외)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만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믿게 되었다' 라는 표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2,11)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2,22)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2,23)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4,39)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4,41)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8,30)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10,42) "마리아를 찾아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11,45)
이에 비하여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이나 가르침의 말씀 끝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믿게 되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다음 사건보도로 옮겨가거나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기록이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가?"(마태 8,27),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마태 15,31; 마르 2,12; 루가 6,26),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26; 마르 1,28; 루가 4,14),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루가 7,16)는 등의 표현이며, 때로는 놀라움, 두려움, 기뻐함, 따라 나섬 등의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예수께서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36절)고 하셨는데, 요한 6장의 앞서간 구절들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당신께 대한 사람들의 불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은 없다. 물론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짜타 못가에 있던 38년 짜리 중풍병자를 고쳐준 일 때문에 유다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는 대목은 있다.(5,1-16) 그러나 그 때는 유다의 예루살렘이고 여기는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불신은 예수께 대한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이라는 것이다.
사실 빵의 기적 직후에 사람들이 예수를 두고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6,14)고 하였고, 억지로라도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면(6,15), 이 표현은 간접적인 믿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메시아 왕'으로서의 예수를 원하고 육적 양식으로서의 빵 맛을 보았기에 예수를 추종할 수도 있다. 동시에 사람들의 기대와 추종이 예수의 원의(願意)에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불신자로 매도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 주위의 군중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대별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거꾸로 아들에게 맡겨진 사람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예수께 올 것이며, 예수께 오는 사람 결코 외면 당하지 않고(37절), 예수께서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려서(39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40절)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점은 '아들에게 맡겨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동적인 불신자(不信者)들로서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거꾸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사람' 대열에 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비록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지적하시지만, 앞서 요한복음의 '믿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기록들에서 보았듯이, 매번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과 말씀을 통하여 신자(信者)를 얻으셨다.
그러므로 '믿는 행위'와 '아들에게 맡겨짐'은 동시(同時)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이며, 이들을 예수께서는 지켜주시고 '생명의 빵'으로 길러주시어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다.........◆ -유광수 신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당신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슨 뜻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내 뜻이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 뜻이라고 많은 말을 했고 또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내 뜻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뜻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내가 태어나게 되었을 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기 위해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이다.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것은 정말 아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아는 분은 오직 한 분 즉 나를 창조하신 분,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만이 안다. 나는 내 뜻에 의해 태어 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이 무엇인지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나의 성소요, 찾은 그 뜻을 사는 것이 나의 성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의 뜻만을 고집하며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펼쳐야할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경우가 많이 있다.
나의 뜻이라고 고집할 때 대부분의 경우 나의 욕망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즉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나의 뜻일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살리는 일이요, 그 일은 아들을 보고 믿게 하는 일이다.
유다인들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표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활 시기 동안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 밥으로 오신 예수님 † -두올묵상팀- 지금은 먹거리가 다양해지고 다이어트 때문에 밥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자란 60년대만 하더라도 '밥'이란 참으로 귀한 것이었고 생존 그 자체였다. 오죽했으면 '밥 먹었느냐?'라는 말이 인사말이 되었을까? 지금도 북쪽에서는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정책목표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또한,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 가운데서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이나 결식아동들, 종교단체의 급식봉사 장소에 모여드는 행려병자들에게는 한끼의 밥이란 생존을 위한 절실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밥의 종류를 보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가 반영된 탓인지 순수한 쌀밥으로부터 콩, 팥, 보리, 수수 등과 섞어먹는 잡곡밥, 만드는 방법에 따라 비빔밥, 볶음밥 등 뿐 아니라 중국식이나 일식에서 발전된 잡탕밥, 짜장밥, 초밥, 회덮밥 등, 그리고 떡, 빵....등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다.
유목인들에게는 빵(밀가루로 빚은 떡모양)이 주식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밥이 주식이다. 요즘이야 제과점이 많아서 빵이 흔하지만, 옛날에는 빵대신 떡이나 주먹밥이 일반적이다. 그런 떡이나 밥이 우리사회에서는 사랑의 표현으로 상징되기도 했다. 아침 인사가 '밤 먹능교?'에서 부턱 시작하여 하루종일 밥에 대한 인사가 지금도 일반적이다. 그리고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들은 먼길 떠나는 자식에게 반드시 '따뜻한 밥 한끼'를 지어 먹이시는 것과 길을 가다가 배 고플때 먹으라고 주먹밥을 몇개 싸주시는 것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다. 남북이산가족이 만난 현장에서 아흔살의 어머니는 일흔살의 북쪽 아들에게 손수 '밥 한끼' 못해 먹인 것을 아쉬워한다. '밥은 제대로 챙겨먹느냐?'라는 것은 떨어져있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안부를 묻는 말로서 사랑하는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이다.
반면, 떡은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옛날에 무인(武人)들은 서울 남산 밑에서 살고, 북촌에는 고관과 부자들이 살았는데 무인은 구차하고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탓으로, 이를 달래느라 술을 빚어 마셨고, 북촌의 고관이나 부자들은 삶이 넉넉하여 떡(빵)을 빚어 먹었다함.--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살림이 넉넉한 가정에서 관혼상제나 명절, 생일, 회갑등 잔치에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다.
떡의 종류를 보더라도 경단, 송편, 꿀편, 삼색편, 인절미, 전병, 절편...등등. 맛과 멋을 한껏 낸 다양한 떡들은 부유한 자의 잔치용 음식이거나 기호식품이었다. (물론, 개떡이나 감자떡 같은 서민용 떡도 일부 있지만 그것은 모자라는 밥의 대용식임.)
내가 살던 고향마을에서는 가을이면 산소 앞에서 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시제(時祭)를 지내곤 하였는데, 요즘처럼 다양한 가공식품과 간식거리가 없었던 60년대 산골 아이들에게는 이 때야 말로 입을 즐겁게 할 절호의 찬스였다. 시제가 끝나기를 기다려 아이들이 길다랗게 줄을 늘어서서 콧물로 더러워진 손을 내밀면 어른들은 인절미를 하나씩 나눠주곤 했는데 달콤한 콩고물이 묻어나는 그때의 떡 맛이란!...그리고 군대시절 외출이나 휴가를 나오면 단밭빵을 먹는 기분이란.......그런 떡이나 빵이 영원히 준비되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하면 언제든지 배고프지 않을 밥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오늘복음의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라고 예수님이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계신다. 영어성경에서는 'the bread of life'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개신교측에서는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영어의 bread와 생김새가 비슷한 '떡'으로 번역했다. 빵(bread)과 떡은 외양은 비슷하지만 문화적 컨텍스트가 다르다. 유목문화권에서 빵은 주식이지만 우리의 떡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먹는 주식이라고 볼 수 없고 기호식품에 가깝다. 번역을 '문화적 조옮김'이라고 본다면 '빵이나 떡'이라는 번역보다는 당연히 우리말의 '밥'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 나았을턴데...서양문화 중심으로 성경을 번역하다보니 그들의 주식인 빵으로 번역한가 봅니다. 예수님이 한국에서 살으셨으면 아마도 '밥'이라고 했을 것인데, 그지요...
예수님은 밥으로 오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밥집(베들레헴=빵집)'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말 '밥그릇(구유)'에 태어나시고 기꺼이 우리의 '먹거리'로 오신 예수님!
우리의 입으로 들어와 먹히고 씹혀서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해주는 밥처럼, 어제도 먹고 오늘 아침도 먹었지만 또 먹지 않으면 배고파지는 밥처럼,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영혼의 먹거리 되시고자 스스로 자신을 내어 놓으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밥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격제한을 두지 않고 누구든지 초청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통탄하신다. 또 미사에서 빵을 영하면서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신앙 현주소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제 어제에 이어 오늘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빵잔치의 참의미를 설명하고 계신다. 먼저 기도로 준비하고, 푸짐한 은총의 선물도 준비를 하셨다. 그러나 꼭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3개 있다.
첫째, 생명의 밥(빵), 즉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이 준비하는 잔치에서는 술과 밥으로 배불리 먹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는 단순한 육의 빵만 먹여 보내시질 않는다. 생명인 진리의 빵을 먹여 보내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곧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먹어야(영해야) 만이 인생의 영적 기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시카르 여인은 남편 다섯을 거느려 보았으나 인생의 갈증을 해갈하지를 못했다.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서 말씀을 듣는 순간 물동이를 내동댕이치고는 마을로 들어가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된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생명의 빵, 즉 말씀을 매일 들으면서도 물동이를 내동댕이 친적이 있는지???
둘째, 구원의 감격하는 마음이다. 생명의 빵을 먹은 자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진한 감격을 느껴야 한다. 비록 내가 처한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성체를 영한 자들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받고 돌아가야 한다. 엠마오의 글레오파 일행이 진한 감동을 느껴서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달려가듯이 말입니다. 감격, 즉 진한 감동은 왜 나오는가? 주님은 말씀에 의하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요14,27)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 물질적이고, 말초적인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영적인 것까지, 그리고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과 희열까지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빵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새로 태어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얼굴에 함박 웃음과 미소를 안고 엠마오의 제자들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영적 풍요이다. 예수님의 밥, 생명의 밥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마신 자들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누릴 수 없는 영적 풍요로움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이후로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영적인 갈증이 일어나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빵 잔치에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두번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하는 실증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이와같이 생명의 밥잔치에서 새로 태어나는 자들은 지속적으로 영적인 공급을 받아서 다시는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게 스스로 근신하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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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