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팬티 / 김연종
뒤집힌 팬티를 본
아내의 눈이 뒤집혔다
황당하게 뒤집힌 스케줄로
이른 아침 퇴근하던 참이었다
핸드폰과 가방이 뒤집어지고
옥신각신 서로를 뒤집으며 살펴보니
팬티만 입고 어슬렁거리는
아들놈의 팬티 또한 뒤집혀 있다
이윽고 서랍장이 뒤집히고
서랍 속의 가지런히 정돈된 팬티들
모두가 뒤집혀 있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뒤집힌 아내와 나는 서로를 뒤집었다
속과 겉이 애매한 팬티들도
한참을 내외하고 나서야 본 모습으로 뒤집어졌다
안과 밖의 모호함이여
사랑과 불륜의 아슬아슬함이여
아무리 뒤집으려고 해도 뒤집어지지 않는
시인의 말 / 김연종
生이여
나를 깨우지 마라
실컷 늦잠 자고 온종일 빈둥거리다가
비단각시거미의 기둥서방이 되어
나무늘보처럼 잠들고 싶다
내게 필요한 건 그물침대와 시집 한 권뿐
마이 리틀 장례식 / 김연종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프사가
마지막 대문을 지키고 있구나
한여름에 국화가 만발하다니
대단한 축제로구나
일렬로 늘어선 조화 속에
아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구나
내 얼굴은 본체 만체하고
상주들하고 인사하는 걸 보니
나만 빼고 모두 호상이구나
간소하게 치루라는 말은 언제 들었는지
마지막 효도는 제대로 하고 있구나
웃음꽃이 흥건한데
간혹 눈물 훔치는 자도 있구나
방명록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저 인간은
어떻게 부음을 접했을까
줄기차게 나를 험담하던 저 작자는
무엇을 또 캐내어 인터넷에 퍼뜨리려는 걸까
내 비밀과 허물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저놈을
어떡하든 돌려보내야 할 텐데
아니, 구석에서 혼자 훌쩍이다가
아내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는 저 여자
여기가 어디라고 발걸음했을까
아직도 감정의 물기가 남아있을까
아니면 감정의 앙금이라도?
죽어서도 죽지 못한 근심거리가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디지털 장례사를 불러
영정시진을 다시 찍을까
차명계좌 / 김연종
동네 은행에 들렀다
대출 연장을 위해서는
본인 동의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행한 아내가
휴먼계좌에 대해 문의했다
숨겨논 애인처럼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사랑니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담장 밖으로 고개 내민 백목련이
나에게만 환하게 벙글었다
그렇구나
저 목련이 내가 개설해 놓은
차명계좌였구나
비자금처럼 펑펑 터지는
봄날의 차명계좌들이
나를 이렇게 부유(浮游)하게 만들었구나
-의사들은 바쁜 일과 속에 언제, 어떤 시를 쓸까?
몹시 궁금하여 전국 의사시인회 회원 동인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인간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이고, 시인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라고 시작되는 동인지 머릿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치료를 먼저 시작했는지, 치유를 먼저 시작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열여덟 분의 현직 의사의 시 중 한 분의 시를 몽땅 올려드립니다.
시의 행간이 진솔하고 유머 끼가 넘치는 네 편 입니다.
평번한 일상에서 건진 사유의 추출물을 공으로 마십니다.
-숨겨놓은 애인과 사랑니 같은 집.... 이만한 표현,
마치 영양제 한 방 무상으로 맞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