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에 나서야 할 교회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묵시 14,1-5; 루카 21,1-4 /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2024.11.25.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초에 반포한 문서 ‘복음의 기쁨’에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복음화에 나서라고 촉구한 바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교회가 초대받고 있는 시노드는 이를 위한 일관된 교황 메시지의 연장선에서 열리는 행사입니다. 교회는 복음화의 길에 나서야 하고, 상처 받은 이들의 야전 병원이 되어야 하며, 영적 세속성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교황은 촉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복음화의 길에 나서야 하는 교회의 희망이 십사만 사천 명의 가난한 과부들임을 역설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한 바 있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비추어주는 등불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이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성경을 가까이하여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알려줍니다. 구약성경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께서 이룩하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고 미리 알려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신 가르침과 또 실제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신 치유와 구마 등의 행적을 전해주는 복음서와, 그분의 사도들이 복음선포의 사명에 따라 건설한 초대교회에서 맞이한 하느님 나라의 사정을 알려주는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깨달은 계시는 기본적으로 그분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로서 하느님과 같은 반열에 속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 따라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는 완성으로서의 종말에 도달했으므로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새로이 창조자요 구세주로서 우리 개별 인생들과 전체 인류 역사를 창조하시기 위해 이끄신다는 것, 우리는 그 이끄심에 순명하는 만큼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으며, 만일 이를 거절하는 경우에는 그 대가로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될 수밖에 없다는 것 등 가톨릭교회가 믿을 교리로 가르치는 핵심이 내용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소아시아에 세워진 초대교회의 여러 공동체들이 박해 속에서도 이룩한 성취를 바탕으로 하여 앞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질 미래의 전망을 전해주는 기록입니다. 사도 요한은 박해를 받아 파트모스 섬에 유배된 처지에서 동굴에 가서 기도하며 받은 환시를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초점은 예수님과 네 생물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십사만 사천 명의 존재입니다. 이 숫자 144는 12진법의 충만한 숫자인 12의 제곱을 하여 나온 숫자로서 충만에 충만을 더한 숫자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적 정체성이 확실한 신앙인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명은 완성으로서의 종말의 때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만민에게 완성된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할 거울이요 그들에게 진리의 사도직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인류 역사를 창조하도록 부름받은 일꾼으로서 그리스도 교회를 상징하는 아이콘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 교회의 아이콘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합니다. 가난했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한 예루살렘의 과부가 그 사람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풍족한 데에서 가진 것의 일부만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 과부는 가진 것의 전부를 하느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 과부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질 것을 믿고 하느님께 바친 것입니다. 실상 하느님께 바친 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여기서 이 과부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누누이 강조하는 ‘가난한 교회’란 이렇게 예루살렘의 과부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쳐서 가난해 진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가 이 교훈을 잊지 않고 실천했을 때에는 아무리 막강한 박해가 닥쳐도 비록 치명할지언정 신앙의 기개는 흔들림 없이 꿋꿋할 수 있었고 믿는 이들이 반사하는 진리의 빛은 찬란하게 세상을 향해 비추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 교훈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하느님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부자가 되고자 했을 때 신앙의 빛은 희미해지다 못해 민중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서로마, 동로마를 막론하고 로마제국의 국교로까지 대접받았던 그리스도 교회가 제국의 모든 구성원을 신자로 포섭하고 나서도 그 제국을 복음화시키지 못하고 그예 동서 양 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역사적 사실은 뼈아픈 교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중세 시대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서유럽의 게르만 민족을 복음화 시킨 가톨릭교회에게 5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거의 천 년 동안 문명의 주도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짙은 어둠도 따라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사를 담당한 교회 성직자들의 성화를 주장한 프로테스탄트들이 갈라져 나갔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들에 대한 믿는 이들과 교회의 의무를 상기시킨 공산주의자들이 갈라져 나갔으며, 인간의 기본인권인 자유와 평등과 형제적 연대를 주창한 시민들까지 갈라져 나갔습니다.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왕실 다음가는 최대의 부를 소유한 부자였었습니다.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바야흐로 중흥의 기회를 맞이한 한국 가톨릭교회에게도 기회와 위험이 함께 찾아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 이야기는 개별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당연히 해당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의 주류가 된 중산층 신자들이 교무금이나 헌금으로 모아준 교회의 재산 역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져야 우리는 복음적인 교회로 쇄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천둥소리 같이 큰 목소리로 불렀다고 사도 요한이 바라본 환시를 한국 가톨릭교회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도 십사만 사천 명의 일원으로서 가진 것으로도 찬미할 수 있었던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을 모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교훈을 잊어 버린 교회는 짠 맛을 잃어 버린 소금과 같아서 언제라도 세상에서는 물론 하느님께로부터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중산층과 지식층을 교회의 주류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한국 가톨릭교회에게는 이 같은 현실이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알면 기회가 될 것이지만, 모르면 위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