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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히11:20,21)
1 바라는 것이 믿음이다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 그러나 사실 이삭은 눈이 어두웠고 영적으로도 누구를 축복해야 하는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의 털옷을 입고 목숨을 걸고 기도를 받는 헤프닝까지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는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삭은 에서가 마땅히 축복을 받을 자로 믿었지만 리브가는 야곱이 마땅히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리브가가 '저주는 자신이 받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기도를 받으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창27:13). 하지만 리브가는 자신이 저주를 받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이삭이 깨달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이 속여 축복을 받는 일이 벌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뜻과 다름을 깨닫고 심히 두려워 떨었다(창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창27:33)
이삭의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정확히 반대였다. 아내 리브가가 남편 이삭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누지 않았을까? 당연히 리브가는 이삭에게 여러번 그것도 자주 이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나누며 설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거라는 예언을 리브가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창25:23). 그러나 이삭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꺾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확실히 보이셨을 때 이삭은 완전히 굴복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모두 나름 믿고있는 것이 있다. 이처럼 바라는 것이 믿음이므로 무엇을 바라는가? 누가 잘되기를 바라는가? 누구를 축복하기 원하는가?와 같이 믿음의 방향성이 중요하다(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히11:22,23)
2 언약에서 비롯된 믿음
요셉은 자손에게 애굽에서 떠날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명했다. 즉 요셉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출애굽을 믿었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믿었다. 또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아름다운 아이인 것을 보고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3달이나 모세를 돌보았다. 모세가 아름다운 아기이므로 숨긴 것이 믿음이었을까? 다른 아기들은 아름답지 않아서 나일 강에 던졌는가? '아름다운'의 헬라어 뜻은 '그럴듯한'이다. 영어로는 '적당한, 적절한'의 뜻으로 proper child라고 번역했다. 즉 모세의 부모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자를 보내실 텐데 어린 모세를 보았을때 그럴만한, 적절한 아이로 보였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이들은 바라고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겼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11:24-27)
3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모세는 믿음으로 공주의 아들로 살지 않고 종들과 같은 위치에서 고난받는 것을 선택했다. 애굽의 보화와 재물보다 수모를 당하는 것이 더 큰 상급이 있음을 믿었다. 그리고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도망쳤다. 만약 당신이 모세라면 그와 같은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모세는 물에서 건져져서 공주의 손에서 컸고 어마어마한 최상위층 엘리트 교육을 받아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동족은 아이들을 모두 물에 던지라는 명령에도 꼼짝하지 못하는 노비와 같이 신세였는데 수모를 당하는 그들과 함께 설 수 있겠는가? 세계에서 인정하는 궁궐에서 왕자의 신분인데 과연 모든 편안함과 부귀 영화를 버리고 온갖 부끄러움을 당하며 광야로 도망갈 수 있을까? 이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가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평안한 삶이 중요하고 성공이 중요하고 평판이 중요했다면 결코 다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이스라엘과 함께 고통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있다. 모세가 낮은 자리로 내려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왕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광야로 도망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광야로 도망했을 때 온갖 수모를 당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믿음으로 내려올 수도 있지만 믿음으로 높은 자리를 지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어디에 믿음을 두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당시 모세는 편안함과 부귀와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함께 수모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4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택했다
모세가 이처럼 수모와 고난을 택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이고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일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슬픈 자를 위로하고 포로를 자유케 하고 갇힌 자를 놓아주는 것이다(사61:1).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낮은 자리로 내려온 것이다. 예슈아께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 즉 신성을 가지고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종처럼 낮아지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셨다(빌2:6-8). 그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낮은 곳에서 고난 받기를 믿음으로 선택해야 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1,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히11:28)
5 유월절을 지키는 믿음
모세는 천사가 장자를 멸할 때 이를 피하기 위해 장자를 대신하여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재물을 먹는 유월절 예식을 정함으로써 심판을 면하게 했다. 그런데 모세가 유월절을 만든것도 믿음으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정하다'의 히브리어 뜻은 '만들다, 제조하다, 창조하다, 지키다, 실행하다, 준수하다, 실천하다'등이다. 즉 믿음으로 유월절을 만들었고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유월절 지키는 것을 터부시하고 특정 종파 사람들만 지키는 것으로 폄하하고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월절은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지키는 믿음으로 정해진 절기이다. 또한 유월절은 예슈아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타내므로 구원의 시작과 거듭남을 의미한다. 만약 악한 자들이 유월절을 이용한다고 해서 여호와를 위해 지키는 유월절을 포기한다면 결국 우리는 언약에서 벗어나고 말 것이다. 요시야 왕은 나라를 말씀대로 개혁하기 위해 온전하게 유월절을 지켰다. 때와 법을 바꾸는 여로보암의 죄를 시작으로 온 나라가 부패하여 큰 위기에 빠졌을 때, 다시 언약으로 돌이키도록 유월절의 정신으로 개혁한 것이다. 즉 유월절을 통해 율법에 더하거나 뺀 모든 누룩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거듭난 성도들이 지키는 구원의 절기이다(왕하:23:21,25).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23:21,25)
#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히11:29,30)
6 믿음이냐 시험이냐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 땅을 약속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을 믿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다. 반면 애굽 병사들은 여호와가 아닌 애굽의 신을 섬겼다. 즉 이들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종으로 평생 부려먹도록 해주실 이기적이고 불의한 신을 믿는 자들이었다. 종이 되기 싫어 도망치는 이스라엘을 전멸시켜도 된다고 하는 신을 믿는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홍해를 따라 들어갔다. 나름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잡아 죽이려고 따라간 것이다. 아무리 똑같은 기적의 홍해를 건널지라도 이들의 믿음이 올바르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 결코 하나님의 기적이 불의한 자들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을 따라가는 자의 신앙은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단이 예슈아께 시험했다.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고 했다. 그러자 예슈아께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떡을 만드는 기적보다 중요함을 증언하셨다. 혹시 우리는 떡이 되게하는 기적에 집중하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바라지는 않는가? 믿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마4:3,4). 이처럼 불의를 따르느냐 공의와 거룩함을 따르느냐, 기적을 따르느냐 말씀에 충성됨을 따르느냐에 따라 그것은 믿음이 될 수도 있고 시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린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되야 할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3,4)
한가지 더 비교해보자. 북한과 남한의 믿음을 비교해보자. 북한은 김정은을 믿는다. 사실 북한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다. 김정은 교주를 섬기는 사이비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사람들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가? 그들의 믿음은 김정은이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김정은은 기쁨조를 두고 온갖 더러운 짓을 해도 된다. 김정은에 대해 잘못 말해도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죽도록 맞고 일할 수 있다.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고 여성들에게 온갖 악한 짓을 해도 된다. 철저히 계급 사회로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은 김정은을 믿음 것이고 북한의 믿음이다.
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정반대이다. 이 모든 고통당하는 자를 자유케해야 한다. 악한 나치와 같은 세력들은 심판을 받아야 하고 북한은 당장 해체돼야 하며 무너뜨려야 한다.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커다란 수용소이다. 인류를 말살하고 거짓 선동하고 자유를 빼앗는 학살자 김정은은 사형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한국의 믿음이다. 두 믿음은 상반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한국의 가치관은 믿음이 되고 북한의 가치관은 시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도 많은 북한 추종자가 있고 주체 사상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혹은 목사라 할지라도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짓 믿음인 것이다.
#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11: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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