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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Our” Worldview and “Theirs”
우리의 세계관과 그들의 세계관
The second hermeneutic circle is the one between the text and the reader. We have already encountered this circle in thinking about what Kongzi means by learning. If you are like most contemporary readers of this book, you probably have one of two views about the purpose of education. One of these views has its roots in the thought of Plato, the other in that of Francis Bacon. Plato thought that the best kind of life was the life of theoretical inquiry and understanding. On this view, learning about things like mathematics and pure science is worth doing for its own sake. When poet Edna St. Vincent Millay declared “Euclid alone has looked on beauty bare,” she was expressing a Platonistic sentiment.2 Plato thought that theoretical understanding would also make you a better person. He believed that intellectual speculation would help people learn to transcend the temptations and petty concerns of the everyday world. But this is not necessary to make knowledge valuable: knowledge is for the sake of knowledge.
두번째 해석학적 고리는 글과 독자 사이에 있는 것이다. 우린 이미 이 고리와 마주친 적이 있는데 공자가 의미하는 배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며서 였다. 당신이 이 책의 대부분의 동시대의 독자들과 같다면, 아마도 교육의 목적에 대해 두 관점 중 하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 관점들 중 하나는 뿌리를 플라톤 사상에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플라톤은 가장 좋은 유형의 삶이란 이론적 질문과 이해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수학과 순수과학 같은 것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가 "오직 유클리드만이 미 그 자체를 바라보았다."고 선언했을 때, 그녀는 플라톤주의적 감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이론적 이해가 또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성적 사색은 일상 세계의 유혹과 자잘한 관심사를 초월하는 법을 배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식을 가치있게 만들 필요는 없다. 지식은 지식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In contrast to Plato, Francis Bacon is famous for the claim that knowledge is power, or as he put it, “Human knowledge and human power meet in one.”ii Bacon lived during the beginning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He encouraged people to not just theorize but also experiment and learn how to control the world.
플라톤과는 반대로,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주장, 또는 그가 쓴 것 처럼,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권력은 한 곳에서 만난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베이컨은 과학혁명 초기에 살았다. 그는 사람들을 격려하여, 단지 이론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험해서 세계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Think about what side of this debate you come down on. Do you enjoy learning for the sake of learning? Is knowledge exciting and interesting to you whether you can apply it or not? Do you think that being intellectually active and curious makes someone a better person (at least to some extent)? If so, you are a Platonist. Or, is it very important to you that you be able to use what you have learned? Do you tend to scoff at knowledge that is “only theoretical” or “not practical”? Do you most admire people who can make things work “in the real world”? If so, you are a Baconian.
이 논쟁에서 어느 쪽을 편들지 생각해 보라. 당신은 배움을 위한 배움을 즐기는가? 지식이 응용할 수 있든 아니든 흥분되고 재미있는가? 지적으로 활발하고 호기심 있는 것이 사람을 더 낫게(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플라톤주의자다. 아니면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가? "이론적이기만"하거나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을 비웃는 경향이 있는가? 가장 존중하는 사람이 "실생활에서" 일이 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베이컨주의자다.
The point of these comparisons is that whether you are a Platonist or a Baconian concerning the value of learning, you may have misread what Kongzi meant when he said, “To learn, and then have occasion to practice what you have learned?is this not satisfying?” If you are a Platonist, you will think, “Yes. Learning is satisfying for its own sake, whether it has any practical application or not.” If you are a Baconian, you might agree with Kongzi’s saying, but only because you assume that what Kongzi has in mind is amoral, technical learning. Or you might disagree with Kongzi because you assume he is talking about what the Platonist means by learning. Either way, your assumptions (based on what learning means in your social context) would lead you to misread the text. Learning for Kongzi is not knowledge for the sake of knowledge, nor is it technical knowledge without moral focus.
이러한 비교의 주안점은 배움의 가치에 관해 당신이 플라톤주의자이건 베이컨주의자이건 상관없이 공자가 말한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연습하는가? 만족스럽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불역열호]의 의미를 오독해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플라톤주의자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배움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워. 실용성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 당신이 베이컨주의자이고 공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공자의 의중이 도덕과 무관하고 기술적인 배움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일 뿐이다. 또한 공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공자가 플라톤주의자가 의미하는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당신의 가정(당신의 사회적 맥락에서 배움이 의미하는 바에 근거한)때문에 그 문건을 오독할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 배움은 지식을 위한 지식도 아니고, 도덕적 초점이 없는 기술적 지식도 아니다.
This kind of misunderstanding, and overcoming it to reach a better understanding, illustrates the hermeneutic circle between the reader and the text. We always approach a text with assumptions about what it means. We have to. How could you even read the first sentence of the Analects without at least some assumptions about what “learning” and “practice” are? However, we may find that our assumptions don’t do a very good job of making sense of the text. If we bring to the Analects a Platonic conception of learning, we will have trouble making sense of the fact that Kongzi condemns people who know a lot of poetry but cannot apply it successfully “when delegated a governmental task” or “when sent abroad as an envoy” (13.5). If we have a Baconian view, we will be puzzled by the fact that Kongzi dismisses as a “common fellow” a disciple who asks to learn about agriculture from him (13.4).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서 극복해야 하는 이러한 종류의 오해는 독자와 문건 사이의 해석학적 고리를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문건에 접근할 때 그 의미에 대해 가정을 한다. 그래야 한다. "배움"과 "연습"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가정없이 논어의 첫 문장을 읽을 수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그 문건을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논어에 플라톤적인 배움의 개념을 가져온다면, 다음 사실을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을 것이다. 공자는 "정부 일을 위임받았을 때" 또는 "사신으로 외국에 보내졌을 때" 많은 시를 알지만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자들을 비난한다. 만약 우리가 베이컨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면, 다음 사실에 혼란스러울 것이다. 공자는 농사에 대해 배우길 요청하는 제자를 "소인"이라며 내친다.
When a text fails to make sense to us, it should lead us to question whether our assumptions about the topic are obscuring the text’s meaning. For example, if we do not understand what Kongzi says about learning, perhaps it is because he has a conception of the goal of learning that is different from our own. Once we understand better what the text is claiming, we should question whether our own assumptions are correct. Maybe Kongzi is right and it is possible to learn to be a better person. Maybe knowledge is neither pure theory nor amoral technique. In the hermeneutic circle, we read the text in the light of the worldview that we bring with us. If we are openminded, we notice when the text surprises us or doesn’t match our preconceptions. This leads us to reformulate our assumptions about what the text means, and it may also lead us to question the truth of our own beliefs. Hans-Georg Gadamer, a great hermeneutic theorist of the twentieth century, said that our goal in interpreting is to achieve a partial “fusion of horizons,” meaning a fusion of our perspective on the world (our “horizon”) with that of the text.
문건이 이해가 안될 경우 그 주제에 대한 우리의 가정이 문건의 의미를 흐리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공자가 말하는 배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가 우리와는 다른 배움의 목적이 대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문건이 주장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한다면, 우리의 가정이 옳은 지 의문을 가져야한다. 아마 공자가 옳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 지식은 순수한 이론도 도덕과 무관한 기술도 아닐 것이다. 해석학적 고리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세계관에 비추어 문건을 읽는다. 우리가 마음을 열면, 문건이 우리를 놀래킬 때나 우리의 선입관과 어긋날 때를 알아차릴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문건의 의미에 대한 가정을 재공식화 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신념에 대한 진실에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20세기의 위대한 해석학 이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해석을 하는 목적은 부분적인? "지평선의 융합"을 성취하는 것이다. 지평선의 융합이란 문건의 관점으로 세계(우리의 "지평선")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융합하는 것이다.
Because a large part of understanding a text is seeing where and how one’s preconceptions do or do not fit, I will close this introduction to hermeneutics by discussing four common assumptions of twenty-first century Westerners. Of course, not all readers of this text will be comfortable identifying themselves as Westerners. For many, an important part of their own identity is their origin or ancestry in other parts of the world (including Africa and Asia). Even those who may comfortably describe themselves as Western, may not share these assumptions. (I don’t agree with all of them myself.) However, the assumptions below are, in fact, characteristically Western, and I have found that most contemporary college-educated people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share them. Consequently, these assumptions need to be made explicit, because is hard to understand Chinese philosophy without being aware that there are legitimate alternatives to these Western assumptions.
왜냐하면 문건 이해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선입관이 어디에서 어떻게 맞아들어가는지 아닌지 보는 것이기 때문에, 21세기 서구의 4가지 공통 가정을 논의함으로써 해석학에 대한 소개를 마치려 한다. 물론, 이 책의 모든 독자들이 서구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헤치는게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 세계 나머지 부분(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포함한)에 그들의 기원이나 조상이 있다. 서구로 자신들을 편안하게 규정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가정들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신도 그들 모두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래 가정들은 사실 성격상 서구적이고, 내가 발견한 바로는 영어권 세계의 대부분 현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공유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정들은 명백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서구적 가정들에 대한 정당한 대체수단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중국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The first assumption is relativism as opposed to objectivism. A relativist is someone who says that truth and falsity depend upon one’s point of view. For example, is it true or false that “pornography is immoral”? A relativist will say that this statement might be true relative to your viewpoint (or the viewpoint of your culture), but false relative to my viewpoint (or the viewpoint of my culture). An objectivist, in contrast, says that the statement “pornography is immoral” is either true or false, independently of any individual’s or culture’s point of view.3 Historically speaking, most people in the West (and most people in the world today) have not been relativists. However, relativism has become so widely accepted on college campuses today that it is often a dogma. One Chinese thinker we examine in this book, Zhuangzi, might be a relativist. However, the vast majority of Chinese philosophers are objectivists: they think there are objective facts about the way the world is and about right and wrong. Because relativism is the new dogma in the West, be openminded about the possibility that the Chinese sages might be right in favoring objectivism.
첫번째 가정은 객관주의에 반대되는 상대주의다. 상대주의자는 진실과 허위가 개인의 관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포르노가 부도덕한가?"는 참인가 거짓인가? 상대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진술은 당신의 관점(또는 당신이 속한 문화의 관점)에 따라 참일수도 있지만, 나의 관점(또는 내가 속한 문화의 관점)에 따라 거짓일 수도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객관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포르노가 부도덕하다"는 진술은 개인이나 문화의 관점과는 별개로 참 또는 거짓이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서구의 대다수 사람들은(그리고 현재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오늘날 대학에서 그것이 정설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책에서 검토한 중국 사상가 장자는 상대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중국 철학자들은 객관주의자이다. 그들의 생각에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있다. 상대주의는 서구에서 새로운 정설이기 때문에, 중국의 성인들이 객관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라.
The diagram on the left illustrates the hermeneutic circle inside the text: sentence S1 is understood in terms of S2, which is understood in terms of S3 … until we come to Sx, which is understood in terms of S1 again. The diagram on the right illustrates the hermeneutic circle between the text and the reader: the reader brings preconceptions to the text, but when these fail to make sense of the text the reader is led to question her preconceptions (both about the meaning of the text and about the world in general).
왼쪽의 도해는 문건 내 해석학적 고리를 설명한다. 문장 S1은 S2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S2는 S3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Sx에 갈 때 까지, 그것은 다시 S1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오른쪽의 도해는 문건과 독자 사이의 해석학적 고리를 설명한다. 독자는 그 문장에 선입관을 끌어오지만, 그것으로 그 문건을 이해하지 못하면 독자는 자신의 선입관에 의문을 품게된다.(그 문건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세계 전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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