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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묵상글 ( 연중 제31주일. - 길의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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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길의 길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백성의 지도라는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세처럼 주님의 길은 따라가지는 않고 제멋대로 가고,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제 좋을 대로 하니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길은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먼저 그들의 길을 따라가지 않음에 대해 보겠습니다.
길.
길이란 무엇입니까?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어딘가로 가는 존재들인데,
목적하는 그곳을 가기 위해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길잡이가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길을 잘못 인도하곤 합니다.
이런 지도자들에 대해 오늘 말라키 예언서의 주님은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주님의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주님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 또는 다른 길로 인도해 많은 이를 넘어지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면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래서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인데
구약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신약에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주님의 길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법과 길로 잘못 인도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인도해야 하는데
자기의 길로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로 인도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야 하는데 자기를 사랑하게 하고,
주님 뜻을 따르게 해야 하는데 자기 뜻을 따르게 합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많기에 클라라는 유언에서 프란치스코 때문에 이렇게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나 프란치스칸들은 클라라처럼 프란치스코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감사와 함께 클라라처럼 이 길의 길을 놓치지 말고 꼭 붙잡아야 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를 ‘길의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길로 인도하는 길’이 맞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큰길로 인도하는 작은길이요.
하느님께로 가는 큰길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작은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실은 이 작은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작은길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제일 처음 부모부터 잘 만나야 하고
친구를 잘 만나야 하듯이 이 작은 길들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걷는 길이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또한 이웃에게는 큰길로 연결되는 작은 길들이 돼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길의 길’이라면
이제부터 우리도 ‘길의 길의 길’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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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섬기라 하시고 낮아지라 하십니다. 한마디로 겸손하라고 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서 배워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온유와 겸손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2독서에 겸손을 온유와 사랑의 다른 모습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이 온유를 자녀를 품에 안은 어머니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것과 같은 사랑이기에 사도바오로는 겸손을 지니고 온유할 수 있었고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
겸손이 없으면 제1독서에 나오는 내용처럼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고 주님의 법을 어기고 주님의 계약을 깨뜨리게 됩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이 없고 교만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모습이 되어서 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만 집착을 하게 됩니다.
모든 덕행의 기초요 출발점은 겸손입니다. 마귀들이 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성인들의 체험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은 땅으로도 비유합니다. 땅은 좋고 나쁜 것 할 것 없이 다 받아들입니다. 겸손은 침묵으로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힘입니다. 사랑으로 견뎌내는 인내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보호하려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려하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참아주려하고, 특히 그와 함께 행복과 불행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나와 다르고 낯선 사람을 위한 투신의 삶, 다른 사람의 힘든 처지를 받아들일 줄 아는 개방된 자세,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겸손은 아무런 자기주장도 하지 않는 오롯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 홀로 모든 조물의 주인시이며 우리 인간들의 주님이심을 압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누구이시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끌어 줍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에 존경해 주지 않는다고 타인에게 분노할 수 없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만에 빠지지 말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도록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이상한 언어를 해석할 수 있고 천상 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기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미사와 성 이시도르의 경작지
이반(Ivan) 은 그의 말을 듣고 수긍하였다. 그래도 그는 정직한 종인 이시도르에게 맡겨 놓은 밭을 어느 날 몰래 감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이시도르가 새벽미사가 끝나고서야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옆에서는 천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몸집이 커다란 흰색 황소를 끌며 열심히 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가 호기심이 나서 좀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 황소는 사라지고 이시도르만이 있었다. 그는 이시도르에게 방금 사라진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저는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요” 하고 이시도르는 놀라서 대답하였다.
“저는 하느님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청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확실히 이러한 현현(Erscheinung)을 통해서, 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잊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노고를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반 드 바르가스(Ivan de Vargas) 는 이시도르가 잘 경작한 밭을 살펴보았다. 그 밭은 어느 밭보다 많은 수확이 기대되었다.
그래서 주인은 이시도르에게 자신의 전 농장을 관리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우리가 주님께 봉사하는 시간이 결코 시간적인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시도르의 부인 마리아 드 라 카베차(Maria de la Cabeza)도 그녀의 남편 못지 않게 신앙심이 깊었다. 그녀는 이시도르가 자기 만큼이나 가난하고 또 자기 땅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토렐라구나(Torrelaguna) 의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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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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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가을은 신비의 계절입니다. 가을은 우리를 깊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낙엽은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스승이 됩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낙옆”이란 스승에게서 이렇게 배움을 시로 노래합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스승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이제민)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내게 스승이 없다면, 내가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 중에 한 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막상은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스승” 혹은 “참된 제자”에 대해 묻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이 길에서 벗어나 오히려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한 것에 대해 질책합니다.
반대로, <제2독서>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과 그 가르침을 받고 받아들이는 제자로서의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스승으로 불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3-4)
이처럼, 그들의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에게 짐만 지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 23,5 참조). 곧 표리부동할뿐 아니라 위선으로 속였습니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였습니다.’(마태 23,5 참조). <민수기>(15,38-39)와 <신명기>(22,12)에 따르면, 그것을 착용하는 이들이 하느님께 속했다는 표시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미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거룩함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마태 23,6 참조). 곧 자만과 허영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 23,2). 마치, 스승의 자리에 앉은 양 처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한편,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이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수도에서 물을 마시면서 수도관이 대나무로 만든 관인지 금으로 만든 관인지가 아니라, 그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 물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또 복음을 듣는 이로서만이 아니라 선포하는 이인지를, 그리고 실천하는 이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그러니 그저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려가 상대를 높여 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떨어져 땅에 뒹구는 이 가을의 낙엽처럼 돌아가 썩어 거름이 될 자리로 가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는 그대에게 /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 그대여 / 가을 저녁 한 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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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행동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많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어떤이는“4박5일 내내 평상복 흰 수단, 20여 년째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와 검정 구두 차림에 낡은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며 소탈한 모습,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큰 의자를 한사코 사양하며 일반인들과 마주 서 있는 겸손한 모습, ‘파파 프란치스코’를 부르는 소리에 언제 어디서든 멈춰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의 행보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일어나 비추어”(이사60,1)나가는 새로운 힘을 싣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크고 안전한 방탄 리무진을 타지 않으시고 작은 승용차를 타시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당신을 내어주는 여정을 이어가셨습니다. “교회는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하시며 노란 리본을 달으셨던 교황님,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닮은 모습을 기억합니다. 우리 역사관에 교황님 의자가 있습니다. 준비된 근엄한 의자와 실제로 앉으셨던 의자가 아주 대비됩니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약점은 자신들이 스스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한 것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대우하기도 했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자처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참된 어른, 우주만물을 내신 주 하느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남들이 자기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했는데……교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스스로 선생이 되려는 것이 병입니다. 윗자리, 높은 자리, 인사받기, 스승이라 불리기 등은 명예욕에 불과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꼭 수도자에게만 해당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약속한 서원이 있습니다. 그에충실해야 합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이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 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성찰합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오랜만에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집에 얼마간 머물다 보니 당신이 찬밥 신세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생고생하며 아들 교육하고 장가들여 놓았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런 서운함을 지니지 말고 빨리 돌아가자 마음먹곤 메모 한 장을 남겨 놓았답니다.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집안에서 누가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가 보니까 첫 번째가 손주 녀석, 두 번째가 며느리였고 세 번째가 아들, 그리고 네 번째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였고요. 다섯 번째가 집 안에 있는, 고양이였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섯 번째인 겁니다. 그래서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모를 비롯하여 어르신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데리고 살아야 할 아이들은 모시고 살고, 모시고 살아야 할 어른은 데리고 살아갑니다. 자식을 하늘같이 떠받치고 사니까 기본이 서지 않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자녀들이 모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고생시키려면 왜 낳았냐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하긴 변한 모양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몇 번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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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열정적인 춤으로 사랑을 받던 가수 김완선이 부른 노래 중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는 춤을 추며 부르지만 가사는 철학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들 검은 넥타이 아무 말도 못하는 걸/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사 중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교우들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본당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교우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실망하고, 빨리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움이 넘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32년을 사제로 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미사를 정성스럽게 집전하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들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교우들과 가까이 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좋은 강론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재정에 투명하고, 청렴한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신자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성사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챙기려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준비 없는 강론으로 횡설수설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자주 화를 내고, 남 탓을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지나친 음주로 자주 실수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순교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열정적인 사목은 못할지라도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월요일에는 약수터에서 물통에 물을 담아왔습니다. 그 물을 아이들이 마시고, 어른들이 마셨습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으면서 힘든지 몰랐습니다. 주일에는 수녀님과 함께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바닥에 묻은 흙을 청소하면서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 다녔습니다. 사제가 직접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가니 모두들 좋아하셨습니다. 농사지은 쌀, 마늘, 깨, 오이, 고추도 가져다 주셨습니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마당에 쌓인 쓰레기를 모두 담아 치우면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함께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이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서울 청계천으로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사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만화영화도 사고, 종교영화도 사고, 고전영화도 사왔습니다. 아이들이 교리실에서 영화를 보았고, 교우들은 집으로 빌려가서 보았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교우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식당’도 만들었습니다. 태권도를 시작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아이들이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32년 사제생활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입니다. 저를 믿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교우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제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미소를 짓기를 소망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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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오늘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말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란 바로 그 시대의 스승이라 불리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성경을 통해 나오는 것이니 그들의 말을 실행하는 것 자체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고 희생을 이야기하면서 그들 스스로는 희생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용서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그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사람들을 단죄하기 바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사랑과 희생과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절대로 십자가에 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 눈앞에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주님 시대에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빛을 알아보고 어둠에 있다 하더라도 빛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노랗다.
얼마 전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한 장을 봤습니다.
그 사진은 노란색 참외를 넓은 공간에 펼쳐놓은 사진이었습니다.
전부 노란색이었습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노란색이었습니다.
올망졸망, 동글동글
‘각자의 방식으로 노랗다.’
사진 제목을 읽은 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전부 노란색인데,
참외 하나하나 모두 다른 노란색이었습니다.
전부 노란 참외인데, 그 노란색이 전부 달랐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겠지요?
우리는 모두 사람인데
각자의 향기는 모두 다르니까요.
달라서 서로 아프기도 하지만
다르다는 것 자체는 주님의 은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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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완벽주의’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이 기준에 도달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떨어지고 이에 따라 무력감에 힘든 시간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가 요구하는 기준이 됩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연예인처럼 멋지고 예쁠 수 있을까요?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상위 1% 안에 들 수 있을까요? 또 자산은 어떻습니까? 100억 이상을 가져야 괜찮고 그 이하는 실패하는 삶일까요?
자신의 높은 기준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박하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될 때, 그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잘못된 기준을 내세워서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세웠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중첩되어 보입니다. 따라서 생각 자체를 바꿔야 했습니다. 잘못된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백성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모두 틀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 삶의 특권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향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섬길 수가 없겠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상대방에게서 하느님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 자체를 바꾸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을 찾고, 세상의 것보다 주님의 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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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더욱더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의 치료법이 없다(H.D. 도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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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키엣 대주교님.
지위는 봉사를 위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는 봉사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과 만찬을 하신 후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 (요한 13, 12-15)
봉사를 실천하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주님의 권능을 이보다 더 아름답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는 단지 일을 나누는 수단일 뿐입니다. 사회는 여러 조직으로 구성되고 그 조직에는 많은 임무들이 있습니다. 지위는 개인에게 주어진 임무와 책임일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지위는 하느님께서 교회와, 단체, 사회의 권익을 위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지위에 대한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위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부모는 가족을 헌신과 사랑으로 관리하고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자녀를 키우느라 언제나 바쁜 부모는 어찌보면 가사도우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점은, 부모는 사랑으로 자녀와 가정을 관리하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사회에서 지위와 책임을 지닌 사람이라면 가족의 사랑만큼은 아니더라도 사회공동체적인 사랑, 형제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형제애를 지닌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들을 먼저 생각하고 같이 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봉사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위로 형제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 올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최상의 방법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거대한 동상이나, 귀한 장식품이 아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한 조각의 빵이 되셨습니다.
성체의 신비와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체의 신비로 사는 삶의 시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좀더 희생하고 헌신해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성체의 신비로 산다는 것은, 형제를 위해 봉사하는 삶입니다.
성체의 신비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니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사랑의 세상을 위해,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위해 작게 나뉘어지는 빵, 사람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봉사와 헌신의 사랑을 본받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내가 가지고 있는, 나에게 맡겨진 지위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2. 지위와 권위는 봉사를 통해 더욱 높아집니다. 지금 나의 지위는 어떠합니까?
3. 주님의 헌신과 봉사의 사랑인 성체성사의 삶을 살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할 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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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독서와 회개, 사랑과 진실, 섬김과 겸손-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화답송 후렴이 잔잔한 위로를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은 더욱 기도에 박차를 가하는 달입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이고 공부할 때입니다. 구체적으로 독서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밤 12시30분 일어나 수도원 숙소 입구문을 열고 나오며 맨먼저 바라보며 확인하는 불암산 정상이요 하늘의 별들입니다. 이어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바치는 만세육창의 기도입니다. 나라와 세계가 어지러워 8월15일 광복절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앞으로도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계속될 “만세육창”기도입니다. 나뭇가지처럼 양손을 번쩍 들면 “기도하는 나무”가 되고 운동도 되어 참 기분이 상쾌합니다.
저에겐 요즘 계속되는 맨발걷기 운동도 기도입니다. 천국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기도입니다. 제15처 십자가의 길을 아십니까? 수도원 십자가의 길 14처가 끝나는 자리 계단을 올라가면 성전옆에 제 집무실, 암자가 있고 저는 일컬어 15처 “예수님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라는 기도처이자 부활의 집, 천장암, 지족암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침식사후 맨발로 부활의 집, 천장암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길 역순으로 걷다가 주차장부터 수도원 정문까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하늘길을 걸어갔다가 다시 하늘길을 걸어 십자가의 길을 걸어 부활의 집, 집무실에 걸어오면 약20분 소요의 맨발걷기와 침묵의 기도시간을 갖게 됩니다.
제 집무실로 면담성사차 오시는 분은 하늘길과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여 부활의 집 집무실에 오는 것이니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여정인 것입니다. 이런 묵상이 참 행복하게 하며 걷는 운동은 그대로 깨어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이처럼 살아가는 것도 참 멋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저는 서울주보를 1면 “생명의 말씀”란 구요비 주교님 글의 시작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꼭 오늘 강론에 인용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일본에서 선교중인 신부님 한분이 휴가차 오셔서 들려준 이야기기가 심금을 울립니다. 일본에서는 어디를 가나 심지어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에도 ‘서점’들이 있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습니다! 청소년들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주말에도 등교하여 자유롭게 다양한 운동과 예능활동을 하며 자기계발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순간 일본의 건강한 사회 분위기가 부러워 질투심까지 들었고 우리의 병든 사회 분위기가 부끄러웠습니다. 나라 곳곳 어디가나 먹자판 음식점이요 이렇게 음식점 많은 나라도 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아, 먹는 돈을 일부 책을 사서 읽는다면, 곳곳에 많은 음식점과 더불어 서점의 책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먹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책을 사보거나 책을 읽는 데 시간 투자에는 얼마나 인색한 사람들인지요!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영혼을 돌보는 독서와 공부에는 인색한 것, 이것은 분명 건강한 분위기가 아니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독서와 관계되는 문화강국에 국력이란 생각도 떨처버릴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은 주로 종교지도자나 사회지도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일반인들로 소급해도 좋다 생각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반적으로 다룹니다.
첫째, 독서하라!
일본의 경우를 보면서 맨먼저 강조해야할 것이 독서요 공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서와 공부의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평생 독서요 공부요 영혼을, 정신을, 마음을 돌보며 내적시야를 넓히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생각없는, 영혼없는 괴물같은 삶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매일미사전례문도 평생독서와 평생교육에 좋으니 매일 평생 읽으며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가능하면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이 아닌 책을 보기를 권합니다. 미사시간 책대신 휴대폰을 보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품위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로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위로 보고 배울, 희망의 표지가 될 어른이나 지도자가 많아야 젊은이들이 희망을 지니고 의욕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보고 배울 독서하는 공부하는 희망을 주는 정신 건강한 어른들이나 지도자들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믿는 이들은 평생 학인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으로 독서와 공부의 훈련과 습관에 초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런 독서와 공부가 회개를 촉발시키기도 하며 정신을, 삶을 일신시킬 것입니다.
둘째, 회개하라!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삶의 전환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삶, 영혼 건강의 삶입니다. 병든 사회, 병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으면 병들기 마련이요 회개를 통해 희망을, 길을, 빛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궁극의 희망이요 길이요 빛입니다.
제1독서 말라키는 탈선한 사제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일반인들보다 지도자들의 회개가 절실, 절박하지만 모두가 회개의 삶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계속해서 엄중한 경고를 발하십니다.
“자, 이제 사제들아,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계약을 깨뜨렸다. 나도 너희가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리라. 너희는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
참으로 지도자들의 타락과 범죄, 나태가 망국의 원인입니다. 누구보다도 각계각층 지도자들의 각성이, 회개가 절박한 우리나라의 현실이요 일반신자들 역시 회개에는 예외가 아닙니다.
셋째, 사랑하라!
회개의 열매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일행이 지도자들의 모범입니다. 지도자들뿐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런 사랑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범적인 사랑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고귀하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나눴을 뿐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사랑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사제들의 이런 사랑이라면 그대로 신자들도 보고 배웁니다. 지도자들의 모범적 사랑은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지도자들이 부실하다해도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이런 사랑의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진실하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언행불일치의, 표리부동의 위선적 지도자들을, 허영의 지도자들을 질책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고 허영 가득한 우리 인간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안팎이,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운점 없는 진실한 삶 자체가 힘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허영의 외적인간입니다. 속이 텅 빈 정말 생각이 없는 피상적 천박한 사람들입니다.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사람들, 알맹이의 삶이 아니라 껍데기의 삶, 본질적이 아닌 부수적인 것에 노예된 삶, 진아眞我가 아닌 가아假我의 참 공허한 삶입니다.
다섯째, 겸손하라!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할 것이니 우리의 스승은 한 분, 주님이시고 우리는 모두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 것이니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입니다. 또 선생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하나니 우리의 선생님을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우상을 삶의 중심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아버지를,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저절로 겸손에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섬기는 삶, 겸손한 삶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을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진 것이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일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 사랑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사람이요 주님께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독서와 회개, 사랑과 진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중심에 이런 삶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런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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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5. 연중 제3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되고픈 사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23,12)
낮춘 몸
너른 품
열린 마음
밝은 웃음
내미는 손길
다가가는 발길
한결같이
늘 푸르게
그분을 향하여
벗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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