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09 19:29
프로메테우스의 오창엽님의 글을 펐습니다
경성 트로이카
오창엽 메일보내기
공산당 재건을 위한다며 강령 따위를 논의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은 피했다. … 그는 합법과 비합법을 교묘히 얽어내는 데 탁월한 수완이 있었다.
1. 형상과 전형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는 오래 전에 읽었던 몇몇 소설들을 생각나게 했다. 정화진의 <쇳물처럼>(1987)의 깔끔함,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1991)에 실린 높은 완성도의 중단편들 그리고 수감생활 이야기가 많다보니 김하기의 《완전한 만남》(1991)도 떠올랐다. 역사적 사실과 실존했던 인물들을 소재로 한 소설이기에 리얼리즘론에 관한 옛 기억들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내 머리 속을 맴돌던 책은 蔣孔陽의 《形象과 典型》(사계절, 1987))이었다. 그 세세한 이론과 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나, 나는 안재성이 전개해 나가는 이 장편소설에서 ‘형상’과 ‘전형’을 살피곤 했다.
형상은 반드시 일정한 개념을 표현해야 하므로 작가 · 예술가는 형상사유를 운용하여 형상을 빚을 때에, 간혹 논리사유의 방식을 채택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을 묘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학예술에 있어서는 개념이 형상에 따라야 하므로 형상을 빚어내는 과정에서 반드시 논리사유는 형상사유에 복종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작가가 재료를 수집 · 정리 · 분석하거나 혹은 창조한 형상을 논의 · 평가할 때 비록 논리사유를 항시 운용하더라도 이 논리사유는 오직 형상사유의 구상이 그 자신의 조건을 예비하거나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목적에만 운용되는 것이어야 한다.(59쪽) - 《形象과 典型》
내가 그 책을 읽은 게 80년대 후반이고 이제 와서 다소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80년대 맑스주의 문예이론에 대해 새삼 관심과 애정이 솟는 건 아니다. 2004년에 나온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에서, 작가는 사회주의를 회의하지만 그가 기초로 하는 창작방법은 80년대 남한에서 유행하던 리얼리즘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절의 사회주의자들, 경성트로이카 주요 인물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지도부들에 대한 기록이고 그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소설이니 당연히 소설 곳곳에 혁명이론과 변혁사상의 ‘논리’를 다루는 곳이 많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 되는가 인물들의 삶과 생각을 묘사하여 그 사상을 소화하는 가를 주목했다.
역사학도나 정치사상을 전공한 독자는 《경성 트로이카》에서 어떤 역사적 사실의 재현 여부와 작가의 평가, 관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한때 진지하게 연구했던 문학예술에서의 리얼리즘에 관한 측면을 좀더 많이 염두에 두었다. 이재유는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에서 ‘국내파’와 ‘국외파’의 입장 차이의 논쟁에서 매우 결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재유노선이 옳았는가. 그의 조직 건설방식, 운영방식, 활동방식은 적절했는가? 이런 주제를 분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분야는 주로 연구서와 논문에서 다룰 문제다. 이재유라는 인물을 작가가 어떻게 가공하고 재창조하여 생생한 인물로 되살리는 가가 소설의 관건이다. 그것에서 실패하면 소설의 미적 요소가 약화되며 결국 감동도 떨어진다.
《경성 트로이카》를 읽고 난 사람들의 반응이 대체로 시큰둥하다. 나는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괜찮은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일제시대의 사회 모습을 묘사하는 데 약간 구체적이지 못한 느낌이 내내 들었다. 그런 점이 어쩌면 이 비극적인 인물들의 간난고초에도 불구하고 소설 전반이 약간 낭만적으로 채색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경성 트로이카》는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보다 오늘날의 변혁운동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들이 더 많이 읽어보는 것 같다.
이것은 리얼리즘 소설이다. 그러므로 리얼리즘에 관한 요소들을 고려하면 더욱 좋다. 특히 형상과 전형이라는 범주들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그 맛이 훨씬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경성 트로이카》를 읽는 것이지 《이재유 연구》를 읽는 게 아니다.
2. 우연과 운명
《경성 트로이카》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의 생활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일까. 진실의 측면에서 몹시 궁금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경성을 중심으로 한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의 사회주의운동 조직원들의 삶과 투쟁이고 또 하나는 그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효정과 작가 안재성의 만남이다. 이효정과 안재성이 이미 어떤 사회주의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지난날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의 의미와 그 혁명가들의 빛나는 투쟁이 분명 아름다웠음을 나지막하게 웅변하는 소설이다.
1990년대 초반 안재성은 김경일의 《이재유 연구》(창작과 비평, 1993)라는 책 때문에 경성트로이카를 이끌던 혁명가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으나 훗날 자신이 그에 관한 소설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재유나 경성트로이카를 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생각은 품지 않았다. 소련과 동독 등 사회주의 정권이 차례로 무너지던 시대였다. 무엇이 그들을 붕괴시키고 있는가, 과연 무엇이 인류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사회구조인가? 확고한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도 인류의 미래가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경성트로이카를 이끌던 이들의 이념에 대한 신뢰가 없는 가운데 그들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8쪽)
그러던 그가 우연히 인사동의 어느 화랑에서 이효정의 아들의 조각 작품들을 보게 된다. 이효정이 쓴 《여든을 살면서》와 《회상》이라는 시집을 읽게 된다. 그녀의 아들로부터 “어머니와 그 동료들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는 말과 그 저자가 김경일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우연은 운명이 된다.
70년이나 덮여 있던,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알아서도 안 되었던, 한 양심적인 학자에 의해 그 뼈대만이 발굴된 경성트로이카가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하필이면, 소설미학의 완성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더 좋아하는 삼류소설가를 찾아와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17쪽)
3. 이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에요
안재성이 이효정 할머니를 찾아가고 이 소설의 얼개를 이루는 옛일들을 듣게 된다.
“감옥에 가면 어떻습니까? 감옥이 어떻게 변했나 구경도 하고, 감옥 식사가 얼마나 좋아졌나 먹어 보고 싶습니다.”
… 할머니는 대화가 끝날 무렵, 쉰 목소리로, 그러나 한 단어, 한 단어 정확하게 또렷이 말했다.
“지금 와서 살펴보면 사회주의는 현실에 맞지 않지요. 비현실적이에요.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사회주의가 민족의 장래를 밝히는 하나의 횃불이었습니다. 민족해방의 길을 열어주고, 또 그것을 위해 끝까지 싸웠으니까요. … 나는 젊음을 사회주의운동에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말하다 말고 손을 저으며 웃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이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에요. 이젠 아니에요.”(20-22쪽)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소설을 읽는다. 여든을 살아온, 젊어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다 겪고서 이제 담담히 임종을 기다리는 한 노인이 저렇게 말하는데, 우리들도 모두 평생을 지나보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저 부정은 이 소설의 마지막 두 장을 읽으면서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이미 죽은 영혼들과 목숨을 부지했으나 못 볼 역사를 다 보게 된 영혼들이 왜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일제 시절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그 빛나는 투사들이 해방 이후 남북한의 정권으로부터 모조리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즉 이효정이 부정하는 사회주의는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그 사회주의 국가들, 현실사회주의였던 것이다. 소설 전체를 다 읽고 나서 다시 앞부분의 이 인터뷰를 다시 읽으면, 아프다. 아프고 분노가 치민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게도 확신하고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하게 품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회의하면서 작가는 그에 관한 소설을 세상에 내 놓는 것에 대해서 주저했다.
사회주의 이념이 권력을 잡기 전인 일제시대에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다 죽어 간 혁명가들의 생애를 복구하는 일은 의미가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의 긍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이념이 가진 근원적인 문제를 가려 버리는, 내 스스로 원치 않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1920년대 중반 이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매국노로 돌아선 대다수 우익 보수주의자들을 대신해 일제에 저항한 유일한 독립운동이었기에 복원해야 한다는, 남북 어디에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죽어 간 그들을 위해 진혼곡을 연주하리라는 내 마음의 약속이었다.(26-27쪽)
안재성의 이러한 고백은 진실이다. 이 소설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의 올바름이나 사회주의운동의 부흥을 위해 도움을 얻으려는 독자들은 다소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성트로이카가 어떤 조직이었는지, 이재유와 그 동지들이 어떤 활약을 했고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었고 해방 이후 그들이 모두 어떻게 잊혀지게 되었는지를 단 한권의 책으로 조망해 보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매우 유용하다. 작가 안재성은 애써 그 효과를 우려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새로운 세기의 사회주의운동의 재건과 전진을 위해 노력하고 안 하고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4. 감옥에서 만난 평생의 동지들
이효정과 박진홍 등이 동덕여고를 다닐 때 이관술이 역사선생으로 왔고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그 무렵 이재유는 일본에서 붙잡혀와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이현상과 김삼룡을 만난다.
이재유는 천성이 착하지 않은 사람은 사회주의운동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인물들만이 사회주의운동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와 같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나라에서는 출세주의자나 기회주의자들이 있을지 몰라도, 고문과 감방밖에 얻을 게 없는 가혹한 일제 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이타적이고 선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 이재유는 『자본론』을 통독한 것과 함께 이현상과 김삼룡 두 사람을 만난 것이 긴 감옥 생활의 커다란 수확이라고 말하곤 했다. 형무소 안에서 의형제처럼 친해진 세 사람은 석방되면 꼭 함께 일하기로 약속했다.(100쪽)
그 약속은 그들의 남은 일생 동안 지켜진다. 김삼룡은 1932년 이월, 이현상은 오월, 이재유는 십이월에 출소했다. 나중에 경성트로이카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주의운동, 재건 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석방된 것이다. 당시 박헌영은 국외에 있었다. 김삼룡은 인천으로 이현상은 동대문으로 노동운동을 위해 배치되고 이순금을 통해 동덕여고 운동가들이 이재유와 연결된다.
“조선의 사상운동이 바로 일어서려면 러시아처럼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조선의 노동자 농민의 의식 수준은 매우 낮기 때문에 혁명적 의식과 실천 의지가 있는 지식인들이 생산현장에 파고들어 그들의 의식을 배양한 후 전위를 조직해야 합니다. 투쟁을 통해 단련된 노동자와 농민들, 또 현장 활동에서 단련된 지식인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갈 때 조선의 당조직은 진정한 혁명조직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네 처녀를 사로잡았다. 진지하고도 열띤 모임은 점심을 먹고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각자 다니는 공장의 실태에 대해 물어 보고, 사회주의 학습 모임을 조직하기 위한 방법과 학습 내용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일본에서부터 노동운동의 경험이 풍부한 그는 정치의식이 없는 노동자들을 모으는 방법부터 사소한 싸움을 통해 훈련시키는 방법, 학습 모임에서의 보안 규칙까지 생생한 체험을 들려주었다.(108-109쪽)
공장에서의 성과와 더불어, 이재유 조직은 경성 시내 학교에 치밀하게 뻗어 나갔다. 헌신적인 운동가를 지속적으로 배출한다는 점에서 학생 조직은 노동자 조직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재유는 공장 일을 이현상과 김삼룡, 이순금에게 전담시킨 가운데 정태식, 안병춘 등을 통해 학교 조직에 많은 시간을 배분했다.(113쪽)
5. 강령 따위를 논의하느라
공산당 재건을 위한다며 강령 따위를 논의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은 피했다. … 그는 합법과 비합법을 교묘히 얽어내는 데 탁월한 수완이 있었다.
조직의 이름을 따로 정하지 않았으나 이재유는 가끔 이 특이한 조직 방식을 트로이카식 조직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말로 세 마리의 말이 동등한 힘을 갖고서 마차를 이끄는 삼두마차라는 뜻이었다.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따르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라는 뜻이었다.(115쪽)
조국의 국경을 넘으면 무장 투쟁 같은 새로운 활동을 선택해야지, 편지 한 번 주고 받는 데도 한 달이 걸리는 그 머나먼 땅에서 이곳의 운동을 지도하겠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 “국내 상황을 전달하는 데 한 달 잡고, 다시 인쇄해서 들어오는 데 석 달이 걸린다는 이야기인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노동 현장을 넉 달 전의 지침으로 지도하란 말입니까?”(119쪽)
이재유는 파업장면을 보고 싶어 했다. … 지도부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도 멀리서나마 노동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했다.(124쪽)
(이효정에게) … 계급을 물어왔다.
“양반입니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을 양반, 중인, 평민, 상인의 네 등급으로 구별했다. 이관술과 이순금 오누이는 양반이었고, 이재유는 평민, 박진홍은 최하계층인 상민에 속했다. 1937년도에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일본은 봉건제도를 유지했다.(140쪽)
당시 이재유는 두 번 붙잡히고 두 번 감옥에서 탈출한다. 또한 미야케의 집 지하에서 38일 동안 토굴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의 신출귀몰한 탈출 사건들과 활약은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다. 안전을 위해 이재유는 아지트 키퍼인 박진홍과 부부가 된다.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여자가 일본 경찰에 잡혀 어떤 고문을 당할까,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단순히 물리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극도의 수치심과 모욕으로 인간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 피폐하게 만들었다. 다시는 진리의 빛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202쪽)
6. 비판과 칭찬, 조직과 기관지
전반적으로 안재성이 이 소설에서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을 높이 평가하고 이른바 국제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후기의 이재유를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사실 아내 때문에 잡힌 것도 그가 세운 보안원칙을 스스로 어긴 것이다.
… 이재유는 서구원의 제안에 동의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지방협의회’라는 이름의 통일기관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는 팸플릿을 작성했다. … 이재유는 자신의 주장이 영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조직 이름을 남발했다. 서구원을 경성트로이카의 대표로 내세우고 자신은 서대문 경찰서에서 탈출해 상왕십리 아지트를 벗어날 때까지 팸플릿에서 사용했던, 경성재건그룹 대표자로 자처했다.
경성트로이카는 정확한 가담자만 이백 명에 이르렀고 제2기 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경성재건그룹 역시 오십 명이 넘는 조직원을 가진 큰 조직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둘 다 완전히 와해된 상태였다. 제3기 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은 이재유와 이관술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로 구성되고 있었고, 아직까지 그 숫자가 스무 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체는 사라진 채 이름만 남은 두 조직의 대표로 서구원과 자신을 내정한 것은 분명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한 용렬한 측면이 있었다.(231쪽)
권영태그룹과의 제휴에 실패한 이재유와 이관술은 자신들의 조직 명칭을 ‘경성준비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일했다. 제3기 트로이카의 정식 출범이었다. 사실상 이름만 바꾼 데 불과했으나 이재유는 여전히 조직 건설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경성재건그룹 명의의 기관지 『적기』를 발행하기로 했다. … 실질적인 파업투쟁이 없는 상황에서 기관지를 매개로 한 만남과 토론마저 이뤄지지 않는다면 오십 명이라는 조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 이재유의 생각이었다. … 직접 등사기를 만들기로 했다.(232-234쪽)
『적기』를 통해, 이재유는 당대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내용들이었지만, 먼 훗날 대부분 합법화된 내용들이었다.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실시, 출판과 집회의 자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 주 오일제와 같은 의미가 되는 주당 사십 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하루 일곱 시간 노동제 같은 것들에서부터 일 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 임시직 근로자 문제까지 다루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요구들이었으나 그의 상상력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 경성에서 활동한 다른 조직들이 거의 기관지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기』의 발간은 놀라운 사건이었다.(235쪽)
1936년 12월 25일 오전 11시, 창동역 부근에서 마침내 이재유가 검거된다. 그의 체포 소식은 다섯 달 동안 혹심한 고문을 당한 후 1937년 4월 30일과 5월 1일자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일본어로 발간되는 『경성일보』는 이 날 호외를 발행해 ‘집요흉악의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하다’라는 표제 아래 ‘이십 년에 걸친 조선공산당 운동사는 이제 최후의 일혈이 완전히 봉쇄되고, 이로써 조선공산당 운동에 의한 모든 화근은 종식되었다. …’라고 보도하였다.(239쪽)
7. 이재유와 그람시
“피의자의 근본 사상은 무언가? 무엇을 위해 이런 활동을 했나?”
이재유는 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본어로 말했다.
“나의 근본 사상은 조선에 공산주의 국가를 만드는 일입니다.”
“공산주의 국가 만드는데 조선의 독립은 무슨 까닭으로 필요한가?”
“내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일본에서 독립하지 않은 이상 언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없고, 또 설령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해도 일본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검사는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다가 야릇한 비웃음을 띄며 말했다.
“내 검사 생활을 오래 했지만 너같이 철두철미한 사상범은 처음 보았다. 네가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제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240쪽)
그 검사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마흔의 이재유는 해방을 앞두고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병사했다. 십년 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정권은 ‘그람시의 두뇌’를 20년간 가둬두기로 결정했다. 1926년 체포된 그람시는 20년 형을 선고 받고 1937년에 사망했다. “우리는 20년간 저 두뇌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 두어야 한다.”(304쪽) - 《그람시》(두레)
재판 과정에서 이재유는 {이미 석방되었거나 전향의사를 밝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적당히 진술을 했으나 보호가 필요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려 들었다.}(274쪽) 그가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이들은 김삼룡, 이현상, 이주하 등이었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을 지키는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가진 듯했다.}(276쪽) 그는 재판 과정에서 전향을 약속하거나 자신을 위해 비굴하게 진술하는 이들에 대해 조롱도 하였다.
“나 개인은 공산주의자고, 공산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출옥 후 수백 명의 사람들과 회합한 것은 물론 공산주의를 위한 것이라 하여도 피고인 변우식, 서구원, 최호극 등은 누구도 공산주의자라고 칭할 만한 의식수준에 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운동을 위해 생명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자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나는 공산주의 활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280쪽)
국내의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식인들이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인민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이광수는 히틀러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 『나의 투쟁』을 번역했다. … 이 암흑의 시대에 국외가 아닌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움직인 전국적인 저항 세력은 ‘경성꼼그룹’이었다. 1939년부터 시작되어 1941년 말에 끝난 경성꼼그룹의 활동은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총결산으로, 그 주모자는 이관술이었다.(285쪽) 출옥한 김삼룡과 이현상이 이순금과 이관술을 만나 경성꼼그룹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지도부를 결성했다.
감옥에 있는 이재유를 제외한 경성트로이카 핵심들이 모두 다시 모임으로써 경성꼼그룹은 실질적으로 경성트로이카의 복구인 셈이었다. 현장 투쟁을 통해 검증된 이들로 전위 조직을 구성하겠다던 이재유의 구상이 마침내 현실로 증명된 것이었다. … 한편, 경성꼼그룹은 조선공산당 창설 주역의 한 명으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대표적인 상징인 박헌영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 이관술이 인천에 기관지 편집을 위한 별도의 아지트를 마련하여 박헌영을 안주시켰다. 농담 좋아하고 감성적인 이재유와 달리, 박헌영은 공장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거의 웃음을 보이지 않는 냉랭한 표정의 전형적인 지식인 혁명가였다. 대신 그는 사람을 압도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들어옴으로써 경성꼼그룹은 확실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287쪽)
8. 일제 말기 전향하지 않은 혁명가들, 남북한에 의해 모두 살해되다
이재유가 죽고 나서 박진홍은 김태준과 ‘연안행’을 결심한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귀국한다.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일제 말기에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운동을 계속한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박헌영을 대표로 김삼룡, 이현상, 이주하, 이순금 등이 중앙위원으로 정태식, 외관술 등이 간부로 선출되었다. 13년간 감옥살이를 한 김형선도 석방되자마자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신탁통치 논란이 일어났다. 김태준은 서울대학교 총장 후보로까지 올랐지만 좌익이라 해서 수천 명의 학생들과 함께 쫓겨났다. 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 달러를 찍었다는 혐의로 이관술이 잡혀 가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박헌영, 이현상, 이주하는 월북하고 김삼룡만 남았다.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을 창건했다.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으로 격하되었다.
식민지 조선이나 남한에는 최소한의 법률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를 어기지 않는 한 마음속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사람의 마음 속에 든 정신까지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 일제시대 공장 일을 마치고 몰래 읽던 혁명 서적은 그토록 재미있고 흥미로웠지만 공장에서 시간을 정해 강제로 배우는 혁명 이론은 지루하고 괴로웠다.(354-355쪽)
실질적으로 남로당을 이끈 총책은 김삼룡이었다. 월북했다가 다시 내려온 이주하는 그의 책임비서로서 사실상 함께 남로당을 지휘했다. 역시 월북했다가 돌아와 지리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1951년 5월, 남한 6도 도당위원장회의에서 남한 빨치산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전쟁이 끝난 후까지도 저항을 계속하게 된다.(358쪽)
김태준은 이승만의 인가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1950년 봄에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었다. {김삼룡이 잡힌 지 석 달 후, 북한은 북쪽에 억류되어 있던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석방할 테니 김삼룡, 이주하 두 사람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은 이를 거절하고 조만식부터 먼저 내려 보내라고 답했다. 북한은 이에 아무 전통도 보내오지 않았다. 대신 이틀 후 삼팔선 전역에서 탱크와 군대를 밀고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363쪽) 서울 외곽에 포격 소리가 진동할 무렵, 국방장관 신성모는 헌병사령관에게 이주하와 김삼룡 두 사람을 처형하라는 긴급 명령을 하달했다.} 두 사람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6월 27일 총살당하고 산에 묻혔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1952년 초, 박헌영을 비롯한 십여 명의 남로당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이미 이천 명에 가까운 남로당 간부 출신들이 평안북도 천마산 속에 지어진 수용소에 감금된 후였다. … 전시 상황에서 반 년 넘게 계속된 재판 결과, 이승엽, 이강국, 임화, 최용달 등 여덟 명의 남로당 지도부가 미국의 간첩으로서 남한의 사회주의 역량을 파괴하기 위해 극좌적인 폭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 훗날 북한은 김삼룡, 이현상 등 남한에서 싸우다 사망한 남로당 지도부를 모두 복권시켰으나 자신의 손으로 처형한 이 여덟 명에 대해서는 불명예를 벗겨 주지 않았다.(369쪽)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이현상은 남과 북 모두에게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다. 남한으로서야 당연히 등줄기에 칼을 꽂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남로당 출신들을 반역죄로 몰고 있던 북한 역시 이현상과 그의 부대 남부군을 목의 가시처럼 껄끄럽게 생각했다.(370쪽)
9. 살아남은 사람들과 남한의 민주화 운동
모두 죽고, 이순금은 1990년대 초까지 전국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이효정은 남편이 월북 이후 간첩이어서 평생 시달렸다. 이효정이 감옥에서 나온 얼마 후, 독재자 이승만은 학생 시위로 쫓겨나 미국으로 도망쳐 버렸다. {전두환을 몰아내기 위한 유월항쟁이 승리한 후로는 경찰이 함부로 집에 쳐들어오거나 일터에 쫓아와 괴롭히는 일이 없어졌다.}(376쪽) 그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에 맞아 죽거나 고문으로 죽는 일이 생길 때마다 혼자 그들을 추모하는 시를 썼다. … 2004년 6월, 초여름에 눈을 감았다.(380쪽)
일제 식민지시절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곧 조선의 해방투쟁과 같은 것이었다. 그 운동의 역사에서 박헌영이 식민지와 해방공간의 신화적인 지도자라면 이재유는 전설적인 혁명가였다. 박헌영은 두만강을 건너 탈출했고 이재유는 토굴을 파고 사라졌다. 혁명가나 혁명조직에 대한 이론연구서를 볼 때 지나쳤을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몇몇이 이 소설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소설이 지닌 형상과 전형의 장점이리라.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은 그가 머무르고 있던 명륜동 김해균의 집에 콤그룹과 화요회의 중심인물을 모아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는 이 자리에서 자기가 작성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정식으로 제기, 잠정적인 정치노선으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8월 테제」이다.(214쪽) - 《이정 박헌영 일대기》
1945년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다
이때 선임된 당 중앙위원회 명단이 최근 발굴된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중앙위원 28명과 중앙검열위원 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 : 1) 박헌영 2) 김일성 3) 이주하 … 5) 이승엽 … 9) 김삼룡 10) 이현상 … 12) 이순금 17) 권오직
중앙검열위원 : 1) 이관술, 2) 서완석, 3) 김형선, 4) 최원택
박헌영은 중앙위원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총비서’라는 직임을 가진, 조선공산당의 제1인자였다. … 전체 중앙위원의 명단이 다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인 김일성, 무정, 최용건, 최창익 등이 중앙위원회에 포함된 점이 주목된다. 그동안 가설로만 제기된 것을 정설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김일성이 박헌영에 뒤이어 서열 2위의 중앙위원으로 지목된 것도 흥미롭다.(219쪽)
참고로 경성트로이카 구성원이었던 정태식은 중앙위원은 아니었으나 조선공산당 대변인을 맡았다.
10. 끝나지 않은 노래
박헌영의 일생을 중심으로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정리하는 것과 이재유의 일생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은 노선, 이론, 성격, 활동 공간 등등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그들이 조직한 인물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경성트로이카와 해방 후의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거의 모두 망라할 수 있게 된다.
이재유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1946년 9월 총파업의 주축이 되었던 철도파업을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를 들어 볼 수 없었다. 일제 시절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조선의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에게 메아리친 힘찬 노래를.
기관구에서
- 남조선 철도 파업단에 드리는 노래
피빨이 섰다 집마다 집웅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우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피빨이 섰다
누구를 위한 철도냐 누구를 위해 동트는 새벽이었나 멈춰라 어둠을 뚫고 불을 뿜으며 달려온 우리의 기관차 이제 또한 우리를 좀먹는 놈들의 창고와 창고 사이에만 느려놓은 철길이라면 차라리 우리의 가슴에 안해와 어린 것들 가슴팍에 무거운 바퀴를 굴리자
피로서 물으리라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 돌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생명의 마지막 끄나푸리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느냐 동포여 우리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다가서는 틀림없는 동포여 자욱마다 절그렁거리는 사슬에서 너이들까지도 완전히 풀어놓고저 인민의 앞재비 젊은 전사들은 원수와 함께 나란히 선 너이들 앞에 일어섰거니
강철이다 쓰러진 어느 동무의 소리가 바람결에 들릴지라도 귀를 모아 천 길 일어설 강철 기둥이다
며츨째이냐 농성한 기관구 테두리를 지키고 선 전사들이어 불 꺼진 기관차를 끼고 옳소 옳소 외치며 박수하는 똑같이 기름 배인 검은 손들이어 교대시간이 오면 두 눈 부릅뜨고 일선으로 나아갈 전사 함마며 핏켙을 탄탄히 쥔 채 철길을 베고 곤히 잠든 동무들이어
피빨이 섰다 집마다 집웅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우에 억울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승리를 약속하는 피빨이 섰다
- 이용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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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미국에서 많은 관심, 고마워요. 올린 자료들이 잘 활용될 것 같아요. 몇군데 오류도 있지만요. 좋은 자료 계속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