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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엘리엇 ‘황무지’(새로읽는 고전:49)
◎타락한 대지에도 꽃은 피는가
새생명 낳지못한 ‘4월은 잔인한 달’
메마르고 무의미한 유럽문명 진단
뚝뚝 끊기는 내용·방대한 상징 불구
‘율리시스’와 함께 모더니즘 대표작
매년 4월이면 한 두번쯤 우리는 방송에서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멘트를 듣는다.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으로 귀화한 시인 토머스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의 시작부분이다.그러나 정작 ‘황무지’의 시작부분은 우리의 방송에서 멋스럽게 인용하듯 개인적으로 잊고 싶은 경험을 묘사하는 부분이 아니다.
시간의 순환이라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상황 중 적어도 보편적으로 재생과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때인 4월,즉 봄이 오더라도 결코 새로운 생명을 피워낼 수 없는 현대 유럽문명에 대한 시인의 진단이 담긴 부분이다.
엘리엇 시의 일부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회자되지만,정작 ‘황무지’ 자체는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없을 만큼 난해하다.1922년 출판된 ‘황무지’는 소설에 있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함께 모더니즘 문학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며,엘리엇은 그가 ‘황무지’를 헌정한 에즈라 L 파운드와 함께 영미문학사에서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꼽힌다.
대중의 취향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대중과 결별하면서 고답적이고,어떤 점에서는 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그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의식에 천착하였던 모더니스트의 작품답게 엘리엇의 시가 진행되는 방식은 아주 특이하다.
우선 작품의 일부로 간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하는 시인 자신의 각주가 시의 난해성을 더한다.막상 시를 읽기 시작하면,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화자(시를 말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로 시인과는 구별하여 사용함)의 목소리라든가,다양한 인유 등이 시를 읽어가는 독자를 곳곳에서 저지한다.방대한 양의 상징과 광범위한 인유를 통하여 축적되는 시의 의미는 우선은 시인 개인에 의해 창출되지만,이들이 서로를 지시하는 방법과 관계를 매개로 하여 시는 그리스도교가 그 정신적 지주인 서구문명에서 병들었거나 무력한 서구인들의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음을 진단한다.
단테의 ‘신곡’이나 성서의 인유가 종종 눈에 띄지만 ‘황무지’가 주로 빚지고 있는 저술은 제시 웨스턴의 책 ‘제의에서 로맨스까지(From Ritual to Romance)’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다.특히 웨스턴의 책은 어부왕의 죽음과 쇠약,불모성으로 인한 대지의 기근,영적인 빈곤,불모성이 멸망의 교회를 찾아가 성배에 관한 바른 질문을 던지면 치유될 수 있다는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성배에 관한 신화 속에서 엘리엇은 전쟁의 폐해와 질식할 듯한 현대 유럽의 상황,더 구체적으로는 유럽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도시 속에서 메마르고 무의미하며 생명 없는 듯한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추해낸다.현대판 불모의 땅은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신화 속의 어부왕의 땅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 세상인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언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올리고/기억을 욕망과 뒤섞어 놓는/죽은 뿌리를 봄비로 잠깨워 놓는…’으로 시작하는 제1부는 ‘죽은 자의 매장’이란 부제로 시작한다.
20세기 유럽의 메마른 풍경,이를테면 런던거리의 암울함,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에서의 사람들의 의미없는 일상,거짓 예언이 난무하는 세상 등을 보여준다.
제2부는 ‘체스 게임’이란 부제가 달려있다.귀족부인이 등장하는 첫 장면이나 거리의 여인 모습 모두 현대인의 삶이 무의미하며 결실을 맺지 못함이 드러난다.
제3부는 ‘불의 설교’라는 부제와 함께 불모의 도시 런던에서의 유사종말론적인 풍경이 펼쳐진다.눈 먼 예언자 타이레시아스의 목소리인 듯 진행되는 제3부에서 ‘뼈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등뒤에서 듣는 화자는 이젠 더이상 미적인 영감을 줄 수 없는 템스강변에서 마치 유랑민처럼 떠돌아다니고 남녀간의 의미없는 사랑과 성을 경험한다.‘불의 설교’는 인간 욕망의 불길이 자기파멸적임을 경고하는 부처님의 설법을 말하고 있는데,욕망은 범람하지만 결실은 하나도 없는 현대인의 상황이 그 자체 불모의 땅임을 보여주는 엘리엇의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4부 ‘물로 인한 죽음’에 이어지는
제5부는 ‘천둥의 말’이란 부제가 달려있다.
특히 제5부 후반부에 등장하는 멸망의 교회는 이 화자의 순례의 최후 종착지지만 성배를 모신 곳을 찾아 기어코 성배를 찾아오는 기사의 희망적인 모습 대신 우리는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서 정화와 재생의 불을 체험하는 시인 아르노의 목소리와 되섞인 화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마지막에서 시의 화자는 자문한다.
‘강기슭에 앉아/황량한 벌판을 뒤로 하고 낚시질하는 나/내 땅을 적어도 바로 잡아야 할까?’.
‘황무지’의 불연속적인 구성,앞뒤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난해함,일관성이 결여된 듯한 화자의 목소리를 읽어내면서 독자는 시 전체가 파편화된 조각들을 불완전하게 하나로 묶어두고 있다는 인상을 갖는다.그러나 바로 이러한 파편화된 채 존재하는 시의 모습이 바로 현대문명 속에서 불완전하고 불안하게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병리적 현상을 증후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모더니스트들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실증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으로는 더이상 설명해낼 수 없는 세상과 인간존재의 모습을 앞에 놓고 엘리엇 시대의 예술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은 오히려 이성과 과학이 억누르고 있던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는 신화와 통찰적인 상징이었다.지성의 ‘단락(短絡)’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인간존재의 불안한 상황이 바로 엘리엇의 ‘황무지’가 보여주는 세상인 것이다.
<신경숙 연세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