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훈(月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목은 싫어
삐걱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소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하관 / 박용래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하관(下棺)
선상(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구절초 /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에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