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화석을 남기지 않는다
서 대 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가슴 바닥에서 솟구치기만 하는 물도 있다
자식 잃은 어미의 눈물을 보라
돌 삼킨 거위처럼 꺼억거릴 뿐,
가슴 속에서 꿈틀거릴 뿐,
용암처럼 휘돌며 창자의 내벽을 찢고 있을뿐, 불태우고 있을 뿐,
연기만 뿜어 올리고 있다
불에 달궈진 큰 인두의 날,
목젖은 타고
더는 견딜 수 없는 육신의 한계가 두뇌의
수문을 부수고 가슴에서 치솟은 뜨거운
눈물을 눈으로 코로 입으로 방류한다
몸부림치며,
굉음을 내며 무너지는 하늘, 땅, 그리고 세상
눈물은 화석을 남기지 않는다
솟구친 눈물은 땅으로 떨어져 흙과
섞여 화석이 되지 않는다
눈물은 새끼를 가진 모든 생명의 가슴으로
스미어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출처] 서대선의 시-눈물은 화석을 남기지 않는다(포지션, 2023, 가을호, 43)|작성자 seodaeseon
레이스 짜는 여자
한때 나
종달이 되어 수직으로 날아올라
봄 하늘의 분홍 마음 한입 물고
보리 싹 같은 그대 품속으로 뛰어들면
간질간질 봄 햇살에 달구어진 두 볼에선
복숭아꽃 향기 가득하였는데
한때 나
분홍신 신고서 멈출 수 없는 춤으로
푸른 숲 우거진 그대 정원으로 달려가
연초록 이파리마다 은종을 달아주고
꾀꼬리의 노래 속에 그대와 왈츠를 추며
붉은 찔레꽃 덤불 속으로 들면, 꿀벌들은
사랑의 화살을 꽃 속으로 날리고
스텝이 꼬인 우리는 깔깔거리며
아득아득 멀미를 하곤 했었는데
한때 나
졸졸졸 시냇물 되어 우리 이야기
하류에 차곡차곡 삼각주도 만들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안아주고
태풍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를 만나면
잔뿌리까지 스미어 열에 들뜬
이마에 찬 수건 얹어주었는데
그대가 서 있던 벼랑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붉어진 바다 위로 자맥질 하던 별들이
산호초 속으로 잠수하면
북극에서 부르면 남극에서 화답하는 고래가 되어
그대가 함께 수평선을 넘고 싶었건만
거대한 해일에 떠밀린 나는
이름 모를 해변에서
난파한 채 떠다니는 우리 이야기를
조각 조각 줍고 있는데······
꽃다지
서대선
눈 내린 새벽
남의 집 살러 가는
열두 살 계집아이
등 뒤로
눈 속에 묻히는
작은 발자국
멀리서 대문 닫아거는 소리
-시감상: 여자는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남아 선호 사상이 지배하던 시절
식모라는 이름으로 남의 집살이하러 가던 가여운 누이들
생각하면 슬프고 아프고 저미는 사연들 , 그분들은 다 어디에들 계시는지
자식도 형제 들도 돌보지 않는 ,기초수급을 받으며 목숨이나 근근이 연명하며 독거를 사시는지
--------------대문 닫아거는 소리, 라는 마지막 연이 누선을 건드립니다
서대선 시인
경북 달성 출생
시집『천 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로 작품 활동을 시작
2013년 『시와시학』신인상
2014년 시집『레이스 짜는 여자』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상(문학부문)
2019년 시 평론집『히말라야를 넘는 밤 새들』
신구대학교 명예교수「문화저널 21」편집위원.
이건청 시인의 가족은 아내 서대선(시인. 전 신구대 교수), 아들 이해준(한양대 교수.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딸 이수정(시인, GIST 교수),자부 김지영(공연예술학 박사) 손자 이한울, 손녀 이한결이 있다.
1960년대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현대시 동인'의 멤버이며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양대학교 사법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이다.
하류
· 이건청 ·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세계사, 2005)
[출처] [시 한 편] 하류 이건청|작성자 이서영2bluenote
- 시감상: 해마다 2000 여편의 영혼없는 부박한 신작시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가 안 읽히는 시대에 인터넷 서핑 중
모처럼 혼신을 갈아넣은 시를 접하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오크 통 속에서 잘 숙성된 농익은 포도주 뚜껑을 뻑 따면 물씬 향기가 퍼지듯
읽고나면 취하게 되는 시를 읽는 기쁨은 다시금 잊고 살아온 문청 때의
독서의 진미, 진가를 맛보게 됩니다
따로 또같이 , 외람된 말씀이지만 두분 시도 닮은 꼴입니다
노년기 아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적으로 창작에 몰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건성 휘갈겨온 창작 태도가 부끄럽고
다시금 시창작의 전범을 생각하게 되는 오후 입니다 - 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