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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12년(1517년), 나는 광동첨사(廣東僉使)에 임명되어 해도의 일을 대리하였다. 그 포는 동철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약 5~6척이다. 포신이 길고 굵으며 포신 하단에는 긴 점화공이 있고, 포 5문에 장약을 끼워 순서대로 발사시킨다. 포 바깥 부분은 나무로 둘러싸고 철로 테를 둘러서 파괴되지 않도록 하였다 .배의 뱃전 아래 각 귀퉁이에 4~5개를 배치하여 선창내에 숨겨 두었다 .다른 배가 가까이 오다 그 한 방을 맞으면 갑판이 부서지고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가 세게 된다. 이런 무기로써 해상을 횡행하니 다른 나라 배는 대적할 수 없었다. 당시는 바다의 왜구를 정벌하던 시기였으므로 통역관이 포 한 문과 화약을 헌납하였다. 이 무기를 교역장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백보를 날아갔다. 배에서 필요한 좋은 무기이다. 성을 지키는데에도 역시 사용할 수 있으나 다만 정벌전에서는 쓸모가 없다. 후에 왕성서가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황제께 청하여 천여대를 만들어 변방 세곳에 보냈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불랑기포는 1517년 중국 광동에서 전래되었다. 1521년 동광현 백사의 관리 하우가 비밀리에 포르투갈 배로 사람을 보내 여러해에 걸쳐 포르투갈에 머물며 여러해에 걸쳐 대포주조술을 익힌 중국인 양삼과 대명등을 접견하고 이들을 상륙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모방하여 불랑기포를 만들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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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국에서 불랑기포를 주조하게 된 기원이다. 당시 명나라에서 주조한 것은 동포(銅砲)로 형태는 불랑기(포르투갈) 및 자바국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았으며 길이도 알맞고 포구멍도 매끄러워 사용할만 하였다. 가정 원년(1522) 명군이 광동 신회현 서초만 전투에서 포르투갈 군대와 싸워 이기고 불랑기 동포를 노획하였다. 포의 길이는 5~6척, 큰 것의 무게는 1,000여근, 작은 것은 150근, 사정거리는 100여 장(丈) 이상이었다 . 가정 9년 신임 병부상서 왕횡은 불랑기포가 군사적으로 뛰어난 무기이며 작은 것의 무게는 20근 이하로 사정거리가 600 보 이고, 큰 것은 70근 이상으로 사정거리가 5~6리 라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불랑기포를 주조하여 서부 연변의 중요한 진을 지킬 것을 주청하였고 가정제의 비준을 얻어 남경에서 정식으로 주조하였다. 그리고 주조기술자를 광동으로부터 초빙하였다.

이상의 기록등을 통해 불랑기포가 중국으로 전래되고, 이를 모방해 제작한 시기는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진입하기 이전임을 알 수 있다.

가정 32년 (1553년)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진입하고 난 후 이곳을 임대하여 거주하게 된 이래 에스파냐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이 마카오에 진출을 시도하자 이들과 여러차례 쟁탈을 된데다 동남아 및 세계각국의 무역 시장 수요가 늘어나면서 마카오의 대포 주조 산업은 16세게 중반 이후 부터 흥기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가정 36년 (1557년) 포르투갈의 대포 주조 전문가인 페드로 타보레스 보카로(Pedro Tavorres Bocaro)는 서망 양반산에 대포 주조공장 한 채를 지었다. <오문계무설첩>에는 "1557년 중국 정부가 바야흐로 포르투갈인이 그 섬의 동쪽에 공장을 건립하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서 건축을 실행해 옮기게 된 효시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력 48년(1620) 대포 주조 공장은 발전하여 처음으로 규모를 맞추어 동포 뿐 아니라 철포도 주조하였다. 철포는 불산의 주철 노동자를 초빙하여 조조한 것이었고 동포는 포르투갈인이 주조한 것이다. 대포 주조 공장에서 사용한 원료 가운데 철과 화약은 중국 내지에서 공급된 것이고 구리는 대부분 일본에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 이 공장에서 주조한 동포는 기본적으로 불랑기포를 모방한 것으로 길이 5-6 척에서 큰 것은 무게가 1,000 근이었고 작은 것은 150근 정도였다. 후에 끊임없이 개선되었는데 갈수록 크기가 커져서 길이가 1장이 되어 3,000 ~ 5,000근 까지 되었다. 구조도 갈수록 복잡하고 정밀해졌으며 사정거리가 50 ~ 60리에 이르렀다. 이지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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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가운데 큰 것은 길이 1장, 둘레 3~4척 구경이 3촌(寸)이다. 그 안에 넣는 화약은 서너 승(升)이고 철조각과 납조각을 섞어 쓰는데 외피는 정련된 철을 입힌 큰 포탄으로 되어있다. 포탄의 지름 역시 3촌이고 무게는 3 ~ 4근이다. 포신은 구리로 만들기도 하고 철로 만들기도 하는데, 무게는 약 3,000 ~ 5,000 근이다. 발사를 위해 수레게 갖추어져 있는데 지면에 평평하게 고정시키는 받침대가 있으며 조그만 바퀴가 있다. 멀리 혹은 가까이 포를 쏘기 위해 사정거리를 새겨놓고 포신을 올리고 내리는데 모두 일정한 격식이 있다.

천계 5년 (1625)에서 순치 2년 (1645)에 이르는 사이 대포를 주조하는 이외에도 위력이 강한 포탄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 제작방법은 "원형 가운데를 파내어 여러번 제련한 철근과 함께 묶는데 그 길이가 1척이 넘는다. 이곳에 불을 불이면 탄이 날라가면서 철근이 곧바로 난폭하게 전진해 나가게 된다. 이 때 20 ~ 30리내에 있는 거목이 부러지고 견고한 성도 뚫리며 파괴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밖에 납으로 만든 탄의 위력은 가히 50 ~ 60리에 이른다."
이 주조공장은 생산과 판매를 모두 담당하기 위해서 불랑기포 양행(洋行)을 설립했다.이 양행은 대포 주조공장의 총지배인이었던 보카로의 아들인 마누엘 타보레스 보카로(Manuel Tavorres Bocaro)가 운영하였고 그런 까닭에 이름을 "만노양행(蠻奴洋行)" 이라 하였다. 이 공장에서 주조하는 대포의 수량은 끊임없이 증가하였고 주조
기술도 정밀하고 뛰어나서 생산은 갈수록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산과 판매 양면에서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첫댓글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명나라에 관심이 많았는데 흥미로운 소스라고 생각한 나라인데..아아..정말 감사합니다.좋은자료보고..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중세동양의 화기는 꽤 발달했군요. 제가 어렸을적 처음읽은 한국사에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화승총에 조선인들이 처음보는 무기인냥 놀라는 모습으로 묘사했던 기억이...
이거 옛날에 있었는데...아마 게임의 신동님께서 퍼온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의 경우 발견된 유물상으로는 1560년대에 들어온 불랑기포 자포가 바다에서 인양된 것으로 보아 이미 수군에서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전에서 이 불랑기포 발사시범을 보였다고 하나요??
불랑기의 원류는 유럽이니까 ㅡㅡ;; 이제 화약무기의 주도권은 서양으로 옮겨간게죠.가스코뉴의 총사가 유명해 지기 시작하면서..
대단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