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1
6월24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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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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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tUjTpnKf0g
(김학배 안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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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가끔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는데, 저희 남자 수도자들보다 훨씬 침묵을 잘 지키십니다. 사오십 명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데, 정말이지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잘 적응이 안 되는 저는 소화가 잘 안되, 끼니를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은 그럭저럭 참을만한데, 일주일, 8박9일, 30일 대 침묵 피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괴로움입니다. 특히 차 한 잔 앞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술 한잔 씩 들이키며 술술 풀어놓아야 쌓인 것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 침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개월간의 대 침묵 피정에 참석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억울한 심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의에 의해서 10개월 동안 말을 못 하게 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 즈카르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10개월 만에 혀가 풀리고 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0개월 만에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가 내뱉은 첫 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 대한 투덜거림이었을까요? 강한 분노의 표출이었을까요? 자신이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강한 벌칙을 주셨냐며, 하느님께 따졌을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마디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찬가 즈카르야의 노래였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매일 아침기도 때 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을 완성하기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런 희망과 환희와 감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노래와 더불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아침마다 이 노래를 바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 사화의 결론입니다.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신앙고백입니다.
즈카르야의 깨어남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로 연결됩니다. 즈카르야가 찬미가를 부르는 순간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모든 불신과 의혹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즈카르야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자기중심적 삶을 넘어 참된 하느님의 사제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은 또 다른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를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다시금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새 출발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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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WwuU41Wo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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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입니다. 성인 중에 어쩌면 유일하게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분입니다. 이분의 탄생은 그 자체부터 기적이었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란 이름을 짓게 하자 묶여있던 즈카르야의 혀가 풀렸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에 사람들은 모두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며 신기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의 길을 닦는 예언자가 될 것임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님을 드러내게 될 것인지는 신비에 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가끔 부모의 뜻대로 자녀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2010)은 어머니의 기대가 딸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발레의 여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아기를 갖게 되어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딸을 통해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니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딸로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환상에 시달리며 결국 그 대상을 죽이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엄마의 꿈은 이뤄주었지만, 자신은 자기를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녀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마음 때문에 한 인생이 망가집니다. 인생을 빼앗는 것만큼 큰 도둑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했을 때 부모는 세례자 요한의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름을 주님 뜻대로 정해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세례 때 경험합니다. 세례 때 세례명은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받은 이는 부모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저도 책을 몇 권 써 보았지만, 책을 쓰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책은 나의 피를 쏟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내가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책이 자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저는 책 네 권을 교구 출판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쓴 내용을 출판사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출판한 책들은 또한 내가 마음대로 절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쓴 책을 몇 년 지나서 보고 창피한 것이 너무 많아서 다 절판시켰습니다.
지금도 책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인데 벌써 다 써놓고도 몇 년째 수정만 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출판사에 투고해보고는 있지만, 출판을 해 주겠다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저의 것이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는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조금씩 수정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 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분명 지금 쓰는 책이 어느 곳에서 출판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책은 주님을 알리는데, 이전까지 내가 쓴 책들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
김승호 회장은 어렸을 때 자신이 수천 명 가운데서 마이크를 들고 연설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일곱 번의 지독한 실패에도 ‘이번은 아니구나!’라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천억이 넘는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단순히 어렸을 때 그렸던 자기 모습이 실현된 것을 보고는 놀랍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 대해야 합니다.
“너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를 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될 거야. 어떤 식으로 될지는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너를 응원하며 지켜보겠다!”
오늘 복음에서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즈카르야나 엘리사벳이 상상하지 못했던 삶입니다. 그저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을 어떻게 이끄시는지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생각은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한 부모가 자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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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사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프로였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사건, 우리가 외면하였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프로였습니다. 1992년에 첫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어느덧 31년이 되었습니다. 진행자로는 ‘문성근, 박원홍, 오세훈, 정진영, 박상원’ 씨가 있었고, 2008년부터는 김상중 씨가 15년 째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저도 관심이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시청하였습니다. “경찰과 검찰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하면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곤 했습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 전례 중, 탄생일을 기념하는 인물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탄생보다도 부활이 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보통의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경우 특별히 탄생일을 대축일로 기념하는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우리의 구원의 역사 안에 깊은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첫 번째 덕목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반성 없이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계획안에,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준비하시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활동하시기에 앞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요구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6월 24일이고,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인 6월 24일은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에는 낮이 가장 깁니다. 그리고 낮의 길이는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인 12월 25일은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에는 밤이 가장 깁니다. 그리고 낮이 길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면서 낮은 짧아지기 시작하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면서 낮은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탄생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청하였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오시다니요?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도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데서 우리를 찾아 오셨네.” 어르신들께서 ‘이름 값’을 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함께하는 공동체와 조직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때로 ‘갑’질을 해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지닌 천사입니다. 성모님께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요셉 성인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저의 세례명이 가진 뜻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며 저의 이름값을 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매일 복음 묵상도 계속 전하고, 제게 주어진 직무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영광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공경하는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이와 같은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하느님께 드릴 줄 알아야합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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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80: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 외에 요한 세례자 한 분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언어장애인이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성인은 그 누구에게도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주장한 분이다. 이 때문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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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7-8).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세례를 보고서 그가 세상에 오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과 기대는 그 자신에게 커다란 유혹으로 다가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이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시는 분께 향하도록 증언합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4-28). 예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에 파견된 선대의 그 어떤 예언자보다도 훨씬 위대한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칭송의 배경에는 자신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파견된 존재임을 잊지 않고 늘 자신을 낮추며 메시아를 들어 높이는 임무에만 묵묵히 힘썼던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삶이 자리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인물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뒤에 파견된 이들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을 증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도 세례자 요한이 겪은 유혹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며 얻게 되는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 어린 시선들이 마치 자신에게 향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세례자 요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우리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을 크게 만드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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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미소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 같은 예언자를 몸소 가르치고 훈련시키십니다.
엘리야의 영은 엘리사에게 전해져 세례자 요한까지 이어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언자들 안에서 움직인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을 내다보고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통해 준비되고, 신약의 복음은 사도들을 통해 우리 시대에 전해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받자 즈카르야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아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아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가진 아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아이의 탄생 소식은 그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려 하는 사람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두려움이 불신으로 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는 많은 짐은 우리를 불신의 늪으로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다리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복음의 다리가 되어 하느님의 업적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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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고 준비한 분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잇는 연결점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낙타 털옷은 아주 거친 옷이었기에, 그의 옷차림이나 음식이 아주 소박한 것이었음을 뜻합니다. 그가 살았던 광야 역시 인간들 사이의 혼잡과 소음을 벗어나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 장소를 뜻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런 모습은 구약의 엘리야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종말의 날 직전에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종말에 와야 하는 예언자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선포에 응답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이 자신들이 기다려 온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졌지만,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코 복음 1장 7절-8절)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사명과 위치를 자각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성인의 위대함을 더 돋보이게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남아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주님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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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른다면 당시 관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사제가 되어 명망을 얻고 존경받으며 안정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요한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언자가 되어 명망과 존경보다는 박해를 받고, 기득권의 삶보다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갑판 위에서 보니 어떤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확성기에 대고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남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그러자 저쪽에서 즉각 반응이 왔습니다.
“그 배가 북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선장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함정이란 말이요. 그쪽이 움직이시오.”
그러자 상대편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쪽이 움직여야만 하오. 이곳은 섬이고 나는 등대지기요!”
섬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배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삶 또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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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요한이라는 이름은“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예수’곧‘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이름과 함께 쓰여야 문장이 완성됩니다. 즉“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될 때 그분의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나는 목소리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막의 목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신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낸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목소리가 되어 용감하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곧 자기 신랑에게서 빛을 받으며 그분이 커지도록 작아져야 하는 신비의 교회입니다... 요한은 우리를 위해, 교회를 위해 언제나 말씀에 봉사하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교회의 모델입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하느님의 뜻에 의심을 품어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겪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을 속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더 커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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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형제님께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아이템이었고,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확신과 달리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경험 삼아 방향을 바꿔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그는 과거의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지우고 싶은 과거라면서 그때의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 실패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 실패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말이지요.
종종 과거의 일 때문에 지금 힘들다는 분을 만납니다. 과거 있었던 부모의 학대가 떠올려서 괴롭다고 말하고, 친구의 배신으로 지금 자신이 이렇다면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는 그 일이 지우고 싶은 시간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지금을 잘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을 잘 사는 사람은 과거 탓, 남 탓을 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과 사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면서 감사해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각자는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도 있고 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수렁에 빠졌어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과거의 일과 사람에 집착합니까? 지금 부정적 감정 안에 빠져들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부정적 감정 속에 빠져나가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불신이 생긴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부정적 마음보다 긍정적인 마음을, 미움과 질투보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는 천사가 전해준 잉태 소식을 믿지 않았지요.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에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에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불만보다 하느님께서 최고의 것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뜻을 따랐기에 다시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은 광야에서 지내며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특히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면서 겸손의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예언자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과거 탓, 남 탓하는 모습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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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루카 1,57-66.80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 힘겹게 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부모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요한!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부모와 갈라서야 했던 외톨이였습니다.
뭇사람의 존경 받는 가문의 영광도
주님 섬기는 사제의 안정적인 지위도
당신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
하지만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니라
거친 광야가 당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여린 살갗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는 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요,
단지 성긴 낙타털옷만이
당신을 거칠게 보듬을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맛난 살코기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포도주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호사 일뿐
메뚜기와 들꿀에 당신은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 생각을 펼치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에
당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탐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들에게
위선과 가식을 옷 입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당신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애 첫 순간부터 평탄치 않은
비범한 당신의 삶의 여정에 이끌려
수많은 이들이 당신께 찾아와
살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오시기로 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당신께 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자리를 탐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당신께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살기 위해 당신을 찾은
무수한 이들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스스로를 죽이고 죽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탐한 부정한 압제자의
썩은 냄새 진동하는 흥겨운 술판의
싸구려 노리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당신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정의의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주님을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닮은 많은 이들을 통해서
오늘도 찬란히 부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의 추하고 속된 세상과의 단절을 본받아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의 비움을 본받아
주님으로 온 삶을 채울 수 있기를,
헛된 명예를 내던져버린 당신의 낮춤을 본받아
주님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들어 높이기를,
부정과 불의에 맞섰던 당신의 정의로움을 본받아
주님의 정의를 온 몸으로 당당히 선포하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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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처럼 되어라!>
저는 외국을 많이 나갔지만 다 일 때문에 나갔고, 그래서 저 혼자 여행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를 안내해주는 사람 없이 여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안내자 없이 여행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왜 했냐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처음 드러내실 때도 저처럼 도움이 없으면 안 되기에 선구자요 증언자인 요한을 필요로 하셨던 것인지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의 필요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지요. 하느님께는 성인이 필요치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성인이 필요하지요.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왜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첫째는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겸손의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세례자 요한 정도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충분히 나댈 수도 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은 자기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명성이 자자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몰려와도 그는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주님 앞에 있습니다.
물론 그도 사람들 앞에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 있지 않았다고 함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셨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주님 앞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늘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높이 생각해도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자기를 자리매김했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맬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관해 얘기하면서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지 그 이상이 아니”라고 한 말 대로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지속적으로 가리키는 자 곧 주님의 증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겸손한 모범도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주님을 가리킴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가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그 역할이 더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가게 하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따라가게 하고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한 세례자 요한은, 그랬기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고, 우리에게는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칭송만 하면 주님께서 나무라실 겁니다. 그를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 따라가고, 그를 칭송만 하지 말고, 너희도 그처럼 되어라!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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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신(神)의 한 수(手)”이다>
-성소, 주님과의 관계, 훈련-
참 사람되기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이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한마디로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인생 폐인이,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들어도 순수와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고 시적 감성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시편 8장은 온통 하느님과 인간, 우주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합니다. 교황님도 얼마전 천문학자들 모임에서 결코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라 강조하셨습니다. 역시 여기 수도원에서 26년전 쓴 “아침”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새롭다 놀랍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 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놀라운 좋은 아침일 수 있겠다’-1997.8.16
배밭 사이 배봉지 흰별들 가득 달린 별밭사이를 걸을 때마다 놀라움, 새로움의 감각을, 원초의 순수를 회복하려 노력합니다.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세상도, 수도원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내적성장과 성숙을 통해 참나가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한국적 수도생활의 토착화로 시작된 단순소박한 수도승 생활이었습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는 좌식이었고 참으로 최소한의 필요로 시작한 편안한 고향집같은 수도원 환경이었습니다. 이젠 수도원 성전 내 수도자의 자리도 어제 저녁기도부터는 의자에 앉는 좌석으로 바뀌었습니다. 1987년 수도원 개원 후 36만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과거 넓은 공간의 성전은 이제 의자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런 시대적 추세라지만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젠 큰 절만 하는 것만 남았네요.”
“그것도 언제 없어질지 모릅니다.”
원장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아마 머지 않아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 제대 앞에 큰절하는 관행도 사라질 것입니다. 수도원의 쓰레기들은 또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이런 추세라면 세상이 온통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도 사람도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수도원 앞에는 거대한 별내신도시가 들어서 상전벽해가 되었고 그나마 원형의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수도원뿐입니다. 며칠전 읽은 탈성장, “포스트 자본주의를 고민하자”라는 제하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녹색성장, 지속 가능한 성장만이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은 환상일뿐입니다. 수백년간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자본주의가 추구해온 성장지상주의 탓에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존폐 기로에 몰렸습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나 자본주의하에서 탈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인류가 계속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단순소박한 삶의 양식을 어떻게 지녀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영적혁명이, 내적혁명이, 의식의 변화가 절박한 시절입니다. 병자들이, 특히 정신질환자들이 넘쳐 납니다.
어제 공부하며 깨달은 소시오패스와 아이코패스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일종의 괴물같은 인간입니다. 둘다 공통적 특징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며 공감, 배려, 존중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더욱 늘어날 이런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심신미약이나 심신상실이 아닙니다. 인지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양심이 없어서입니다. 이같은 기질은 타고나더라도 어릴 때 부모의 훈육등을 통해 충분히 누를 수 있습니다. 조현병은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으니까 사회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할 경우 재발률이 90%에 달하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치료가 잘 안됩니다. 타고난 부분이 나쁜 데다 입원해도 큰 의미가 없어서 교도소에 수감하는 게 낫습니다.”
아, 정말 사람되기 힘든 세상입니다. 얼핏 분별이 안되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에 속한 이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나 가정의 부모가, 배우자가 된다 할 때 그 피해는 얼마나 크겠는지요.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온전한 참사람으로 살기위해 신앙생활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길을, 나를 잃어 버리면 누구나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미사중 면면을 살펴보며 한분한분이 영적전쟁에 백전노장의 믿음의 용사요 신의 한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신의 한 수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고 여기 수도자들이 그러하고 엊그제부터 저에게 물리치료를 해준, 20년간 수도원을 노동으로 도운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 박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가 그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의 한수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나의 성인으로 살기위해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되어 시종일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세례자 요한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 말고는 유일합니다.
첫째, 성소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적 무명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성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은 물론 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정말 이런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래야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나의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이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습니다. 이래야 자존감 높은 정신 건강, 영혼 건강의 삶에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139장도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존재임을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때로 삶의 허무와 허망함에 좌절도 있겠지만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곧장 일어나 주님을 붙잡을 것입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좌우명처럼 늘 되뇌이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없는 성 요한 세례자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인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여 평생 닮아갈 때 참나의 성인이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떠나버리면 참나의 상실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깊어가는 관계와 더불어 온유와 겸손입니다. 다음 제2독서중 바오로를 통해 소개되는 성 요한 세례자의 겸손한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처럼 주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겸손과 순수, 지혜의 은총이요, 주님 앞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 정신건강, 영혼건강의 삶이겠습니다. 영혼건강, 정신건강의 명약 넷이 희망, 기쁨, 감사, 평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은 영적훈련으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은총도 함께갑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을 위해 한결같은 치열한 영적훈련은 필수입니다. 이래야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습니다. 유비무환, 평상시 영적훈련을 통한 예방이 처방보다 백 배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탄생한 요한 세례자 작명 과정을 통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의 영적훈련이 참 인상적입니다. 잠시의 불신으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 인내와 기다림의 영적 훈련중에 귀는 활짝 열려 경청의 사람, 관상의 사람으로 변모했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감사에 벅차 하느님을 찬비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성무일도시 끝무렵에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경청도 순종도 찬미도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이런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웠을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어떻게 얻는 아들인데, 참으로 한결같은 영적훈련의 모범된 삶을 통해 성 요한 세례자를 교육했을 것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광야는 그대로 영적훈련장이였음을 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을 기초로 삼아 영적훈련에 전념했기에 굳센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품위의 존재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삶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사도13,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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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63)
<충실과 겸손!>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루카1,57-66.88)도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곧게 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충실과 겸손!'
충실과 겸손은 '세례자 요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라고 할 정도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13,25)
충실과 겸손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지금 이 시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파견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한번 성찰해 봅시다!
'내가 성직자라면 성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겸손한지?'
'내가 수도자라면 수도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겸손한지?'
'내가 신자라면 신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겸손한지?'
'충실과 겸손은 복음 선포의 장인 삶의 자리에서 세례자 요한처럼 늘 주님께 첫째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할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부터 먼저 회개하고, 너도 회개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먼저 회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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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g5CbMzmk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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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 63)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름다운 역사는
아름다운 탄생으로
시작됩니다.
견딤의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탄생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느님
구원계획에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일기(日記)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우리의 소중한
기록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사랑과 약속입니다.
약속이 많아도
지켜야 할 약속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건네준 생명은
가장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은총의 날들이
펼쳐집니다.
다른 곳을
바라 보지
않는
하느님과 우리의
약속입니다.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약속이
탄생으로
드러났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가장 좋으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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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루카 1, 80)
성 요한
세례자의
정신안에
이미 존재하는
복음의 정신입니다.
찾아 떠나는
사람만이 찾게되는
고귀한 정신의
승리입니다.
소중한
정신의 가치
그 중심자리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굳센 정신
맑은 마음을
지향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정신의
길입니다.
되살려야 할
정신의
탄생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은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어지러운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수없이 다잡았을
성 요한 세례자의
광야입니다.
광야의
삶을 통해
끊어내야 할
욕망임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에 기초한
정신적 삶은
하느님과 맺는
좋은 관계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길은
굳센 정신으로
나가는 삶입니다.
훼손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정신적 가치는
복음 정신으로의
복귀입니다.
이어져야 할
진정한 정신적
가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단순하고
간략한 정신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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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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