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밖숲, 오래된 왕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성주읍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먼저 달라졌다. 한여름의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숲 안에는 오래 묵은 그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굵은 왕버들 줄기는 세월을 등에 지고 서 있었고, 가지들은 서로의 어깨를 건드리듯 허공에서 얽혀 있었다. 나무 아래로 들어서는 순간 문득 시간이 느려지는 듯했다. 성주 성밖숲은 그렇게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 숲이었다.
이름부터 정겹다. ‘성밖숲’. 화려한 이름도 아니고 거창한 수식도 없다. 말 그대로 옛 성주의 읍성 밖에 있던 숲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조선시대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조성된 숲으로 전해지며,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왔다. 지금은 성벽의 흔적보다 숲의 시간이 더 짙게 남아 있다. 성 안과 성 밖을 구분하던 경계는 사라졌지만 나무들은 그 자리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숲의 주인공은 단연 왕버들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성밖숲의 왕버들 노거수들은 한 그루 한 그루가 살아 있는 역사책 같다. 어떤 나무는 몸통이 갈라지고, 어떤 나무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느라 허리를 낮추었다. 반듯하게 자란 나무보다 굽고 뒤틀린 나무가 더 눈길을 끈다. 상처 난 줄기에서 다시 가지를 내고, 속이 비어 가면서도 해마다 푸른 잎을 피워 낸다.
오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왕버들을 바라보다 보면 오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많은 날을 견디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바람에 가지 하나를 내어 주기도 하고, 벼락과 병충해의 흔적을 몸에 새기면서도 다시 잎을 내는 것. 상처를 감추는 대신 그대로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오래된 나무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사람도 그렇다. 세월이 깊어질수록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흠집과 굴곡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조금씩 단단해진다.
왕버들 아래에는 사람들이 머문다. 천천히 산책하는 이가 있고,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있다. 아이들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걸음을 늦춘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지만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숲을 바라본다. 신기하게도 이곳에서는 가만히 있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 나무가 먼저 침묵의 자리를 내어 주기 때문이다.
여름의 성밖숲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보랏빛 맥문동이다. 왕버들의 짙은 초록 아래 작은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피어나면 숲은 또 하나의 계절을 펼쳐 놓는다. 낮은 곳에서는 보랏빛 꽃이 일렁이고 높은 곳에서는 왕버들 잎이 바람을 흔든다. 수백 년을 살아온 거목과 한철 피었다 지는 작은 꽃이 한 화면 안에서 만난다. 크고 작은 생명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자리를 나누는 풍경이다.
맥문동은 자신이 작다고 왕버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왕버들 또한 자신이 크다고 작은 꽃을 내려다보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나무의 높이에서 계절을 살아가고 꽃은 꽃의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을 피워 낸다. 자연에는 서열보다 공존이 먼저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모두가 똑같아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숲길을 조금 더 걷자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발길을 붙잡았다. 몸통 한가운데 깊은 상처가 있었지만 가지 끝에는 싱싱한 잎이 무성했다. 사람의 눈에는 상처가 먼저 보이는데 나무는 그 상처 위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삶에서도 상처 없는 사람을 찾기보다 상처를 안고도 푸른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밖숲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살아왔다. 숲은 마을의 바람을 막고 물길을 다스리는 역할을 했으며 사람들에게 그늘과 쉼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숲이 사람에게 준 것은 실용적인 혜택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공동체의 기억이 쌓여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오고, 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다음 세대가 숲으로 들어온다. 사람은 바뀌지만 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맞는다.
그래서 오래된 숲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한 지역이 살아온 시간을 품은 기억의 창고다. 건물은 허물고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수백 년 된 나무의 시간은 다시 만들 수 없다. 왕버들 한 그루에는 우리가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계절이 들어 있다.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장터를 오가던 발걸음과 아이들의 재잘거림까지 나이테 어딘가에 스며 있을 것만 같다.
잠시 왕버들 아래에 앉았다. 잎 사이로 햇빛이 잘게 부서져 내려왔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몸을 비비며 작은 소리를 냈다.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멀어지고 숲의 숨결만 가까워졌다. 그 순간 여행이란 멀리 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시간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속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도 여행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자라고 너무 빨리 결과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왕버들의 시간에는 지름길이 없다. 봄이면 잎을 내고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잎을 떨구며 겨울이면 빈 가지로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한 해씩 살아낸 시간이 쌓여 거목이 되었다. 성밖숲에서 만난 나무들은 말없이 알려 준다. 깊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서두르지 않아도 삶은 제 속도로 나이테를 만든다고.
숲을 빠져나오기 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왕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오고 가도 붙잡지 않고, 계절이 바뀌어도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그늘을 필요한 이에게 조용히 내어 줄 뿐이다. 어쩌면 오래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가지는 일이 아니라 더 넓은 그늘을 내어 주는 일이 아닐까.
성밖숲을 나서는 발걸음에는 들어올 때와 다른 무엇이 묻어 있었다. 왕버들의 푸른 그늘과 맥문동의 보랏빛, 오래된 나무껍질을 스치던 바람의 감촉이 마음속에 남았다. 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낡게 만드는 것 같지만 어떤 것은 오래될수록 깊어진다. 나무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수백 번의 봄과 겨울을 지나면서도 다시 잎을 내는 왕버들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푸르러질 계절은 남아 있다. 성밖숲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왕버들을 바라본다. 오래된 나무는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늘 한 자락을 내어 주며, 삶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얼마나 깊은 그늘을 남기느냐에 달려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