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이래저래 술자리가 많은 계절, 지친 속을 달래주는 시원한 해장국 한 그릇이 생각난다. 중년층 이상이라면 유흥가가 밀집해 불야성을 이루던 무교동을 기억할 것이다. 도심재개발로 말쑥한 빌딩들이 들어서며 과거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1970년대 이름 날렸던 디스코텍 코파카바나 근처 ‘무교동 북어국집’은 해장국집의 전설로 여전히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무교동 북어국집’은 1968년 진인범(79)씨가 처음 문을 열었다. 원래는 육개장, 돼지머리, 북어해장국 등 다양한 한식 메뉴를 팔던 한식당이었는데, 유독 북어해장국을 찾는 손님이 많았다. 식당의 전문성을 모색하던 진씨는 북어해장국의 맛을 계속 보완하면서 비중을 점점 높이다가 1977년부터 ‘무교동 북어국집’으로 상호를 바꾸고 북어해장국만 팔기 시작했다.
진씨의 북어해장국 끓이는 솜씨가 탁월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진씨는 6·25전쟁 후 어렵던 시절에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장안의 유명한 한정식집에 수양아들로 들어가 요리비법을 전수받았다. 실력 있는 요리사로 독립한 진씨는 이것저것 손을 댔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며 인생의 고비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한정식집 요리사 어머니가 정성껏 끓여주던 북엇국이 그리웠다고 한다. 그에게 북엇국은 따듯한 위로를 건네주는 소울푸드였다. 직접 끓인 북엇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며 기운을 차리던 진씨는 결국 북어해장국이라는 메뉴로 성공을 거두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비법과 함께, 당시 술집이 많았던 무교동의 입지조건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다. 아담한 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북엇국에 푼 달걀로 줄알을 쳐서 바로바로 퍼주는데 뽀얀 국물과 큼직한 북어의 비주얼이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우선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채 따끈한 국물부터 한 술 뜨면 시원하면서도 구수하고 깊은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루 빨려 들어가는 계란과 야들야들한 두부, 부드럽게 씹히는 북어 살들…. 국물에 윤기 자르르한 쌀밥을 말고 토실토실한 새우젓과 부추김치를 넣고 휘휘 저어 먹으면 감칠맛과 산뜻한 부추 향이 퍼지면서 깔깔해진 입맛도 확 살아난다. 조미료 걱정 없이 건강하게 한 끼 잘 먹었다는 느낌이 드는 흔치 않은 집이다. 무엇보다 사골, 북어, 달걀, 두부 등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녹아있는 이 한 그릇이면 간밤의 숙취가 너끈히 풀리니 애주가들의 발길이 절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무교동 북어국집’은 20여년 전부터 진씨의 두 아들 광진씨와 광삼씨 형제가 대를 물려 운영하고 있다. 주로 형 광진씨가 카운터를 보고, 동생 광삼씨는 주방 쪽을 관리하고 있다. 광삼씨는 설거지부터 시작해 주방장 보조만 2년 넘게 하면서 아버지 진씨가 찾아낸 북엇국의 모든 비법을 전수받았다. 형제는 매일 아침 첫 번째 끓인 북엇국으로 식사를 하면서 의견을 나누고 영업을 시작한다. “내가 먼저 먹어 보고 만족해야 손님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죠.”
형제가 가게를 물려받은 뒤에도 초심(初心)을 이어가는 진정한 맛집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하루에 많게는 천 그릇이 나갈 정도로 북적거린다. 그동안 프랜차이즈 문의가 많았지만 아직은 여력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이 집의 북어해장국은 온갖 정성을 들인 음식으로 여간해서는 같은 맛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엇국의 특성상 소량씩 자주 끓여서 바로바로 팔아야 제맛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려면 손님이 많아야 하는데 새로 문을 여는 가게에 이런 점을 적용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 7시면 문을 열고 손님이 드문드문 오기 시작하는 평일 오후 8시, 주말 4시면 일찌감치 문을 닫는다.
▲ 형 광진씨와 동생 광삼씨.
음식은 재료라는 말이 있다. 이 집의 성공비결 역시 최고의 재료를 구하는 데 들이는 지극한 정성부터 시작된다. “한 가지 메뉴이기 때문에 식자재 관리가 더 중요해요.” 진씨 형제는 한우 사골과 채소, 두부는 매일 신선한 것으로 각각 오랜 단골 가게에서 가져오고 오이지와 새우젓도 전국을 뒤져 가장 맛있는 집을 엄선해 들여온다고 한다.
북어는 해마다 강원도 고성의 40년 된 단골 덕장에서 1년 사용분을 특별 주문해 사용하고 있다. 시판되는 북어보다 8일 정도 덜 말린 북어를 주문해 황태와 섞어 쓰는데, 덜 말린 북어는 국물 맛을 깊게 하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질감이 일품이고 황태는 구수한 맛이 좋아 북엇국 맛을 최고점으로 올려준다. 구입한 통북어는 옛날 방식대로 방망이로 두들긴 다음, 대가리를 떼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작두로 적당하게 잘라서 사용한다. 위층에서 가끔 ‘쿵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가 바로 방망이로 북어 몸통을 두드리는 소리다.
사실 국이란 넉넉한 양을 뭉근히 끓여야 제맛이 난다. 조막만 한 냄비에 한두 대접 끓여서는 대가족 시절의 푸근한 국 맛을 내기 어렵다. 특히 북엇국은 북어 대가리와 북어 뼈를 푹 고아서 육수를 내야 하는데, 이 집에서는 여기에 한우 사골까지 넣으니 국물 맛의 깊이와 부드러움이 남다르다. 하루도 어김없이 매일 새벽 5시면 한우 사골을 솥에 안치고 멥쌀 간 것과 북어 뼈, 북어 대가리, 무 등을 넣어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끓여낸다. 육수를 뽑는 데만 꼬박 스물네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북어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재료인 두부를 다루는 일에도 정성을 다한다. 두부 속의 간수가 국물에 우러나면 북어 고유의 시원한 맛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간수를 확실히 빼주는 것이 이 집만의 비법. 간수가 잘 빠지도록 가늘게 썰어서 물에 담가 30분에 한 번씩 무려 8번이나 물을 갈아준다.
이제 문화가 많이 바뀌어 해장국 개념으로만 이 집을 찾지는 않는다. 가족 손님도 늘어났고, 일본의 음식 잡지에서 아시아의 50대 베스트식당으로 뽑을 만큼 외국인 방문객도 자주 볼 수 있다. “북엇국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음식입니다. 외국인들이 찾아와 저희 집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진씨 형제는 이 일이 힘들지만 잘 먹었다며 인사해주는 손님들 덕분에 힘이 난다고 한다.
유명한 정치인, 운동선수, 연예인들도 수시로 다녀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었고 박원순 서울시장, 농구선수 최희섭씨, 배우 유해진씨, 탤런트 고두심씨 등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인 단골이 많다. 그런데 이 집 어디에도 유명인사 사인 한 장이 없다. 분주한 시간에는 누구나 똑같이 줄을 선다.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정성껏 대접한다는 것이 이 집의 철학이다.
이 집에서는 손님이 원하는 만큼 밥과 국물, 건더기를 무한리필 해준다. 이것은 배고프던 시절 값싼 북어로 인심을 넉넉히 퍼줬던 부친 진씨가 만든 전통으로 이 집의 미덕이자 매력이다. 요즘은 북어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단일메뉴, 박리다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싫어하는 재료는 빼준다. 손님을 편하게 해주는 배려다. “건더기 하나” “국물 하나” “파 빼기” “두부 빼기” 종업원들이 추가와 빼기 주문을 연신 외쳐 댄다. 심지어 “건더기 빼기”도 있다. 아예 건더기를 다 빼고 국물만 달라는 주문이다.
1970년대만 해도 북어는 구하기 쉽고 저렴한 서민 음식이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명태 잡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후가 바뀌어서 덕장에서 말린 북어 맛도 전과 같지 않다. 반세기를 지켜온 ‘무교동 북어국집’의 진짜배기 국물 맛을 앞으로 얼마나 더 맛볼 수 있을까. 세대가 지난 후에도 뽀얀 진국의 따듯한 북엇국이 우리 곁에 오래오래 남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