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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신가요? 복수의 하나님이신가요?
당연히 ‘용서의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고, 단 한순간이라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늘 '용서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두 번 연속으로 부르는 유일한 곳이 있습니다. 시편 94편입니다. 우리에게 굉장히 도전적인 시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질문을 던져 주는 깊고 의미 있는 시입니다.
시편 94편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시편94:1~7)
여기까지가 시편 94편의 제1문단입니다. 총 23절로 이루어진 이 시는 1절부터 7절, 8절부터 15절, 16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이렇게 세 개의 문단으로 주제와 사상이 구분되면서 전개됩니다.
보시는 대로 94편 1절부터 7절은 하나님을 향해 1절, 3절, 5절에서 연이어 세 번이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다가 8절부터 1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거절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말입니다. 8절에서 "백성 중에 어리석은 자들아"라고 대상을 바꾸어 부르며 15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다 16절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시작됩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꼬?"라는 일종의 의문문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탄원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마지막 절까지 이어집니다. 정리하면 1절부터 7절은 여호와를 부르며 드리는 기도, 8절부터 15절은 여호와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선언하는 내용, 16절부터 23절은 시인의 신앙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 내용은 1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시편 94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갈립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어떻게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하나님의 복수'라는 개념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바로 나옵니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즉, 1절의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2절의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 심판의 사역을 '복수'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복수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복수는 철저히 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억울한 감정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것이 인간의 복수입니다. 되로 받고 말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악인의 고정대사가 이것입니다. “나는 받은 은혜를 갚지 않고는 못베기거든...”
옛날 무협영화에서 흔히 보듯, 어린아이가 마루 밑에 숨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칼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자라나, 도사를 만나 무술을 배운 뒤 "아버지의 원수, 내 칼을 받아라" 하며 앙갚음하는 정서적 한풀이가 인간의 복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수는 2절에 나타나듯 공의로운 '심판'과 직결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대상에 대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2절의 '교만한 자', 4절의 '오만하게 떠드는 자', '자만하는 자'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게에(교만), 아타크(오만), 아마르(자만) 등으로 조금씩 다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자만하나이다'를 '거드름을 피웁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5절, 6절, 7절에는 교만하고 오만하고 자만하여 행하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5절에 보면 주의 백성을 짓밟고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우습게 여기고 괴롭히며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합니다. 6절을 보면 과부, 나그네, 고아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합니다.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연약한 자들을 억압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그들의 본질적인 죄가 드러납니다.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수하신다는 것은 감정적인 보복이 아니라, 무너진 의를 회복하고 모든 것을 바르게 바로잡는 사법적 공의를 뜻합니다. 1절의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는 2절에 비추어 보면 "공의롭게 재판해 주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94편 1절부터 7절의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신약 성경 로마서 12장 19절이 그 답을 줍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공의의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는 평소 삶에서 세 가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여호와께 맡기라고 명령하는 대표적인 세 구절이 있습니다.
첫째, 시편 55편 22절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일상에서 삶의 무게와 고단한 짐을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면, 결국 내 힘으로 원수를 갚으려 들게 됩니다.
둘째, 잠언 16장 3절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과 계획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셋째, 베드로전서 5장 7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염려와 불안을 주께 내어맡겨야 합니다.
일(행사)을 맡기고, 삶의 짐을 맡기고, 내면의 염려를 맡기는 훈련이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억울한 일이나 원수 갚는 일 앞에서도 친히 갚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수 있게 됩니다.
8절부터 시인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보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향해 외칩니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십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뭇 백성을 징벌하시며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잔꾀는 허무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2문단의 핵심은 12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여기서 징벌은 파멸이 아니라 주의 법을 배우게 하시는 교육적 연단, 즉 고난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의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리고 71절의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고백과 일맥상통합니다. 교만과 오만에 빠져 살던 인생이 고난의 징벌을 통해 주의 법도를 깨닫고 바른길로 돌아서는 것이 복입니다.
16절부터 시작되는 제3문단에서 시인은 악인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핵심은 17절부터 19절, 그리고 23절입니다.
17절: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벌써 무덤에 들어갔을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합니다.
18절과 19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두 가지 은혜를 찬양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내가 실족할 때 붙들어 주신 언약적 사랑(헤세드), 그리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할 때 채워 주신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마침내 시인은 22절과 23절에서 모든 심판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내가 불평을 나 자신에게 하면 실망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면 비난이 되지만, 하나님께 쏟아놓으면 기도가 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억울함과 탄식을 사람에게 푸는 대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토해 냄으로써 탄원을 가장 숭고한 신앙고백과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성경의 진정한 복수의 의미는 내가 복수하고 응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가 피를 부르는 끊임없는 악순환의 저주속으로 우리를 던져 넣고야 맙니다. 성경에서의 진정한 복수의 의미를 모든 감정을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참된 복수의 의미를 경험하고 영혼의 자유를 누린 이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코리텐 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잔혹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전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의 일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간수와의 재회’이야기입니다.
라벤스브뤼크의 비극
코리 텐 붐과 그녀의 가족은 네덜란드에서 나치의 박해를 받던 수많은 유대인을 집 벽장 뒤 비밀 공간에 숨겨주며 도왔습니다. 그러나 밀고자의 배신으로 온 가족이 체포되었고, 코리와 그녀의 언니 벳시(Betsie)는 악명 높은 여성 전용 강제 수용소인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짓밟히는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알몸으로 수치스러운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고, 굶주림과 구타, 잔혹한 노역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깊은 신앙으로 코리를 붙들어주던 언니 벳시는 그 잔혹한 환경 속에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정적 착오 덕분에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목숨을 건진 코리는 전쟁이 끝난 후, 유럽 전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절망의 구덩이보다 깊다"는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잔인했던 적과의 마주침
1947년의 어느 날, 코리는 독일 뮌헨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는 위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사람들이 줄을 지어 퇴장하고 있을 때, 회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군중을 헤치며 코리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그 순간 코리의 심장이 얼어붙었습니다.
그는 바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샤워실 앞에서 채찍을 들고 서서, 알몸으로 걸어가는 수감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던 가장 잔인했던 간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언니 벳시가 겪었던 극심한 고통과 수치심, 그리고 그녀의 앙상한 시신이 떠오르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이 치솟았습니다.
내밀어진 손, 불가능한 용서
남자는 코리 앞으로 다가와 모자를 벗고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자매님. 죄가 깊은 바다에 던져진다는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라벤스브뤼크의 간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제 과거의 잔혹한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였던 당신에게도 직접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자매님,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화해를 청하며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리의 손은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나는 온 세상에 용서를 설교했지만, 정작 내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듯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 안에 사랑이 전혀 없습니다."
결단과 성령의 온기
그 순간, 코리의 뇌리에 주님의 말씀이 스쳤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결단)'의 문제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코리는 감정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대신,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비록 마음속에는 여전히 싸늘한 분노와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남자의 내민 손을 향해 뻗었습니다.
그녀가 손을 맞잡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코리는 훗날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전류 같은 온기가 팔을 타고 흘러내려, 그와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 눈물겨울 만큼 벅찬 사랑이 차올라 그 남자를 온전히 덮었습니다. 그것은 내 사랑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코리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쥐고 말했습니다.
"형제님, 내 온 마음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두 사람은 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 아래서 함께 구원받은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코리 텐 붐은 이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깊은 영적 교훈을 남겼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용서하기로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손을 뻗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랑과 치유가 우리의 상처 난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옵니다."
https://youtu.be/H3BT_L43Wrw?list=RDH3BT_L43Wrw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