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1월에 출범한 축구국가대표팀은 차범근 감독을 영입하였다. 프랑스 월드컵이 1년뒤였고 그에 대한 과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래 차범근 감독은 국가대표팀감독으로 영입계획이 없었다.
97년 9월에 월드컵예선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일본,아랍에미리트,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과 한조에 편성되어 경기를 치루었다. 당시에는 국민들 환호에 젖어 내가 말하고자하는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첫경기와 두번째 경기를 홈인 서울잠실스타디움에서 치를때 잠실스타디움에는 관중이 전체좌석의 1/3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과거 월드컵예선당시 경기관중보다 오히려 조금 모자른숫자였다. 붉은악마 응원단도 생긴지 얼마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엠비씨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차범근 감독은 국민들이 관심좀 가져달라고 경기장에 좀 와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헌데 9월 28일 일본과의 경기 '도쿄대첩'이라고 불리운 경기이후 부터 갑자기 축구장에 관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일본을 2:1로 이기자 월드컵 예선 주관방송이었던 엠비씨는 경기직후 도쿄대첩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부치고 그날 경기를 밤 10시부터 재방송으로 내보내고 9시뉴스내용의 절반을 온통 한일전내용으로 장식하였다.
차범근은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아침 뉴스부터 축구국가대표팀 훈련모습과 인터뷰가 로 시작되었고 5번째 경기인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이기며 본선진출을 확정하자 방송3사는 그야말로 오도방정을 떨었다. 과거에도 월드컵 본선진출당시 언론에서 축하한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환대를 한 적은 없었다.
6번째 경기인 일본과의 홈경기는 그야말로 방송사들의 축구방송경쟁의 극치였다. 당시 10월말이었는데 경제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큰일날거 같다는 분위기가 경제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만한 분위기였다. 월드컵예선에서 국가대표팀이 승승장구하자 국민들은 거기에 환호하기 시작했고 방송들은 뉴스의 2/3이상을 축구에 할애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경제가 위기상황에 부닥히고 있음에도 국민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축구경기가 오후 3시쯤에 있었는데 경기가 있는 당일 아침부터 방송3사는 월드컵예선 하이라이트를 하루종일 방송했고 연예인들이 잠실에서 축하공연하는 장면이 2시간정도 방송되었다. 경기장 입장권은 예매가 끝났고 암표가 10만원까지 치솟았다.
별주목을 받지 못하던 붉은악마응원단을 너나할거없이 취재를 하고 여자아나운서가 붉은악마응원석을 직접찾아가 응원가를 배우고 따라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경제위기를 방송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일요일 일요일밤에 코너중 하나인 '이경규가 간다'가 양심냉장고 방송을 취소하고 신문선해설위원을 스포트라이트화 시키고 한일전 홈경기를 방송하였다. 연예프로가 축구경기 하이라이틀 내보내는것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은 일본과의 승패여부를 떠나 월드컵 본선진출이 이미 확정되어 있어서 그렇게 호들갑떨필요가 없었다. 그날 한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축구 시청률은 당시 최고였다.
그로부터 한 달뒤 한국은 IMF으로 부터 구제금융조치를 받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정부는 이미 경제위기를 알고 있었다. 김영삼은 이를 사실대로 발표할경우 엄청난파장이 생길것을 우려하였고 방송을 이용한것이다. 월드컵예선기간중에 김현철관련비리가 폭로되어 검찰수사가 진행되었지만 뉴스에는 짤막하게 보도되었고 국민들은 관심이 없었다. 또한 자신의 이미지가 훼손되어 여당이 선거에 질것이 걱정되었고 자신의 퇴임후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월드컵예선열풍이 일자 자신도 그 인기에 편승해 국민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해 머리쓴것에 불과하다. 월드컵예선기간중에 국가와 사회에 관심이 없던 젊은 세대들이 일시적이나마 축구를 통해 민족주의적 감정이 치솟았다. 축구선수들의 국기에 대한 경례장면과 골을 넣고 환호하는 장면이 태극기와 함께 클로즈업되자 너나 할거없이 대~한민국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럴때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격려사 한번 해주고 국가대표팀에 축전한번 보내주면 자신의 이미지도 덩달아 좋아지고 국민들도 환호하는것을 이용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