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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동(2026.3.15. 사순절 제4주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편 23:1-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봄이 오면 겨우 내내 죽은 듯 잠잠하던 땅이 다시 숨을 쉰다. 얼었던 흙이 풀리고, 앙상하던 가지에서 연한 잎이 돋고, 보이지 않던 생명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을 두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가장 일찍 봄을 알리는 변산바람꽃은 얼음 속에서 꽃을 피운다. 요즘 한창 들리는 홍매화 소식을 보면 겨우내 죽은 듯한 마른 나뭇가지에서 피어난 붉은 색 꽃이 신비하다.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생’한 모습이다.
‘소생’이란 표현은 마치 새봄을 찬미하는 관용구처럼 사용된다. ‘소생’(蘇生)에서 ‘소’(蘇)는 되살아나다, 깨어나다, 회복되다는 의미이고, ‘생’(生)은 살아나다, 생명을 얻다, 존재하다는 뜻이다. 평소에 자주 쓰는 단어인데, 봄에 비유하여 사용하니 새삼스럽다.
‘소생’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본래는 기운이 끊어진 사람이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것을 뜻한다. 말 그대로 죽은 듯한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한 회복이다. 죽을 뻔한 상태에서 다시 기력을 얻는 것이다.
봄은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함이 없다. 불문학자 황현산이 한 말이다. “옛날에는 봄노래가 아주 많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 봄이 오기를 그렇게도 기다렸던 것. 봄이라고 말만 해도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봄이 오면 오나보다 하고 만다. 난방도 좋아지고 따뜻한 옷도 많고..” 그래서 감동이 적어졌다는 아쉬움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처럼, 우리의 삶에도 그런 생기가 돌고, 생기가 피고, 삶이 회복되는 그런 새봄을 맞이하길 바란다.
1)
성경은 자연의 봄보다 더 깊은 차원의 봄을 말한다. 그것은 영혼의 봄, 곧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사건이다.
오늘 설교 본문은 시편 23편이다. 마침 사순절 넷째 주일의 성서일과 본문이다. 시편 23편은 ‘지상 최대의 시’라고 불릴 만큼 가장 유명한 시이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고백하는데,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전반부인 1-4절에서는 하나님은 ‘좋은 목자’라고 고백하고, 후반부인 5-6절에서는 하나님은 따듯하게 손님을 맞아 주시는 ‘친철한 주인’이라고 증거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1-2).
시편 23편의 배경은 짐짓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워 그저 목가적인 노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닥친 어려운 현실을 그냥 지나쳐 보기가 쉽다. 사실 시편 23편이 사랑받는 이유는 보통 사람이 겪는 위험 가운데에서 뜻밖에 구원받은 경험 때문이다.
인생은 얼마나 고달픈가? 전반부에서는 양 떼가 겪는 목동의 위험에 대해서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나를 뒤쫒아 오는 원수들에 대해서 말한다.
오죽하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4)라고 비유했겠는가?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해 자만할 수 없고, 아무도 예고없이 찾아오는 삶의 위기 앞에서 오만할 수없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5)라는 표현도 예사롭지 않다. 누구도 닥쳐올 미래에 대해 장담할 수 없고, 아무도 쉽게 건너뛸 수 없는 인생의 늪이 있다.
시편 23편은 그럴 때마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키시는 ‘목자 중의 목자’요, 원수가 나를 쫓아오는 상황에서 친절히 맞아 주시는 ‘주인 중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마치 좋은 목자와 좋은 주인처럼 위험을 물리쳐 주고, 친절히 맞아주시며, 평화를 주신다. 가장 유명한 다윗의 고백은 이런 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목동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아주 실제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불안에 떠는 자들이나,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실제적인 분명한 도움이 되셨다.
하나님은 목자처럼 ‘지팡이와 막대기’(4)로 양을 돌보신다. 목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도구인 ‘지팡이’(미쉬에네트)는 양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것이며, ‘막대기’(쉐베트)는 맹수를 막는 무기로 쇠조각을 단 몽둥이이다.
또한 주인이신 하나님은 뒤쫓던 원수들을 향해 나보란 듯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 주신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는 것과 잔이 넘치도록 따라 주는 것은 최상의 손님을 대접하는 모습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고난당하는 사람을 돕는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언제나 변함없다.
2)
시편 23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고, 끝맺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그 이름, ‘여호와’의 본래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이다. 단순히 ‘존재한다’ 또는 ‘있다’가 아니다. 정확한 의미는 “내가 (너희를 위해) 거기 있으리라”이다. 새번역성경에서는 여호와 이름 대신 주님이라고도 옮겼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4)에는 임마누엘의 약속이 담겨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 이름의 집’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왕상 8:29).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에 나아와 기도드리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시편 23편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름을 걸고 사람을 돌보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 즉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잃을 수 있다. 기력이 쇠하여 기진맥진할 수 있다. 인간의 도움이 소용없을 때가 있다. 다윗은 고백한다. 그럴 때에도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힘을 믿으라는 것이다.
시편 23편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단순히 시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의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 은혜의 사건을 말한다. 사계절에서 봄은 죽은 땅이 다시 살아나는 계절이다. 그러나 성경은 더 깊은 차원의 봄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봄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에서 ‘소생’은 단순한 기분 회복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원어는 ‘슈브’인데 그 뜻은 ‘되돌리다, 회복시키다, 다시 살리다, 원래 상태로 돌이키다’란 의미이다.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이 지친 내 영혼을 다시 생명의 자리로 돌려놓으신다’는 말로 통한다. ‘영혼의 소생’은 세 가지 차원이 있다.
먼저 마치 겨울 뒤에 봄이 오듯 지친 영혼이 회복된다. 죄, 실패, 낙심, 피로로 약해진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힘을 얻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소생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기도가 살아나고, 믿음이 다시 숨 쉬며, 생기가 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혼의 소생과 함께 오는 삶의 방향 회복이다. 소생은 단지 살아나는 것을 넘어 다시 의의 길,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아무리 심폐소생술로 다시 깨어나도, 이전의 잘못된 습관과 오염된 삶을 버리지 못한다면 열 번 깨어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생각해 보자. 봄이 오면 사람의 마음이 자기 의지로 설레고, 밖으로 나가고 싶고, 무언가 시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봄에 햇빛과 바람과 비가 조용히 땅을 깨우면서 생명은 조금씩 스스로 일어난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말씀과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 굳어 있던 영혼이 풀리기 시작한다. 기도의 숨이 다시 살아나고, 믿음의 싹이 돋아난다. 그래서 영혼의 소생은 인간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절이다.
자연의 봄은 겨우내 기다려서 일 년에 한 번 오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봄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아무리 겨울처럼 차갑고 메말랐어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고백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신앙의 확신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계절을 바꾸시는 분이다. 겨울 같은 마음에도 봄을 불러오시고, 지친 영혼에도 다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다.
그러므로 봄을 느끼고, 꽃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를 그 은혜 가운데 걸어가게 하심을 믿습니다.’
3)
최근 들어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이 크게 늘었다.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이다. 이전의 전쟁들과 달리 우리나라와 세계는 직접적으로 그 영향권 안에 있다. 당장 휘발유값이 피부에 와닿는다. 세계 어느 나라든 남의 일이 아니다.
뉴스는 전쟁 소식을 지상 중계하고, 전쟁 당사자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지만, 정의의 관점은 없다.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지난 2월 28일 이란 샤자라 타이예베 여학교가 미사일 공습으로 165명 이상의 어린 학생이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에 대해 계속 책임을 묻는데 주저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과연 우리 세상의 위기 속에서 참 피난처는 무엇일까? 현대의 과학 문명과 고성능의 전쟁 무기가 평화를 지켜 줄 수 있을까? 그동안 과신해온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이, 또 각종 보험과 보장들이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가만히 현실을 돌아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안전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였다. 오히려 인간의 지적, 과학적, 물질적 오만함은 겸손히 의지해야 할 하나님의 피난처를 부정하게 하였다. 우리는 이 세상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주장하는 거짓 목자들에게 홀리고 말았다.
마틴 루터가 시편 46편을 통해 고백하는 ‘내 주는 강한 성’은 각종 사회 안전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만이 평생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 기도가 나를 흔들림 없이 견고히 지켜주실 것이란 믿음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전쟁의 승리를 돕는 분이 아니라, 전쟁의 종식을 이루시는 분이다. 푸틴 곁에서 전쟁의 승리를 축복하는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나, 트럼프에게 안수하며 전쟁을 정당화하는 소위 복음주의 목사들의 행태는 엄마나 반성경적인가? 세상은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가방을 두고 내린 적이 두 번 있다. 선반에 올려두었다가 깜빡한 것이다. 순간적이다. 4호선 분실물 센터는 충무로에 있다. 두 번 가보았고, 그 때마다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가 참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실물 센터 담당자에게 가장 많이 습득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무엇일까? 성경과 우산이란다. 문제는 분실이 아니라, 찾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분실물 센터는 잃은 물건이 쌓이는데, 주인이 찾아가지 않아 골치 아프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세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분실물 센터이다. 우리는 교만하고, 풍요롭고, 이기적이어서 오히려 소중한 보물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무엇을 잃어 버렸는지 알지만, 알고 있어도 찾지 않는다. 공짜 우산도 많고, 성경은 집에 가면 또 있다.
우리 마음 역시 분실물 센터이다. 인간의 교만함, 풍요로움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까지 잃어버리게 하였다. 그것이 오늘 우리 세상을 병들게 하고, 끝없는 재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영적 소생이고, 믿음의 회복이다.
사람들은 시편 23편도 잃어버렸다. 입으로는 위대한 시를 외울찌라도, 삶은 그 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당장 분실물 센터를 찾아갈 일이다. 우리 마음 속 충무로를 방문하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오늘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가? 또 지금 우리가 회복할 것은 무엇인가? 그 이름이다. 그 능력이다. 그 사랑이다. 이제 다시 고백해야 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그 이름, 그 능력, 그 사랑을 회복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라. 사순절은 영혼을 소생하려는 열심을 내는 특별한 기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언제나 우리 모두와 같이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