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열매
- 강 문 석 -
공원엔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입동도 열흘이나 지났으니 해도 그만큼 짧아졌을 터이다. 퇴근길에 사무실을 나와 공원을 향해 곧바로 걷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의 산책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해 보고자 찾은 것이다. 난 부끄럽게도 조용히 명상하며 산책하는 습관을 길들이지 못했다. 대신 만나는 풍광들을 카메라에 담는 일에 주로 매달린다. 작년부터 지척인 영도대교의 도개가 복원되면서 광복로와 남포동을 찾는 내외국인들이 크게 늘어나더니 공원에도 생기가 넘친다. 요즘 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휴대폰 세상을 말해주듯 사진 찍는 이들도 부쩍 많아졌다. 셀카봉이라는 간편한 도구를 이용하여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으로도 스스로를 찍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제대로 된 사진을 찍기란 쉽지 않다보니 옆에서 도와주면 크게 반색을 한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돌아 공원 출구에 이르렀을 때 왁자하게 떠드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청년학생 여덟을 만났다. 스마트폰은 카메라의 줌 기능이 약해서 일행을 한꺼번에 다 담기가 어려울 텐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셀카봉 촬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한 방에 날리도록 그들이 청하지도 않은 걸 내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얼마나 감격했으면 한참이나 등 뒤에서 와 와 하는 환호성이 울렸다. 공원을 막 내려서려다가 쳐다본 하늘엔 때마침 석양을 머금은 은행나무의 샛노란 단풍이 황홀했다. 몇 컷 찍어보았지만 영상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절반도 미치질 못했다. 그 순간 발아래 밟혀 으깨지는 것들이 있었다. 은행나무의 열매인 은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어 은행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은행을 줍자니 오래 전 '은행털이' 개그가 떠올랐다. 은행열매를 터는 걸 은행 강도와 빗댄 것인데 털지 않아도 이렇게 지천에 깔렸으니 그 개그가 무색할 지경. 내가 남산공원을 자주 올랐던 것은 서울역에서 자투리 시간만 생기면 풍경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을 오르자면 반세기도 더 지난 고학시절의 애환이 깃든 골목을 지나야 한다. 공원에서 케이블카 승강장 쪽으로 휘돌아 내려가면 은행나무 가로수 숲이 눈앞에 나타난다. 서울이 공해가 심하다고 하지만 열매는 용두산공원보다 배나 크다. 품종 탓이 아니라면 용두산은 나무가 이제 수명을 다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인네가 늦은 오후에 혼자서 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하나씩 줍고 있는 것이 처연해보였던지 ‘저 밑에는예 수북하대얘’하고 일러주는 중년부인도 있었다.
그랬다. 빗자루로 쓸어 모아놓은 것처럼 쌓여 있었다. 거의 봉지에 가득 채웠을 무렵, 두 자루 정도를 채워 놓고 다시 자루를 펼치면서 혼잣말처럼 구시렁대는 늙은이가 있었다. “장갑 안 끼고 했다간 수월찮게 욕 좀 볼낀데…” 이걸 들고 지하철을 타야만 하니 공원의 쓰레기수거함을 뒤져 비닐봉지를 찾아 한번 더 단단히 감싸야 했다. 그런데도 노약자석에선 코를 킁킁거리며 ‘이기 도대체 무신 냄새고?’한다. 아파트 문을 들어서면서 아내의 지청구쯤은 미리 각오했지만 아예 갖다버리라고 소리 소리를 질러대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고음에 약하듯 아내는 악취에 아주 약하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시간을 지체하다간 부부간에 정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아 서둘렀다. 아내의 고무장갑을 끼고 베란다에다 작업장을 마련했다.
고염만큼 작기만 한 은행은 미끌미끌 고무장갑 낀 손엔 잘 잡히질 않는다. 알루미늄 절구통에 은행을 쏟아 붓고 절굿공이로 껍질을 벗기려 해보지만 으깨지는 손실만 늘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절구든 장갑이든 하물며 베란다 바닥까지 달라붙기만 하면 비눗물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은행 껍질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한쪽 손은 고무장갑을 벗고 과일이나 채소를 갈아 즙을 만드는 판에다 대고 문질렀다. 온 집안에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주방용품까지 하나하나 들어내고 있으니 아내는 이제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이렇게 익어서 저절로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은 키친타월로 살짝 문지르기만 해도 깨끗하게 껍질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 그래서 자정을 지나서야 겨우 껍질에서 알맹이를 발라내는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작업장 바닥과 범벅이 된 주방용 기구를 청소한다는 것이 그만 곤한 잠에 녹아떨어지고 말았다. 작업장은 아내가 거처하는 안방 침대와 유리문 하나를 두고 붙어 있었다. 별로 부지런하지도 못한 아내지만 당장은 그 악취에 질식할 것 같으니까 투덜대면서 심야시간에 청소를 끝낸 모양이다. 아내의 발악에 가까운 악다구니보다 더 큰일은 장갑을 벗은 채 작업한 왼손의 피부가 허물을 벗기 시작하면서 참기 힘든 가려움증과 통증이 생긴 것이다. 독성이 밴 피부를 벗겨내면 가려움증이 사라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벗겨내면서도 혹시 성한 손까지 옮아오면 어쩌나도 걱정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왼손의 허물이 거의 다 사라질 즈음 생식기인 음경 밑에 매달려 출렁거리는 부속품 그곳 연약한 피부에 갑자기 신호가 왔다.
견디기 힘든 가려움과 쓰라린 통증은 손과 같았다. 크기가 웬만한 송아지의 그것 만큼이나 부풀어 올랐다. 일전에 서울의 한 세미나에서 오십 대 초반의 아리따운 한의사가 남자의 고환을 지목해서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꺼냈던 얘기가 떠올랐다. 이백 여 명 참석자들은 모두 예순을 넘겨 아흔까지 바라보는 노년의 남성들. 그녀가 아무리 의사라지만 도대체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그 얘길 쉽게 꺼낸 것에 모두들 귀를 의심했을는지도 모른다. 남성들이 사우나나 찜질방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신체부위가 바로 고환이라는 것. 되도록이면 차갑게 관리하라고 일반 장기와는 달리 특별히 몸 바깥에다 매달아 놓았는데 핀란드 사우나와 같이 팔십 도에서 백도를 오르내리는 고온에서 오래 머물면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통증을 견디기가 힘들어 우선 집에 있던 연고 무좀약이라도 찾아서 발랐지만 효력이 있을리 만무했다. 아내에게도 너무 체면이 안 서서 어떻게든 병원을 가지 않고 견뎌보려 했는데, 다음날엔 왼쪽 귀밑에서 시작하여 목을 타고 턱까지 번져 물집마저 생겼다. 아내는 빨리 병원을 찾지 않고 미적거리는 나에게 성화가 심했다. 단골 피부과 의사는 ‘은행열매 독성에 감염…’ 하니까 퍼뜩 알아차리고 바깥에 드러난 목과 턱은 대수롭지 않게 한번 훑어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밑으로 향한다. 혹시 바지를 벗으라고 할까봐 난감해하는 날 읽었던지, 닷새 정도 약을 복용해야 한다면서 주사도 처방해 주었다. 나의 무지와 외고집이 자초하여 사십삼 년 결혼생활에 최악의 선물을 안겨준 '은행'은 여기서 접고 은행나무에 얽힌 사랑과 애환 이야기이다.
우리 조상들에겐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면 젊은 남녀가 은행나무 주위를 돌면서 은행을 서로 입에 넣어 주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풍습이 전해졌다. 천 년 이상을 살고 암수 구별이 있어 마주봐야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의 특징을 살린 애정표현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은행나무는 마주보고만 있어도 결실을 맺으니 순결한 사랑도 상징한다고 하겠다. 옛 경칩은 오늘날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연인의 날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다니 안타깝다. 올가을도 많은 지자체들이 가로수 은행나무 열매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뉴스가 떴다. 노랗게 익으면 은행에서 구린내가 나서 치워달라는 민원이 빗발치는데 떨어진 은행이 행인들의 발에 밟혀 으깨지면 악취는 더욱 심하고 길도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자치단체별로 이맘때면 기동반을 편성해 은행을 털고 떨어진 것을 수거하고는 있으나 암나무가 워낙 많아 역부족이란다. 앞에서 난 멍청하게 아무런 안전조치도 않은 채 떨어진 은행을 주웠지만 지금은 중금속 오염을 우려하여 줍는 이들도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전국의 가로수 중 은행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십사 퍼센트로 이십오 퍼센트인 벚나무 다음으로 많고 도시지역은 사십 퍼센트를 웃돈다고 한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이처럼 많은 것은 생장이 빠르고 추위와 더위는 물론 대기오염에도 강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산소 배출량이 많으면서도 이산화황 흡수력도 높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단점이라면 열매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 말고도 껍질에 독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치단체들은 새 가로수로 수은행나무만 심거나 기존 암은행나무는 수나무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은 일년생 이하의 어린 나무도 암수를 구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삼 년 전 산림청이 은행나무 성감별 디엔에이 분석법을 개발한 덕분이다. 그 전만 해도 십오 년 이상 자라서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육안으로 암수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은행나무 가로수는 홀아비나 숫총각만 남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가로수가 아닌 사진작품으로 남기기 위해서 찾는 명품 은행나무라면 양평 용문사의 천년을 넘긴 거대한 고목(바로 위 사진)을 추천할 수 있겠고 경복궁 덕수궁을 찾아도 지금쯤 때깔 고운 은행나무 단풍을 만날 수 있으리라.
첫댓글 샛노란 은행나무가 가을의 정취를 더해 줍니다
누구나 사진 한컷을 남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요~그런데 은행열매는 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옻을 타는 분은 만지면 안되는데요~
회장님! 고생하셨네요!^^
관심 고맙습니다. 접촉성 피부염 반응이 오는 때에 마시지 않아야 할 것을 마셔서 더 병을 키운 것 같습니다. 한번씩 혹독하게 쏘여봐야 정신을 차리니 큰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