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레오나르도 은수자
서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성인이지만 그의 생애가 기록으로 남은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는 프랑크 귀족으로서, 성 레미지오에 의해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는데, 국왕 클로비스 1세가 대부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오클레앙으로 가서 미씨의 수도원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리모쥬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조그마한 움막을 손수 짓고, 채소와 과일로 연명하면서 하느님만 관조하며 생활하였다.
어느날, 클로비스 국왕이 사냥을 왔다가 여왕이 죽을 곤경에 빠졌을 때, 그의 기도로 인하여 여왕이 목숨을 건지자 왕은 감사의 표시로 많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는 이곳에다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곳이 노블락 수도원이다.
이때부터 그는 인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프랑스 국왕 클로비스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게르만족을 격파해 대승리를 얻자 가톨릭에 입교했는데,
그때 같이 입교한 장군중에 레오나르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명문 출신으로 무술이 능하고 기풍이 늠름했기 때문에 궁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는 왕과 다른 귀족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진실로 가톨릭의 진리를 해득함에 있어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국왕의 무장으로서 충성을 다 바친 그가 이제는 하느님의 병사가 되어 여생을 하느님께
봉사하기로 결심하여, 세속을 버리고 레미지오 주교를 찾아 그 밑에서 열심히 학문과 덕행을 연마했다.
레미지오 주교는 이를 매우 기꺼이 여기고 그에게 성품 성사를 주어 국내 비신자를 회개시킬 책임을
맡겼던 바,모든 면에 철저한 성격인 레오나르도는 그야말로 헌신적인 노력으로 놀라운 전교 성적을 올렸다.
그의 성덕이 천하에 알려지자 클로비스 왕은 그를 궁정 책임 신부로 초청하던가 또는 주교로 승격시키기를
바랐다.
그러나 겸손하게 그는 그 호의를 모두 사양했는데, 왕은 "다른 무슨 소원은 없는가?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들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레오나르도는 "그러면 한가지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감옥에 가서 제 마음속에 있는 죄수를 지적할 터이니 그들을 석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국왕의 승낙을 얻고 즉시 감옥에서 수명의 죄수를 석방시켜 주고, 수덕 생활을 하기위해 인기척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서 길을 떠났다.
레오나르도는 오를레앙 근처의 어느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수도원 원장은 막시미아노로 그는 그 밑에서 웃어른의 덕행을 본받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오로지
수덕에만 전심하였다.
다른 동료 수사들은 레오나르도의 성덕을 칭송하며 그의 덕을 본받을 정도였다.
성스러운 원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 후임을 맡게 될 것을 짐작한 레오나르도는 훌쩍 길을 떠나 사람의
자취 없는 적막한 곳을 찾아들었다.
그 여행 도중에도 기회 있는 대로 전교를 하며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다.
그는 리모쥬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그때부터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먹는 것이라곤 잡초와 과일뿐이었고 아무도 모르게 심한 고행을 하며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으로 날을 보냈다.
그러나 성덕의 빛은 언제까지나 감출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사이에 그곳을 알고 그의 지도와 위로의 말을
갈망해 모여드는 신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그중에는 비신자까지조 많이 끼여 있었으며, 레오나르도의 열렬한 권면에는 모두 마음을 가다듬어 맑은 샘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들 개종자 중에는 그대로 머물러 그 지도하에 경건한 생활을 열망하는 사람들도 생겨 레오나드로든 그들을 위해 소성당과 초막을 마련했다. 이것이 훗날 유명한 노블락 수도원의 요람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도 그의 행실을 기꺼이 여기시어 그의 기도에 기적으로 보답하여 주셨으니, 하루는 그가 기도할 때 수정같이 맑은 샘이 땅 속에서 솟아난 일이다.
또한 그의 기적의 힘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먼 곳에서 찾아온 난치(難治)의 환자가 완쾌되어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돌아갔으며 영혼의 병자인 죄인들도 회개해 훌륭한 생활로 다시 살아난 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듯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보낸 레오나르도가 천국으로 떠난 때는 559년 11월 6일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