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속 세상
한성환
후드득
둥지로 날아든 개개비
주둥이에 가득 물고
새끼들 먹이려는데
어, 어
작은 것들아
모두 어디로 갔니
개개 개개 개개객
삐비이 비비비
쩍 벌린 큰 놈 입에
몽땅 밀어 넣고
그냥 운다
저 너머
숲속에 둥지가 없어
내가 지은 둥지가 없어
네 집에 맡겨 둔 새끼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
뻐꾸기가 운다
남의집살이 내 새끼
눈치 보지 않고
잘 살고 있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운다.
---애지 2025년 봄호
개개비는 참새목 휘파람새과이며, 중국과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번식하고, 비번식기에는 동남아로 떠나는 대표적인 여름철새라고 한다. 크기는 약 17cm에서 18cm 정도이고, 4월 중순부터 날아와 번식하고 10월 중순까지 관찰된다고 한다.
뻐꾸기는 두견목 두견과에 속하며 그 크기는 약 30cm에서 33cm 정도이고, 해마다 한국에 찾아오는 아주 흔한 여름철새이다. 뻐꾸기의 산란기는 5월 하순에서 8월 상순까지이며, 다른 새(개개비, 멧새, 노랑때까치, 붉은뺨멧새 등)의 둥지마다 1개씩의 알을 낳는다. 한 마리의 암컷이 12개에서 15개까지 알을 12개에서 15개의 둥지에 낳으면 10일에서 12일 사이에 부화되어 다른 알들을 밀어내고 20일에서 23일간 다른 새의 먹이를 받아먹고 자란 후 그 둥지를 떠난다.
한성환 시인의 [둥지 속의 세상]은 요지경 속의 세상이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그 어미새의 한으로 변주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후드득/ 둥지로 날아든 개개비/ 주둥이에 가득 물고/ 새끼들 먹이려는데/ 어, 어/ 작은 것들아/ 모두 어디로 갔니”라는 시구는 자기 자신의 새끼들이 몽땅 사라진 것에 대한 놀라움을 뜻하고, “개개 개개 개개객/ 삐비이 비비비/ 쩍 벌린 큰 놈 입에/ 몽땅 밀어 넣고/ 그냥 운다”라는 시구는 그냥 얼떨결에 자기 자신의 새끼에게 먹일 먹이를 뻐꾸기 새끼에게 먹여야만 하는 개개비의 슬픔을 뜻한다.
이에 반하여, “저 너머/ 숲속에 둥지가 없어/ 내가 지은 둥지가 없어/ 네 집에 맡겨 둔 새끼/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 뻐꾸기가 운다”라는 시구는 자기 자신의 집이 아닌 남의집에 새끼를 맡긴 뻐꾸기의 슬픔을 뜻하고, “남의집살이 내 새끼/ 눈치 보지 않고/ 잘 살고 있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운다”라는 시구는 자기 자신이 손수 키우지 못하고 개개비에게 양육을 맡긴 뻐꾸기의 슬픔을 뜻한다.
개개비는 키와 몸집이 작고, 뻐꾸기는 키와 몸집이 크다. 개개비는 집을 잘 짓고 새끼들을 잘 기르고, 뻐꾸기는 집을 짓지 못하고 새끼들을 잘 기르지 못한다. 개개비는 외부의 침입자에게 살육과 약탈을 당하는 피해자이고, 뻐꾸기는 남의집에 침입하여 알을 낳고 그 자식들을 죽이며, 그 피해자의 노동력과 그 모든 것을 다 착취하는 가해자이다. 개개비는 원주민이며 모든 것을 다 빼앗긴 노예와도 같고, 뻐꾸기는 제국주의자이며, 개개비의 영혼과 육체를 다 유린한 서양의 기독교인들과도 같다.
개개비와 뻐꾸기는 천적과 천적, 혹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와도 같지만, 한성환 시인의 [둥지 속의 세상]을 따라가 보면 상호 공생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의 먹이사슬의 구조 속에서 그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는 고행자들과도 같다. 먹는 자가 있으면 먹히는 자가 있고, 빼앗긴 자가 있으면 빼앗는 자가 있다. 어떤 때는 절대 강자가 절대 약자가 되고, 어떤 때는 절대 약자가 절대 강자가 된다. 예컨대 사자와 호랑이와 고래와 코끼리마저도 늙고 병들면 한 마리의 파리와 모기와 구더기들을 이기지 못하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한없이 뜯어 먹히는 생명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개비와 뻐꾸기의 임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인 종족의 번식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원한 맺힌 저주 감정없이 먹이사슬의 구조에 순응하며 서로간에 공생공존하는 것이다.
한성환 시인의 [둥지 속의 세상]은 요지경 속의 세상이며, 그 모든 것이 신비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더없이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가장 압도적으로 인식시켜 준다. 개개비는 자기 새끼들을 다 죽여버린 뻐꾸기의 새끼들을 어쩔 수 없이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고, 뻐꾸기는 어쩔 수 없이 떠돌이-나그네들(유목민들)처럼 자기 자신의 새끼들을 남의집살이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비가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일까? 뻐꾸기가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한성환 시인은 판단중지가 아닌, 이 질문들을 다 무력화시키며, 개개비와 뻐꾸기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을 부각시킨다.
산다는 것은 남의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남의 새끼를 죽인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산다는 것은 다만 속절없이 울고, 또 운다는 것이다.
모든 시는 울음이고, 이 울음이 우리 인간들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