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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구서 전시회 갖는 사경(寫經)작가 이순자씨
2013-06-07
“500년만에 묘법연화경 7만字 고려장지에 금니로 베껴 썼죠”
(고려장지 : 변색되지 않는 신비의 전통한지)/(금니 : 금분액)
20130607
고려장지에 7만자를 사경해 내려간 140m짜리 묘법연화경을 오는 12일 일반에 공개하는 이순자씨가 대구시 동구 신암동 작업실에서 사경연습을 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작품은 스승과 함께 만든 금강경 사경.
‘사경(寫經)’.
불경을 붓으로 종이 등에 옮겨 적는 일을 뜻한다. 오랫동안 명맥이 끊어졌지만 최근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화가한테조차 아주 생소한 장르다. 한지공예작가들은 전통사경 전용 한지인 ‘감지(紺紙)’ 재현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1996년 7월17일 희소식이 들려왔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주지인 성파 스님이 감동적인 종이를 공개했다. 10여년의 노력 끝에 신라와 고려 때 금·은가루로 금니·은니사경을 할 때 사용하던 ‘고려장지’(일명 감지)를 600여년 만에 재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장지란 한지에 여러 차례 쪽물을 들여 만든 전통한지. 좀이 슬거나 변색되지 않는 신비한 종이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고려시대 사경을 500여년 만에 재현한 법화경 금니 사경작품 전시회가 오는 1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대일빌딩 2층 한국미술관, 오는 7월9일에는 대구 봉산문화회관 제1전시실에서 각각 열린다. 특히 사제 간인 문정 주재호와 혜화 이순자씨가 한 질씩 묘법연화경 28품 변상 사경을 공개한다. 유발 제자가 된 뒤 사경용 감지를 성파 스님으로부터 얻게 된 이순자씨는 너무 감격스러운 맘에 2년간 두문불출하면서 무려 7만자에 가까운 묘법연화경 사경을 완성했다. 일본종이에서 벗어나 한국 전통사경의 신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이씨는 정말 사경과 무관한 인생을 살았다. 평범한 주부에서 사경작가로 거듭나기까지의 뒤안길을 더듬어 봤다.
일본 종이에 쓴 건 가치 아무리 높아도 문화재 지정 안 돼…
통도사 스님 재현한 고려장지 덕분에 대작 완성 가능했다
멋 부려선 안 되고 가로세로 획 두께가 항상 일정해야…
수천자가 모이면 단순함을 초극하는 경이로움 연출돼
하루 600자 적는데 금분액 사라질까봐 한 획 한 획 집중…
재주보다 信心 중요 신앙적 공덕 쌓이죠
◆ 처음에는 전업주부였다
- 첫인상이 매우 단아하다. 예술가적 광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가적 끼는 사경과 상극이다. 끼를 죽여야 참 사경이 핀다.”
- 사경이란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사경은 불경을 베껴 쓰는 걸 의미하는데, 신앙적 공덕을 쌓기 위한 일종의 ‘공덕경(功德經)’이다. 다분히 신앙적이다. 그래서 재주보다 신심(信心)이 더 중요시된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이다. 10년 전 내가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 사경문화는 거의 바닥권이었다.”
- 고려가 특히 불교를 숭상했기에 고려사경이 더욱 회화적이었을 것 같다.
“고려사경은 독특한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경을 감싸주는 겉표지 그림에는 금·은니(金銀泥)로 보상당초문을, 안표지 그림에는 경전의 내용을 쉽게 묘사한 변상도(變相圖·부처의 일생, 불교의 설화 등을 그린 그림)가 금니로 그려져 있다. 사경의 형상에는 권자본(卷子本·두루말이 형태의 책)과 절본(折本·접는 책)이 있는데, 보통 절본이 많이 보인다. 용지는 동을 부식시킨 녹물에 닥나무종이를 담가 만든 짙은 감색종이가 많이 쓰이고, 그 밖에 자지·홍지·갈지·마지 등도 이따금 쓰인다.”
- 사경작가로 변신하게 된 동기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늦깎이로 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수필가나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 지도교수가 ‘문인이 되려고 하면 매우 고독해야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고독과 동고동락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해서 그 길을 접었다. 그 무렵 남편이 직장을 나와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직장 때보다 형편없는 대우를 받자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했다. 남편을 위해 시작한 게 새벽기도였다. 108배를 하고 천수경을 많이 암송했다. 그제서야 남편이 안정을 찾더라. 그 참에 서예를 배웠다. 대학 때 천자문을 떼서 도움이 됐다. 그때 누가 ‘사경공덕이 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사경의 ‘사’ 자도 몰랐다. 일단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보며 칸이 쳐진 한지에 한 자씩 적어 나갔다. 하루 17~18시간씩 한자리에 앉았다. 그러던 중 지금 스승이 된 문정 주재호 선생의 사경전시회에서 사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두 손 모으고 합장하면서 ‘정말 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염송을 했다. 전시장에서의 환희심을 잇기 위해 무작정 스승을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사경반 1호 수강생이 됐다.”
◆ 寫經 & 死境
어쩌면 사경은 죽음의 경계(死境)에 입문하는 건지도 모른다. 도공이 도예와 시서화에 능해야 하듯, 사경작가도 글씨와 그림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종일 세필만 잡고 있는 것을 본 스승이 큰 붓(大筆)을 잡으라고 당부한다. 세필만 잡아선 제대로 된 운기 있는 필력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경 서체는 일반 서예가의 세필과 차원이 다르다. 멋을 부려서도 안 되고, 오직 단아하고 방정하고 세밀한 해서체로 일관해야 된다.
20130607
혜화 이순자씨의 길상도.
- 사경 서체의 본질은.
“사경에서 거룩함을 구현하려면 멋을 부려선 안 된다. 가로와 세로 획의 두께와 구부러짐이 항상 일정해야 된다. 그런 글자가 한두 자라면 잘 모르지만, 수백 자, 수천 자가 모이면 단순함을 초극하는 경이로움이 연출된다.”
- 필획이 잘 잡히던가.
“글씨는 자신을 닮는다고 했다. 나는 항상 서체가 길쭉했다. ‘의제필선(意制筆線)’이라는 말이 있다. ‘글씨를 알고 베껴야 된다’는 말이다. 보통 한자 뜻도 모르면서 그냥 시각적으로 베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운이 산만해지고 집중이 안 된다. 나름의 한자 실력이 없었다면 사경을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 붓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먹은 한 번 찍으면 몇 자를 적을 수 있는데 금분액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속도가 항상 일정해야 되고 농도도 맞아야 한다. 세필에 묻히는 금분액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글씨를 망치기 때문에 항상 한 번 듬뿍 묻힌 뒤 별도 접시에서 붓을 돌려가면서 액을 가지런하게 한 뒤 적어야 한다. 서예에서는 ‘용묵’이라고 해서 짙음과 옅음이 서로 섞여도 무방하고 때론 흰 공간인 비백(飛白)도 살려야 예술적 운치가 있는데, 사경은 예술적인 무기교의 단순함이 생명이다.”
- 금분액이 무척 비쌀 것 같다.
“통상 금은 3.75g이 한 돈인데 사경용 금은 이런저런 정련과정 때문에 2g이 한 돈이다. 아낄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가금(假金)’을 사용한다. 가금은 화학적으로 만든 대용금분액이다. 연습용 사경 물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스승이 개발한 걸 사용하는데, 금분에 어교(魚膠)를 섞어 사용한다. 아교는 위험하다. 그걸 사용하면 글씨가 부러지거나 종이가 부서진다. 다른 사람의 사경을 보면 황토색이 짙은데, 내 것은 선명한 황금빛이다.”
- 금분액이 특정 글자 쓰는 중간에 바닥나면 자칫 획이 중첩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한자에 한 번 액을 묻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필획을 긋는 중간에 다시 액을 묻히면 중첩된 부분이 나와 글자를 버리게 된다. 글자 한 자를 적을 때도 숨을 멈춰야 한다. 모두 일체감 때문이다.”
- 사경과 일반 회화의 차이점은.
“다른 미술 같으면 여러 색을 사용하지만, 사경은 오직 한 색으로 농담을 표현해야 되기 때문에 정말 어렵다. 일반인은 고작 두세 개밖에 농담을 표현할 수 없지만, 프로는 최소 10단계 이상을 다뤄야 입체감을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다. 처음에는 글씨를 배우고 다음은 그림으로 건너간다. 그림의 경우 연잎과 연꽃을 배우고 소나무, 학, 호랑이 등이 들어간 길상도를 배우게 된다.”
- 한창 몰두할 때 하루 일과는.
“사경은 평균 2천~3천 자를 적어야 하기 때문에 흐름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잠자고 화장실 가고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무조건 엉덩이를 앉혀야 한다. 하루 500~600자를 적는다. 초창기엔 하루 3~4시간 잠을 자고 5년간 몰입했다. 그때 조금 안목이 생기더라.”
-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사경만 죽자 살자 붙들고 있자 친구하고는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제자들과도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선 너무 정적인 세계에 침몰하지 말라는 등 온갖 염려성 멘트가 난무했다. 어느 날 주위를 돌아보니 남편밖에 없었다. 남편은 밤샘작업 현장도 졸면서 지켜주었다.”
◆ 고려장지 재현한 성파 스님의 불제자
항상 마음 한편이 멍멍했다. 한지 때문이었다. 일본종이에 사경을 한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 왜 종이가 문제였는가.
“금분액은 일반 한지에는 사용할 수 없다. 어교만 먹고 금가루는 뱉어낸다. 그래서 부득이 일제 화선지를 사용한다. 나도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해도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어렵사리 통도사 서운암에 기거하는 있는 성파 스님을 만났다.”
- 전통감지를 구할 수 있었겠다.
“스님은 재현한 감지를 많이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요사채에 불이 나는 바람에 많이 소실했다. 남은 걸 내게 주면서 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2010년, 한 장에 12만원 상당의 감지 500여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을 접철본으로 만들어 초대형 묘법연화경 사경에 나섰다.”
(그녀는 지난 5월27일 묘법연화경을 완성시켰다. 스승도 사용하지 못한 전통감지에 사경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면목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운명이라고 여겼다. 국내 사경학박사 1호인 권희경씨도 그녀의 작품을 고증했다.)
- 그 작품은 팔기 아까울 것 같다.
“평생 내가 목숨처럼 간직할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뭔가에 홀려 있는 듯했다. 그 ‘홀림’이 집을 편하게 했다. 남편도 사경 덕분인지 하는 일이 잘된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남편도 한마디 했다. “결코 아내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심지어 손자까지 동참한 ‘모두의 작품’이라고 본다. 아내의 글씨는 타고난 것 같다. 재능은 타고났지만 끈기가 없으면 안 되는데 끈기까지도 타고났다. 가족이 박자를 맞춰주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경제력도 있어야 한다. 종이 한 장에 12만원, 금분액이 2g에 20여만원. 스승도 잘 만나야 한다. 신심까지 있어야 한다. 앞으로 사경이 가업으로 전수됐으면 좋겠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이순자= 대구가톨릭대 국문학과 졸업. 전업주부에서 벗어나 40대 후반부터 문정 주재호 선생 밑에서 사경 수업. 현재까지 100여작 완성.
2010년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첫 전시회. 지난해 일본 교토 국제교류센터에서 문정 주재호와 사제동행전. 이후 오사카 영사관, 도쿄 대사관, 교토화랑, 국제교류센터 등 일본에서 여섯 번 초대전. 이로 인해 일본에서 팬클럽 결성.
오는 12~18일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전통감지로 작업한 총 길이 140m, 총 글자 7만자, 총 7권 28품으로 구성된 ‘묘법연화경’ 전시.
국내 사경작가로는 드물게 불경사경에서 조금씩 벗어나 산수화사경 분야도 실험. 판화기법의 길상도풍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의 경우 석채를 활용해 기존 길상도사경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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