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9 - 자한(子罕) - ㉖ |
1 | 子曰 衣敝縕袍 與衣狐貉者 立而不恥者 其由也與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값싼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값비싼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유(子路)일 것이다.
敝 壞也 縕 枲著也 袍 衣有著者也 蓋衣之賤者 狐貉 以狐貉之皮爲裘 衣之貴者 子路之志如此 則能不以貧富動其心 而可以進於道矣 故夫子稱之 敝는 낡은 것이다. 縕은 모시풀 솜옷이다. 袍는 옷 안에 솜이 있는 것인데, 대체로 옷 중에서 천한 것이다. 狐貉은 여우와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옷으로서 옷 중에서 귀한 것이다. 자로의 뜻이 이와 같았으므로, 가난과 부유함으로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이로써 도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그를 칭찬하신 것이다.
勿軒熊氏曰 縕枲著 出記玉藻云 纊爲繭 縕爲袍 鄭云 衣有著之稱 纊今之新綿 縕今之纊及舊絮䟽 好者爲綿 惡者爲絮 朱子云 袍謂夾衣有綿在胎底 趙氏曰 枲著則雜用枲麻以著袍也 如今麻薴筋類 可置之夾襖中者 물헌웅씨가 말하길, “縕은 모시풀 솜옷이라는 말은 예기 옥조 편에 나오는데, 솜으로 비단을 만들고, 縕으로 두루마기를 만든다고 하였다. 정씨가 말하길, 옷에 솜이 있는 것을 지칭한 것인데, 纊은 지금의 새로운 면이고, 縕은 지금의 纊과 옛날의 絮䟽이며, 좋은 것은 綿을 만들고, 나쁜 것은 거친 풀솜을 만든다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袍는 夾衣의 胎에 綿이 있는 것을 일컫는다고 하였다. 조씨가 말하길, 枲著는 곧 모시풀과 삼을 섞어 써서 두루마기에 솜을 집어넣은 것인데, 지금의 麻薴筋과 같은 부류로서 夾襖 안에 넣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禮云 貯字亦作著 通作褚作緖 以綿裝衣之謂 운봉호씨가 말하길, “禮記에 이르길, 貯자를 또한 著자로 썼으니, 통상 褚자로 쓰기도 하고, 緖자로 쓰기도 하는데, 綿을 옷 안에 채우는 것을 일컫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與美衣服者並立而此心不動 其志足以帥氣而不可奪矣 烏得不與之 然特其立志之初也 후재풍씨가 말하길, “의복을 아름답게 한 자와 더불어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뜻은 족히 氣를 인솔할 수 있어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그를 인정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그 뜻을 세운 처음에만 그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不忮不求 何用不臧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니 어찌 선(善)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시니,
忮 害也 求 貪也 臧 善也 言能不忮不求 則何爲不善乎 此衛風雄雉之詩 孔子引之以美子路也 呂氏曰 貧與富交 强者 必忮 弱者 必求 忮는 해친다는 것이다. 求는 탐낸다는 말이다. 臧은 착하다는 말이다. 능히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을 수 있다면,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위풍 웅치의 시다. 공자가 이를 인용하여 자로를 찬미한 것이다. 여씨가 말하길,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과 더불어 사귀면, 강한 사람이면 반드시 그를 해치고, 약한 사람이면 반드시 그의 것을 탐내게 된다.”고 하였다.
朱子曰 李閎祖云 忮是疾人之有 求是恥己之無 推明得吕氏說好 주자가 말하길, “이굉조가 이르길, 忮는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求는 자기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씨의 말을 아주 잘 미루어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彊必忮弱必求 曰 世人見富貴底 不是心裏妬嫉他 便羨慕他 누군가 묻기를, “왜 자신이 강하면 반드시 시기하고, 약하면 반드시 탐욕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세상 사람들은 부귀한 사람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면, 곧 그를 부러워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忮者疾人之有而欲害之也 求者恥己之無而欲取之也 是皆爲外物之所累者也 能於外物一無所累焉 則何往而不善哉 경원보씨가 말하길, “忮라는 것은 남이 갖고 있음을 시기하여 그를 해치고자 하는 것이고, 求라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그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들 모두 외물에 의하여 얽매인 것이다. 능히 외물에 대하여 하나도 얽매인 바가 없을 수 있다면, 어디에 간들 선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3 | 子路 終身誦之 子曰 是道也何足以臧 자로가 이 말씀을 평생 동안 외우려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정도의 도를 어찌 선하다고 만족하는가?”라고 하셨다.
終身誦之 則自喜其能 而不復求進於道矣 故夫子復言此以警之 종신토록 외우고 다니면 스스로 그것에 능함을 기뻐하여서 더 이상 도에 나아감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이것을 다시 말함으로써 자로를 경계하신 것이다.
問子路終身誦之 此子路所以不及顏淵處 蓋此便是願車馬衣輕裘與朋友共敝之而無憾底意思 然他將來自誦便是無 那無伐善施勞底意思 朱子曰 所謂終身誦之 亦不是他矜伐 只是將這箇做好底事 終身誦之 要常如此 便別無長進矣 누군가 묻기를, “자로가 종신토록 그것을 외우고 다녔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자로가 안연에 미치지 못한 부분입니다. 대체로 이것은 곧 ‘원컨대, 수레와 말, 가벼운 가죽옷을 친구와 함께 해지도록 써도 아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장차 스스로 외우고만 다니면, 곧 자기의 선을 뽐내거나 공로를 자랑함이 없다는 저 뜻은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이른바 종신토록 외우고 다닌다는 것은 또한 그가 뽐내고 자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차 이 잘하는 일을 종신토록 외우고 다닌다는 것으로서, 항상 이와 같이 한다면, 곧 달리 장족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人惟中無所養而後飢渴得以害其心也 故不能自安於貧而有慕乎彼之富 此心一動 物欲行焉 故雖可已而不已 孟子所謂宮室之美妻妾之奉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類 蓋有不可勝窮之私 由是以失其本心而忌嫉忮害生焉 否則諂曲以求之而不自知其爲卑汚淺陋之心也 子路之志 不牽乎外物之誘 夫子稱之 欲以進其德 惜乎不能充此而上之 至有終身誦之之弊 不然 簞瓢陋巷之樂 當與顔子同之 日用工夫信乎不可遽已也 曰 然 누군가 묻기를, “사람이 오직 마음속에 기르는 바가 없는 연후에야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그 마음을 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로 능히 스스로 安貧하지 못하고 남의 부유함에 부러워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일단 동하게 되면, 물욕이 행해지기 때문에, 비록 그칠 수 있더라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한 소위 ‘궁실의 아름다움, 처첩의 봉양, 아는 자 중의 궁핍한 자가 나를 칭송하는 것을 위하여 행하는’ 부류는 대체로 다 채울 수 없는 사사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본심을 잃고서 질투하고 시기하여 해치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첨하고 왜곡하여 그것을 구하면서도 그것이 비열하고 더러우며 천박하고 누추한 마음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로의 뜻은 외물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았기에, 공자께서 이를 칭찬하여 이로써 그 덕을 증진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로는 이것을 채우고 다시 그 위로 올라가지 못하였고, 종신토록 그것만 외우고 다니는 폐단이 생기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단표누항의 즐거움도 당연히 안자와 더불어 같이 하였을 것이니, 일상적으로 하는 공부라는 것은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음이 확실합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子路能如此本可進於道 今誦所引詩以自喜其能 則不復求進於道矣 夫子所以一揚之一抑之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자로는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기에 본래 道에 있어 멀리 나아갈 수 있었으나, 지금 시를 이용한 것을 외우고 다님으로써 자기가 잘하는 바를 스스로 기뻐한다면, 더 이상 도에 있어 나아감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자로를 한번은 올려주고 한번은 눌러주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是道謂不忮不求之事 何足以臧承何用不臧之語而反之 신안진씨가 말하길, “是道는 시기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다는 일을 말한 것이고, 어찌 족히 훌륭하겠는가?은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을 이어서 한 말이지만 거꾸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 謝氏曰 恥惡衣惡食 學者之大病 善心不存 蓋由於此 子路之志如此 其過人 遠矣 然以衆人而能此 則可以爲善矣 子路之賢 宜不止此 而終身誦之 則非所以進於日新也 故激而進之 사씨가 말하길,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배우는 자의 큰 병폐인데, 선한 마음이 보존되지 않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는 법이다. 자로의 뜻이 이와 같으니, 그가 남들보다 뛰어남이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잘한다고 여길 만한 것이다. 그런데 자로의 현명함으로써 여기에 그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임에도 종신토록 그 말을 외우고 다닌다면, 날로 새로워지는 경지에 나아가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자로를 奮激하여 나아가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義理無窮 此特一事之善 若遽自以爲善 則不復求進於道 蓋喜心生於自足而怠心生於自喜 故夫子又言此以警之 경원보씨가 말하길, “義理는 무궁무진한 것인데, 이것은 그저 한 가지 일의 훌륭함이니, 만약 갑자기 이로써 스스로를 훌륭하다고 여긴다면, 더 이상 도에 있어 나아감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기뻐하는 마음은 스스로 만족함에서 생기고, 게으른 마음은 스스로 기뻐함에서 생기는 것이다. 고로 공자께서 다시 이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자로를 경계시켜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子路好勇 必無忮求 自足於此而道之 故孔子因其無日新之功而進焉 又曰 子路於世間名利關大 界限分明處 已見得破 但其工夫粗踈未入聖賢閫室 所以聖人常欲抑其所已能 進其所未能 잠실진씨가 말하길, “자로는 용맹함을 좋아하였기에 반드시 시기하고 탐욕함이 없었다. 여기에 스스로 만족하여 그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그에게 날로 새로워지는 공효가 없음을 원인으로 하여, 나아가도록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자로는 세상의 명성과 이로움에 있어서, 크게 관련되고 한계가 분명한 부분은 이미 보아서 파악할 수 있었지만, 단지 그 공부가 거칠고 소략하여 성현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인께서는 항상 그가 이미 잘하는 바는 억누르고, 그가 아직 잘하지 못하는 바는 증진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