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축제!
우리나라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공통점이 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수시로 외침을 받아, 식민 통치를 받고 유배를 떠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낙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축제를 즐겼습니다. 계절별로,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축제는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세상 살면서 누군가가 나와 일치한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치하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성경을 읽으면 일치하게 될까요? 물론 그것도 일치의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방법을 알 때 사람들을 나와 일치하게 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세바시 1814회 ‘우울증과의 위험한 동거 7년, 기적적인 탈출 스토리’에서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시다』라는 책을 쓴 최의종 씨가 강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있는 최의종 씨에게 아내가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서 달려가 봤더니 몸이 아프기는 아픈데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는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우울증이었습니다.
두 아이이면서도 자살 충동을 끊임없이 느끼는 이 자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집은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빨래를 못 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최의종 씨도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해 주었는데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렸냐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운동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는 나아지지 않고 남편과의 사이는 더 벌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도 거의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아내가 죽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갔는데 그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겉이 멀쩡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신도 아내에게 그런 모습일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최의종 씨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범을 보입니다. 먼저 쉬운 운동부터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합니다. 집이 헬스장이 되어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위해 하는 그런 행동들에 미안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러니 입맛도 좋아지고 7년이 지난 지금은 수영을 자신보다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우울증을 함께 극복한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일치의 핵심이 있습니다. 남편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어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할 수 있다고 믿고 남편을 따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그분이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하신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최의종 씨는 이미 우울증을 극복한 이들의 책을 공부해서 그것을 따라 했습니다. 따라 하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아내가 자신에게 일치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둘이 일치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하.사.시.’를 함께 전하고 있는 카타리나란 자매가 드디어 하.사.시. 10권을 다 읽은 것을 알았습니다. 벌써 다시 2권째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톡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글이 왔습니다. “읽은 날은 죄를 덜 짓고…. 못 읽는 날은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안 먹으면 배가 고프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기도의 효과를 느끼고 있으면… 기도하고 있는 것임.” 그러니 장문의 글이 왔습니다. “이거는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죄많은 저를 늘 도와주고 계심을요…. 그래서 미사 중에 주책맞게 자주 웁니다….^^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을 위해 미움을 기도로 올리니 화해로 결실을 맺게 해주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 또 감사로 기도합니다…. 요즘은 기도의 힘이 너무 큰 것을 알기에 죄인인 제가 그 기도라는 것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 전 요셉 신부님 덕분이에요!!^^”
제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카타리나 자매가 저와 더 일치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것이지만. 저는 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 자매는 그것을 따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저와 일치하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법을 모를 때는 누군가를 나와 일치하게 하는 법을 알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치는 비난이나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진정으로 일치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유다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시기에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외부 강의도 많았고, 특히 본당에서 성삼일을 보내면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를 끝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딱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
놀라운 것은 다음 날부터 아픈 것입니다. 우선 고개를 돌리기 힘들 정도로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 싶었지만, 계속 일정이 있어서 쉴 수 없었습니다. 아픈 목을 부여잡고 억지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 금요일부터는 목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몸 곳곳에 찰과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는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자.”
우리 신앙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께 하는 헛된 맹세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내게 필요한 대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을 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양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주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을 이끄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뜻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주님을 뜻을 먼저 찾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오늘의 명언: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 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 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데모크리토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그분을 알아야만
그분께 순종할 수 있다네.
그분을 믿지 못하면서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을 믿고
내 뜻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사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특별한 현존 방식을 통해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만일 사제인 내가
자신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삶에 내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면
기도하는 사람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기도를 한다고 해도
머리로 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앎은 그냥 아는 겁니다.
깨달음이 없는 앎입니다.
깨달음이 동반되는 앎이야말로 진정한 앎입니다.
봄이 왔는데도 아직도 겨울이
우리 마음속과 삶의 도처에 남아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신앙의 봄’을 맘껏 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 말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