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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누리자!
계강현 목사 / 창세기 12:1-8
어느 날 하나님이 75세 된 아브람에게 불쑥 찾아오셔서, “네 고향을 떠나라. 내가 복주겠다.” 말씀하셨다. 갈 3:6-7,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우리는 예수 믿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에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 아멘! 그러면 아브람이 받은 복이 무엇이고, 그 복을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함께 받을 수 있을까?
1. 하나님은 아브람을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복을 약속하셨다.
지금부터 약 4,000년 전 죄악이 관영한 세대에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오셨다. 그리고 v1,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말씀하셨다.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우르 제3왕조/ 주전 2500∼1950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성읍이었다. 토지는 비옥하고 주민의 생활은 부유했고, 농업, 공업, 어업의 중심지였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남자 달신(난나르, Nannar)과 여자 달신(닌갈, Ningal)을 섬긴 우상들이 발견했다. 거리와 골목마다 잡신을 섬기는 조그마한 제단들이 즐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전설에 의하면 아브람의 부친 데라가 이런 우상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우상제조업자라고 전해진다. 아브람은 이런 부모 밑에서 우상의 환경 가운데 살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런 아브람을 찾아가셔서 이 우상숭배의 환경과 터전에서 떠나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신 거다.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아브람이 그전에 하나님을 잘 믿었다던가, 착한 사람이라던가, 하나님과 어떤 좋은 관계에 있다던가 하는 어떤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그저 노아의 자식 중에서 셈의 후손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창 11:10ff.) 왜 셈의 후손 중에서도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람을 택하셨을까? 우리는 그 이유도 전혀 모른다! 그저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굳이 찾는다면, 당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셈의 계열의 한 커플을 선택하여 큰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세움으로써 하나님 능력을 보여주시려는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성자 프란체스코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대답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통해서 내 강함과 지혜로움과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바울사도도 고전 1: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고전 15:8,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인간의 선택 기준과 다르다. 아브람이 뭐 잘났거나 순종을 잘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이고 주도적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나? 구원받고 보니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예수 믿고 영생의 복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있다.
그렇게 주권적으로 부르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해주셨다. 복 그러면 부담을 느끼는 분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은 나쁜 게 아니다. 송구영신예배 때 감사헌금하며 기도제목을 써내면 담임목사가 한 해 동안 기도한다. 대게 보면 일상에 관한 소박한 제목이다. 건강, 자녀 학업, 직장과 사업 형통, 사역 충실 등이다. 여러분, 이런 게 복이다! 우리는 그냥 알게 모르게 복을 추구하고 있고, 그렇게 복을 추구하는 게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이런 게 세상 복이기 때문에 이것만 추구하고 하늘 복을 추구하지 않는 게 나쁜 거지, 땅의 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아브람에게 어떤 복을 약속하셨나?
첫째, 자녀가 잘 되는 복이다. v2,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아직 자녀가 없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이 되게 한다는 말은 자녀가 많아지고 잘 되도록 축복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녀교육은 보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가 잘 되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가 잘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잘 되는 복이다. “(and) 너에게 복을 주어서” 우리 자신이 잘 되는 게 뭔가? 요삼 1:2,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이런 거다. 셋째,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유명해진다는 그 자체는 죄도 아니고 나쁜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내 이름을 떨치려 할 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 하나님이 유명하게 해주시고 명성을 날리게 하시는 것은 상관이 없다. 바벨탑 사건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고 하다가 하나님에게 미움을 사서 흩어짐을 당하고 심판받은 거다. 우리가 유명해지고 이름 날리는 것을 포기하고 저 낮은 자리,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섬기면 하나님이 올려주시고 그 이름을 높여주시고 이름을 날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자비하심과 능력을 증명해보여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나아오도록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높여주신다. 그건 복이다. 넷째, 이웃이 잘 되는 복이다. v2b,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예수 믿는 우리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이런 복을 받는다. 자녀가 잘되고 나 자신이 잘될 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 이웃이 잘 되는 것이다. 잘 되는 회사는 그 잘되는 이유 중에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 중에 하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 다섯째, 하나님의 보호의 복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복을 약속하셨다. 보호하셔서 우리가 복을 빌면 복주고 저주하면 저주하신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잘못 건드리면 자기가 손해다. 반대로 예수 믿는 사람 선대하면 복 받는다.
여섯째, 이 복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아브람에게만 해당되는 복인데, v3b,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해 바울사도는 갈 3: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것은 우리 인생이 할 일이 아니고,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축복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그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땅의 복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 하늘복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연합예배에 모일 때마다 다섯 명에게 하늘 복을 비는 게 빌면 그대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늘의 복이 무엇인가? 용서의 복,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복, 천국을 선물로 받는 복, 천국에 상을 쌓아놓으며 사는 복,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복이다.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질이나 양이나 기간에 있어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 복을 받고 산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땅의 복도 무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이런 복을 다 받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이 복을 누리려고 하는데, 그건 좀 어렵다. 복은 균형이 맞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건강하지 못하면 이게 복이 아니다. 건강해도 항상 경제에 쪼들리면 이것도 복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내 힘으로 복을 이루려고 애쓰면 몇 가지는 이룰지 모르지만, 균형이 깨진다. 내가 내 힘으로 이름을 날리고 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자녀가 제대로 사람 구실하지 못하고 복이 일대에 그칠 수가 있다. 이런 걸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을 자기 힘으로 마구 이루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의 원망이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드시 균형이 맞춰지지 않아서 참된 복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복을 구할 뿐만 아니라 땅의 복도 구해야 한다. 땅의 복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
2. 이런 복은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받을 수 있다.
여러분, 아브람이 어떻게 이런 복을 받았나? 아브람은 우리보다 낫겠지만 결코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여러 약점이 나타난다. 기근이 들자 의심하고 애굽으로 내려갔고, 죽을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다. 또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받은 것도 아니다. 아브람은 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브람이 복을 받은 것은 그저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구원도 하늘의 복도 땅의 복도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면 믿음이란 뭐냐? 자식이 하나도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을 저 별과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때에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그렇다 그러면 그런 줄 아는 게’ 믿음이다. 어떤 분들은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잘 될 거야!”, “잘 됩니다.” 그러면 믿음이 좋은 줄 안다. 그러나 그 신념이 근거 없는 낙관적인 기대에서 나온 거라면 그건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한 분명한 약속에 근거했다면 그건 믿음이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게 믿음이다. 아브람이 아내 사라가 폐경기가 지났고 아브람도 나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아들 주겠다고 하실 때 믿었으므로 그걸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거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이뤄질 줄 아는 것이다. 아브람은 아들 주시겠다고 하실 때 믿었으나 나중에 보면 흔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종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것 때문에 아내와 사이에서 골치 썩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이삭을 선물로 받았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것에 기초한다. 우리 교인들 믿음의 확신을 갖고 구원의 확신을 대부분 가진 걸 볼 수 있다. 예수영접모임에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고, 세례줄 때 꼭 물어보고 세례 주고, 삶 공부를 통해 여러 번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게 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아는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에는 부족한 게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 영접했으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겠지 하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또 역경 속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소망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역경에 빠지면 암울하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선이 이루질 것이다.’하고 믿고, ‘지금은 힘들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언젠가 선이 이뤄질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셨으니까 그런 줄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
1) 믿음은 순종이 반드시 따르기에 순종을 통해 복을 받는다. 왜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됐을까? v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 이었다.” 아브람이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왜 떠났을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떠났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 약 2: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그 행함에 좇아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만일 떠나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믿음을 통해 복을 받는데, 믿음에는 순종이 따르기 때문에 순종할 때 축복이 임한다.
이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 뻔한 얘기를 하는 거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 부부가 행복한 부부가 되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우리는 이걸 다 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한 부부의 축복을 맛보려면 여자는 순종하고 남자는 사랑해야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한 부부의 축복을 맛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뻔한 얘기다. 주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한다. 약 1:22,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v25,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왜 우리 삶 가운데서 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실천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참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행함이 따를 때에 약속한 복이 임한다.
2) 버려야 복을 누리게 된다. 많은 사람이 왜 믿음생활 잘하지 못하느냐?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v1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냥 떠나라고 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했을까? 떠나는 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살고 있고 난 곳, 아버지의 집, 우리가 과거에 익숙한 것에서 떠나야만 복을 누리게 된다.
술친구 노름친구 이거 끊지 못해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 분들이 많다. 또 옛날 사고방식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해서 믿음이 자라질 못한다. 특별히 연세 드신 분들이 그렇다. 그걸 벗어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중국학 박사로, 대만에서 공부한 분이 쓴 글이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공자는 중국 사람인데, 공자가 자기 이론을 펼 때 개인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나라 치세를 염두에 뒀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안정을 유지하느냐?’ 그래서 유교는 집권층, 연장자, 남자를 위한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순과 부조리를 안고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이걸 벗어나려고 했고, 중국은 공산정권 들어 수세기 동안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제사도 그렇다.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영이 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추도예배가 더 좋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술 담배를 버리지 못해서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예수 믿기 전에 방탕한 삶과 항상 밀착되어 있는 것이 술 담배다. 그래서 그걸 끊지 않고는 그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믿음이 자라질 못한다. 그래서 그걸 과감하게 끊을 때에 믿음의 확 자라는 걸 본다. 우린 버려야 한다.
여러분 가운데 ‘왜 나는 믿음이 자라지 않고 제자리걸음하지? 교회 생활이 남들은 재미있다는 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하는 분은 꼭 생각해보라. 버릴 것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습관, 사고, 물질에 대한 욕심, 그게 가정일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다. 버릴 때 복을 누린다. 오늘 아침 여러분, 심각하게 생각하라. 이 말씀을 통해 도전받으라. 무엇에 매여서 그런가? 무엇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가? 하나님이 무엇인지 이미 아신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다. 성령이 알려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을 거다. “주님, 맞습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화 해왔습니다. 이제 버리겠습니다.” 버리기를 결단하는 이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럴 때 복이 임한다.
3. 이런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1) 희생을 치른다. 믿음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데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고향 아버지 집을 떠난 아브람은 조카 롯과 종들과 함께 정처 없이 길을 걸어갔다. vv6-8,을 보면 아브람은 세겜에 도착했다. 그 땅에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정처없이 걸어가던 아브람이 이 세겜 땅에 도착해서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바로 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처음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거기서 제단을 쌓아서 제물을 바쳤다. 또 베델과 아이 사이에 산간지방에서도 제단을 쌓아 제물을 주님에게 바치고 예배했다. 아브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다. 제단만 쌓은 게 아니라,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제물을 영어로 offering이라고도 하고 sacrifice라고도 한다. sacrifice는 ‘희생’이란 뜻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려면 희생이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구원과 축복에 대한 감사요 희생이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희생이 있는 것이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
주일이면 맨날 골프 치던 사람이 골프 멈추고 예배드리러 나온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희생을 치르는 거다. 월급 받아서 다 쓰고도 모자란 생활인데, 거기서 십일조를 떼어 드린다는 것은, 우리는 희생이 아니라 감사의 표시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희생을 치르는 거다. 그런 희생을 치르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거다. (전현구 목자 청년 때 평가사 시험 준비하며 금요일 목장하고 토요일 다시 고시촌에 가서 공부하고 주일에 다시 와서 예배드리고 청소년부 교사하고 차량 봉사까지 하고 주일 저녁에 다시 고촌에 가서 공부했다. 시험 동료들이 너 월급받고 일하냐? 물어서 아니 헌금내고 일한다고 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중에서 전 목자만 그 해 평가사 시험에 합격했다. 희생을 드린 믿음을 하나님이 축복하신 거다.) 만약 날씨좋은 날은 놀러가거나 골프나 축구나 하러가고, 그저 비올 때만 교회에 나온다면, 이거 믿음이 있는 거 아니다. 헌금을 할 때도 준비도 안한 채 그냥 와서 주섬주섬 내거나 그냥 안하고 지나치거나, 마치 외국여행할 때 식당이나 호텔에서 팁 정도 주듯이 헌금하고 있다면 이거 믿음이 아니다. 여러분, 희생이 따르는 게 믿음이다. 그런 희생을 드리는 믿음을 가진 자가 이런 복을 누린다.
2) 선포한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 밟는 곳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 v8b,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여기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주님!” 그렇게 불렀다는 뜻이나, 기도했다는 뜻도 되겠지만, 주님을 선포했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예배하며 전도했던 사람이다. v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랬는데, 여기서 ‘얻었다’는 것은 종이나 노예를 얻었다는 것이 아니다. 종이나 노예는 ‘샀다’라는 다른 단어가 있다. 그래서 전도해서 얻은 사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롬 16: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가 가정교회를 의미하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가 믿음 있느냐 없느냐를 무얼 보면 알 수 있느냐? 믿음 있으면 선포한다. 전도한다. 내가 받은 구원의 선물, 공짜인 복음을 나만 누리는 게 안타까워서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에게 전하고 싶어 안달한다. 믿음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남편과 아이들을 구원하려고 애쓰고, vip에 관심을 가지고 그렇게 데려오려고 애쓰고 안타까워한다. 그 속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선포가 있다.
교회 다니는 게 부끄러운 분, 성경책 들고 다는 게 부끄러운 분, “니가 교회 다녀? 니가 예수 믿은 거야!” 어느 날 알게 되었을 때 주위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들, 아직 믿음이 없는 거다. 벧전 2: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은 선포하게 되어 있다. 희생이 따르느냐? 선포가 따르느냐를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여러분, 내가 기죽이려고 이 말씀을 하는 게 결코 아니다. 믿음이 자라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말한다. 믿음이 있느냐 여부를 희생과 선포가 따르느냐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역으로 우리가 희생하고 선포할 때에 우리 믿음이 있는 걸 알 수 있고 그걸 할 때 우리 믿음이 자라게 된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교를 가지만, 선교를 갔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기도 한다. 안 그런가? 믿음이 있어서 기도하지만, 기도하면서 믿음이 자란다. 믿음이 있어서 말씀 읽지만, 말씀 읽으면서 믿음이 자란다. 그래서 전도하다 보면 믿음이 자란다. 행복의 길을 배우면서 내적 치유가 30% 일어나지만, 행복의 길을 가르치면서 내적 치유가 70% 일어난다. 우리는 믿음으로 복을 받지만, 순종하고 버리고 희생과 선포를 하면서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 더욱 복을 누리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무조건 택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길 원하신다. 이런 복은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순종하고 버릴 때 받는다. 희생과 선포를 통해 믿음이 점점 더 자라서 하나님이 복을 부어주시고 싶은 대상이 되라. 하늘의 복, 이 땅의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자가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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