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기억력 나쁜
고물 PC를 새 걸로 바꾸기로 결심.
언젠가 PC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삼성 알라딘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내 글이 안 되는 건 순전히
도구가 용산 조립품 286AT이기 때문이라
밤마다 기도하며 써 보았지만
고매해야 할 내 시들은 언제나 날림 조립식인 걸
알라딘을 사야지!
그의 자판을 요술 램프처럼 살살 만져 주면
나만의 유능한 종이 나타나
내 명령어들을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넘치는 하드 용량,
풍만한 그의 언어는
이 미궁에서 나의 탈출을 도우리라
사실 이 느림보 286AT에도 요정이 있다
언젠가 치약으로 열심히 PC 본체를 닦다가
난 보고 말았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
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를,
나를 비웃으며 다시 제 집인 양 기어 들어가는
그 자식을 향해 재빨리 플로피 디스크를
몇 번이나 쑤셔 넣었다 뺐다 하며
압살을 노렸지만 디스크만 에러났던 기억.
가끔 모니터 속의 내 글 위로
그 바퀴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그는 너무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어쩌면 이전에 헥사를 지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는 것도
그 요괴임에 난 짙은 혐의를 두었다
베네치아 워드게임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내려와 나를 덮칠 때,
난 확신하였다
나의 체제는 이미 위협받고 있었다
놈은 밤마다 용량 작은 하드를 기웃거리며
내 글을 비웃을 거 아닌가?
무슨 시가 이래, 하면서도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연애시를 도용해
행여 또래 암컷들을 사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의 신성한 작업실에서……
온갖 상스런 상상들이 아!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
아, 나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 김창진, [알라딘을 사야 한다] 전문 {문학예술} (1998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