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주관성을 복귀하는 방법
주관성을 어떻게 복귀해야 되느냐? 악한 사탄세계에서는 주관성을 강제로 복귀하려고 합니다. 너는 내가 지배해야 되겠다' 하면서 채찍을 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본성적 주관성의 복귀는 무엇을 토대로 해야 하느냐? 오늘날 사탄세계와 마찬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출세하기 위하여 제삼자를 희생시키고 모해하고 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주관권은 한 때밖에 못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주권자가 있다면 그 주권자는 얼마 못 가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주관성을 제시해 나왔습니다. 그것이 희생과 사랑입니다. 희생과 사랑의 테마를 앞세우고, 갖은 수욕과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 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주관성을 취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자동적인 주관성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명령하면 그 명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딱 걸리게 됩니다. 이것을 안 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하라는 대로 안 하면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편안하다면 그는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편안하지 않은 사람이 통일교회 교인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움직이지 않으니 선생님이 선두에서 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여러분을 시킬 수 없습니다. 그게 다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말한 것은 다 실천했습니다. 복귀원리를 전부 실천해 나온 것입니다. 종족복귀를 말하려면 그 종족의 선두에 서고, 민족복귀를 말하려면 그 민족의 선두에 서고, 세계복귀를 말하려면 세계의 선두에 서야 합니다.
그런 놀음을 하면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발전해 나왔습니다. 모험의 연속이요. 싸움의 계속이었습니다. 투쟁 중에서도 모험적인 투쟁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혁명적인 처소에 있으면서 불어 오는 풍파를 전부 가려내어 오늘날 이만한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수단 방법으로 주관하려는 거기에 복귀의 뜻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일신을 가눌 수 있는 일체의 환경을 포기해 버리고, 세계를 가누어주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려드리기 위해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고자 하는 생활 과정에서만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법도가 제정되는 것이요. 그 사랑을 중심삼고서야 새로운 주관성의 터전이 넓혀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