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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을 할 때 요금 폭탄을 맞지 않고 저렴한 가격으로 스마트폰을 계속 이용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해외로밍 시스템에 가입하는 것이다. 로밍 시스템이 적용되는 순간 기존 요금 체계가 정지되고 새로운 요금 체계로 급격히 전환된다. 요금 체계에 있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 차원의 공동체에 있어서도 이 같은 급격한 전환이 가능할까? 반만년의 한민족 역사에서 종교 사상과 정치경제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급격한 전환이 과연 있었으며, 있었다면 그 전환의 계기는 언제, 그리고 무엇이었는가?
박형룡 박사의 워드플레이
한국 장로교 조직신학의 거목 박형룡 박사는 일제강점기 기간에 쓴 어느 글에서 조선의 영문 음역으로 재미있는 워드플레이(word-play)를 했다. 조선의 공식 영어 음역은 Chosen이다. 박형룡 박사는 Chosen이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닌 영어 동사 choose의 완료형이라는 점에 착안해 조선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확신했다. 조선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구약 시대 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국가에 일어났던 일이 조선에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가 말하고자 한 바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이 좌우됐던 것처럼 조선의 운명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어떤 태도로 수행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필자는 박형룡 박사의 워드플레이가 재미있긴 하지만 성경해석학에서 금기시돼 온 풍유적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두 개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사(記事)는 박형룡 박사의 해석이 단순한 워드플레이가 아니라 한민족 역사의 급격한 전환점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담은 혜안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배를 타고 항해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위기에 빠진 사건들이었는데, 하나는 바울이 탑승한 로마로 가는 배였고(행 27장), 다른 하나는 요나가 탑승한 다시스로 가는 배였다(욘 1장).
풍랑을 만난 두 항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울이 탄 배와 요나가 탄 배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만나고 성전에 들어가 나실인의 서약이 종료된 것을 신고한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예루살렘 시내에 있었는데, 이 모습을 목격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이방인을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 금지 구역에 들여보낸 것으로 오인하고 폭동을 일으켰고, 이 폭동이 계기가 돼 바울은 로마군에 체포돼 가이사랴로 이송됐다.
가이사랴로 이송돼 감옥에 갇힌 바울은 두 명의 총독을 만난다. 이 두 총독과 만나는 과정에서 바울의 사역 태도가 잘 드러난다. 첫 번째 총독은 돈을 좋아한 벨릭스였다. 이 무렵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끝냈으며 이미 지중해 전역 교회들에 유명 인사였다. 가이사랴 지역교회 성도들이 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와 위문하는 것을 본 벨릭스는 일정액의 돈을 주면 바울을 석방시켜 줄 수 있다는 신호를 성도들에게 보냈을 것이며, 이 신호를 감지한 성도들은 바울과 석방 문제를 상의했음이 분명하다.
“선생님, 우리가 조금만 힘을 쓰면 선생님을 석방시킬 수 있는데 그렇게 할까요?” 바울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 같다. 돈이 건네지는 순간 소문이 순식간에 퍼질 것이고 바울과 가이사랴의 교회들이 치명적인 도덕적 상처를 입고 바울의 선교 사역은 휘청거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가이사랴 성도들도 돈을 건넬 생각을 하지 않자 바울의 구금은 기약 없이 계속됐다.
벨릭스가 임기를 마치고 후임 총독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 바울은 석방이 물 건너갈 수밖에 없는 결정을 했다. 바울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소했다는 것은 바울이 로마에 갈 때까지 구금돼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울이 정말로 로마에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어서 상소했을까? 나중에 로마에 도착한 바울에게 가이사 재판은 없었고 바울은 재판에 관심도 없었다. 바울은 로마와 스페인 선교를 위해 로마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가이사 재판을 이용한 것이다.
바울을 호송하는 로마군 호송대는 연안여객선인 아드라뭇데노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무라항에 도착했다. 무라항에 도착한 로마군 호송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까지 운항하는 장거리 수송선으로 갈아탄 후 미항에 이르렀다. 바울은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항해할 것을 권고했으나 미항의 규모가 작아 겨울나기가 불편함을 느낀 호송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미항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더 큰 항구 도시 뵈닉스까지 가서 거기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하고 항해에 나섰다.
그러나 항해에 나선 직후 토네이도성 태풍 유라굴로를 만나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고 파선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한밤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이렇게 전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 27:24).
하나님이 승선한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승선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바울 혼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아니었다. 곡물 수송선에 탄 탑승자들의 운명은 바울이 탑승한 후 새로운 방식으로 급격히 전환됐다. 바울이 탑승하기 전 탑승한 불신자들의 운명은 하나님 백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바울이 탑승한 후에는 전적으로 바울에 의해 좌우되는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곡물 수송선에 탑승한 모든 탑승객을 살려 주시는 근거가 제시돼 있다. 그 근거는 딱 하나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선다는 것은 로마와 스페인에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위임한 이방 전도의 소명(행 26:15-18)에 순종하는 바울 한 사람을 살리시기로 하셨는데, 바울을 살리실 때 바울과 함께 탑승한 모든 사람의 목숨도 함께 살려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바울 사건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건은 요나가 탄 배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사건이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탑승한 이방인들의 운명은 요나가 타기 전에는 하나님 백성과 아무런 상관없이 결정됐으나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탑승한 후에는 전적으로 요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급격히 전환됐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다. 요나가 탑승하자 하나님은 요나를 벌하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키셔서 배를 침몰 위기로 몰아넣으셨다(욘 1:4). 영문을 알 길 없는 선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불순종하는 요나 때문에 애꿎은 선원 전체가 목숨을 잃을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제비를 뽑아 요나가 문제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요나를 배에서 제거하자 거짓말처럼 폭풍은 잦아들고 배는 다시 순항하기 시작했다.
바울의 곡물 수송선 사건과 요나의 다시스행 배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다시스행 배의 자리에 국가를 대입해 보자. 국가 안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을 때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사람과는 무관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국가 안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소수라도 등장한 이후부터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역에 어떤 태도로 임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방식으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에 철저하게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를 위기로부터 구해 주실 때 그가 속한 국가 전체를 살려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피해 달아나면 하나님이 그를 벌하실 때 국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신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인증하신,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세속사의 의미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인의 등장은 한민족 역사의 급격한 전환의 계기
박형룡 박사의 워드플레이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읽으면서 얻은 구속사적인 해석이다. 반만년 가까이 지속돼 온 한민족 공동체의 운명은 기독교인이 등장하기 전에는 기독교인과 아무런 상관없이 결정됐다.
그러나 한민족 공동체에 기독교인이 등장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혼 구원의 사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급격한 전환을 맞이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영혼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면 이들의 사역을 지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이들이 속한 국가의 안전을 지켜 주기로 결정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위임받은 사명 수행을 게을리하면 이들을 벌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이들이 속한 국가 전체를 벌하기로 결정하신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한민족 역사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전환 시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전환들은 모두 동일한 패턴의 반복을 보여 주었을 뿐 새로운 세계로의 급격한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종교사적으로는 무속 종교의 시대로부터 불교의 시대로, 불교의 시대로부터 유교의 시대로 전환됐다. 여기에 또 하나의 종교인 북한의 공산주의적 주체교가 따라붙어 그 끝자락을 장식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고조선 시대로부터 삼국 시대, 삼국 시대로부터 고려 시대, 고려 시대로부터 조선 시대로의 전환이 이뤄졌으나 왕조정치라는 골격에는 변동이 없었다. 북한의 김씨 왕조는 한민족 반만년 왕조사를 답습하면서 그 끝자락에 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종교 사상과 정치 체제의 순환적 반복에 급격한 전환이 시작된 것은 바로 기독교인의 등장 그리고 영혼 구원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수행해 온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헌신에서부터였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민족을 지배했던 무속 신앙, 불교 신앙, 유교 신앙, 그리고 북한의 공산주의적 주체교의 공통된 특징은 유물론에 있다. 이 종교 체계들은 초월과 내세를 말하지 않거나 아주 모호하게 언급할 뿐이다.
무속신앙은 귀신의 존재 정도는 인정하지만 이 귀신은 죽은 사람의 혼령이 현세에 머무르면서 배회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철저하게 현세 안에서의 물질적인 축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불교 신앙은 인간의 능력에 기반한 독경(讀經)과 수행(修行)에 집중해 득도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나 이 경지는 텅 빈 공(空)의 세계이며, 득도에 이르지 못한 중생은 윤회적으로 모두 현세로 귀환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유교 신앙은 일종의 처세학으로 하늘을 사람으로 환원시키며 초월과 내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북한의 주체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연결되는 백두혈통이 제시하는 거짓된 현세적 유토피아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이처럼 한민족은 현세와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는 유물론으로부터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으며, 한민족의 종교 사상은 하나의 형태의 유물론에서 떠나면 약간 변조된 또 다른 형태의 유물론으로 귀착하는 유물론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다. 인간에게는 적어도 세계 초월적인 절대적 창조주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인간의 마음 안에는 이를 위한 공간이 있다. 인간이 절대적 창조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는 절대적 능력을 지닌 세계 내적인 대체물로 채워지게 돼 있다.
이와 같은 종교적 본능은 정치적으로 전체주의적인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왕조의 형성으로 나타났으며, 전체주의적 왕조의 형성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고대로부터 북한 세습왕조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관철돼 왔다.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좌우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
종교에 있어서 유물론의 문을 열고 전체주의적 왕조의 전통을 붕괴시킨 것이 바로 한민족 안에 전래된 기독교와 기독교인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등장이었다. 기독교는 유물론의 빗장을 풀고 물질 세계의 전모(全貌)를 실재하는 영의 세계의 관점에서 새롭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했다. 물질의 세계는 그 자체가 절대적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유익을 위한 자원이라는 해석이 등장하면서 풍부한 자연과학과 과학기술 발전의 문이 열렸다. 반만년 동안 자연에 종속돼 곤궁한 삶을 살아왔던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강국이 된 비결이 여기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복음 전도와 부흥을 통해 얻은 인력과 물질을 1970년대부터 세계 선교에 헌신적으로 투입해 현재 세계 제2위 선교사 파송국으로 발돋움했다. 1970년대부터 한국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해 현재 세계 최상위권의 경제발전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교회의 선교에 대한 헌신과 노력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값진 선물이다. 피조물에게 절대적인 신적 지위를 허용하지 않는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정치인이나 세력에게 정치권력을 몰아주는 중앙집권적이고 독재적인 정치 체제는 불가능하다.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 수립된 이스라엘의 정치 체제는 민주적이고 지방 자치적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왕정을 수립했을 때도 왕에게는 입법권이 주어지지 않아 사실상 권력분립이 이뤄진 상태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정상급의 헌법적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한민족에 내재한 힘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기독교인의 헌신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돼 돈에 집착하면 돈은 우리 주머니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 그 자체가 목적이 돼 집착하면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은 우리 손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특히 하나님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 이들이 충성스러운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라도 이들이 속한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지켜 주시기로 결정하실 것이다. 이것이 가장 분명한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