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2
6월25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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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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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JjI74yFa-4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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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또 다시 오랜 분단의 세월을 돌아보며,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야 하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특별히 오늘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하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 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 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강력한 소비에트의 철조망도 제거되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구상 유일하게 남과 북 사이에 세워진 무시무시한 철조망은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이자 치욕꺼리이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크게 상처를 주고받은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과 새 출발을 위한다면, 가장 우선적인 일은 일단 만나는 일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자주 만나면 좋습니다.
일단 그를 만나서, 그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말을 듣게 될 때, 좀 더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함께 소통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때, 그간 감춰두고 있었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간 쌓였던 오해가 풀립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화해와 일치는 한결 용이해질 것입니다.
일 년 이년도 아니고 반 백년 이상 계속되어온 첨예하고 복잡한 화두가 평화 통일이기에, 더 오랜 고민과 성찰, 뼈를 깎는 노력과 큰마음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과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는 외세는 결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통일 이후 자국에 끼치게 될 경제적 손실과 다양한 측면의 데미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남북 분단은 국제정치패권세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이기 때문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외치던 수많은 민족 인사들이 속속 제거되었습니다.
국제정치패권세력인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에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815 해방 이후 유럽 쪽 전범 국가인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쪽 전범 국가인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승전국가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가로막는 분단 고착화 세력은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는 강대국들에 빌붙어 제 한 목숨, 제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독재자들을 거듭 배출시켰으며, 기회주의의 명수인 친일파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들은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정당 안에서, 여러 매체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선량한 국민들을 호도시키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 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 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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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통일을 원하면 북한에 도움을 청하라>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왜 큰 비용을 들이며 이념도 다른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이들과 참아가며 살아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결혼과 아기를 낳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왜 그런 고통을 분담하며 결혼해야 하고 아기를 키워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그런 일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일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이 반은 맞는 복음이지만, 동시에 반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내가 용서해 주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둘이 화해가 이루어질까요? 화해는 쌍방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조건 손해 보고 상대는 무조건 용서받는 식의 화해는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부분 “통일하면 너희가 얼마나 좋은 줄 알아?”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는 자유도 없고, 돈도 없고, 종교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내가 도와줘야 해!”라고 하면 상대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런데 참 행복은 돈과 명예나 성공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자존심만 남습니다. 그 자존심이 우리 통일을 저해하게 할 것입니다.
‘스탠리 밀그램’은 상황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을 수도 있는 정도까지 전기충격을 가하게 하는 유명한 실험을 한 심리학자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누구나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고는, 무조건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을 시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무조건 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보다 두 배 정도나 높았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 중의 68%가 자리를 양보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실험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이 다시는 그런 실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 상처들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밀그램이 직접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청해보았습니다. 물론 70% 정도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는 순간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굶을 수도 있고 죽음까지 받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내가 더 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상대의 자존심을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가스라이팅’, 곧 심리적인 지배를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쓰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밥을 먹여 주고 양치질과 세수를 시켜 주고 학교까지 바래다준다면, 지금이야 엄마가 그렇게 하게 허락하겠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의 탓을 엄마에게 돌릴 것입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부담스럽게 만들어 상대를 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한 번은 적십자에서 일을 하는 유럽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과 한국으로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북한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맑고 밝고 웃음기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지하철에서 그는 웃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못 봤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통일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준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관계는 언제나 갑을 관계이지 친구가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처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저출산율과 경제성장률 둔화 때문에 어쩌면 유일한 돌파구가 통일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더 필요로 하니 북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독히도 미워하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그 상대가 자신이 읽고 싶은 귀한 책을 한 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좀 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순순히 책을 빌려주었고 프랭클린은 잘 읽고는 너무 좋은 책이라는 감사와 함께 돌려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북한과 우리 가족, 그리고 모든 이웃에게 나아가야 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겸손입니다. 친구가 되려면 도움을 청하십시오. 많은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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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그리스와 터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4년 전에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순례의 여정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는 54명이 신청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30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새삼 ‘바오로 사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와 터키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습니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서 굳게 닫혔던 로마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한 국가였던 로마의 길을 따라 ‘PAX ROMANA'는 ’PAX CHRISTIANA'가 되었고, 교회는 오랜 박해의 터널을 지나 유럽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유일한 사도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박해하였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러 가는 길에서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워낙 강열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몇 번에 걸쳐서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막에서 3년 동안 자신이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는 예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했고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와 터키에 전해졌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부활’은 희망이었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는 아직 ‘복음서’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선교한 공동체를 격려하거나, 엄중하게 책망할 때 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그것이 신약성서의 한 부분이 되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공동체가 분열 할 때는 일치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이교도의 풍습에 빠져들 때는 엄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성령의 감도로 성장할 때는 축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절망 중에 있을 때는 희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업적과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계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면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생활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할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이라는 ‘틀’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러 글들이 있지만 저는 오늘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전해준 ‘사랑’의 축복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에게도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평화와 자유가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일치와 화해가 넘어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하여 남과 북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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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 믿고 용서 못 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18,19-22: 기도와 용서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였다.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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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안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ㄴ-20)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긴 세월 동안 조국 통일을 위해서 기도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데 왜 통일이 안 되는 것일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제대로 마음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목소리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제각각 다른 통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평화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 많지만, 무력 통일을 바라는 사람도 있고, 통일이 아니라 전쟁을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북 갈등만큼이나 남남 갈등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 내부에도 그런 갈등이 있으니,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는데, 이렇게 마음이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함께 계셔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입니다.> 요즘 길거리에 붙어 있는 정당의 현수막들 가운데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애국자 행세를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흐려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양들이 이리 떼와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가능할까? 화해와 일치는 ‘선(善)의 실현과 완성’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인간의 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입니다. 화해와 일치는 인간들만의 화해와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양들이 양이기를 포기하고 이리 떼로 바뀌면, 이리 떼와 한 덩어리로 뭉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화해도 아니고 일치도 아닙니다. 선을 포기하고 악과 타협하는 것은 화해와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참된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면 ‘하느님의 선’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지켜야 하고,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즉 악인들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사람의 힘으로는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도 주님의 힘으로는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선과 악은 화해할 수도 없고 일치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악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선’ 안에 모일 때, 그때 비로소 참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할 일은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 그리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앙갚음 하지 마라.”, 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가르치셨는데(마태 5,38-48), 루카복음 17장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도 주셨습니다.(루카 17,3ㄴ) 사랑한다면 죄를 꾸짖어야 합니다. 죄를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화해와 일치도 아닙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신 것은,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지 않은 채로 “나를 용서하여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용서를 청하는 일은 ‘요구’가 아니라 ‘간청’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언제든지, 무한정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으면,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제대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꾸짖고 타이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가르치셨고(요한 13,34), 바오로 사도는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권고했는데(에페 4,32), ‘서로’라는 말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용한 표현이고, 실천하는 입장에서 사용할 말은 아닙니다.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해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그 ‘서로’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서 이렇게 긴 세월을 허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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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한국 교회는 전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남측과 북측이 휴전에 합의한 지도 어느덧 칠십 년이 훌쩍 지나 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적으로 여겨 총을 겨눈 세월이 이토록 길게 이어져 오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남북 정상이 만나 한반도 평화의 해법을 찾아가며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화해의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고, 지금은 언제 그러하였냐는 듯이 더 강한 수위로 서로 위협하고 비방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반목과 대립이 계속되는 슬픈 역사에 우리는 언제 마침표를 찍게 될까요?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남기신 인사는 다름 아닌 평화의 인사입니다. 산란하던 제자들 마음에 평화를 빌어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불안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평화의 해법을 제시하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가진 증오와 원망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합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주문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기도하기를 주문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내려놓고, 서로를 더 깊이 용서하고, 서로 일치를 이루고자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일들입니다. 물론 칠십 년 동안 쌓여 온 서로에 대한 깊은 불신과 갈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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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열 손가락 깨물면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옛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부모에게는 하나같이 모두가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손가락의 크기와 굵기에 따라 똑같은 강도로 깨물어도 더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자녀가 한 명 이상 있는 분이시라면 여러분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시면 되고, 자녀가 없거나 한 명밖에 없다면 여러분에게도 둘 이상의 자녀들이 있다고 상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잘나가는 자녀가 더 마음에 쓰이겠습니까? 아니면 부족한 자녀가 더 마음에 쓰이겠습니까?
제가 만난 대부분의 부모님은 늘 부족한 자녀가 더 마음에 쓰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종합적인 국력으로 세계 6위이고, 평균 수명은 83세이며, 5살 미만 영아 사망률은 인구 천 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해당됩니다. 인구는 5,100만 명으로 세계 28위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인 북한은 종합적인 국력은 측정 불가이고, 평균 수명은 우리보다 열 살 적은 73세이며, 5살 미만 영아사망률은 인구 천 명당 15명으로 전 세계 최상위권에 해당됩니다. 인구는 2,500만명으로 세계 56위입니다.
신자든 비신자 우리나라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서로 완전히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두 자녀를 바라보시면서 누가 더 마음에 쓰이시겠습니까?
또, 같은 형제인데도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너무 기울게 살아가는데, 나는 불편함이 없다고 형제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북한에 있는 동포를 기억하고, 도와주고, 함께 살 생각을 하자고 하면 일각에서는 사상이 달라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심리적으로 멀어서 굳이 도와주어야 하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시는 것처럼 복음삼덕 중 최고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같은 역사, 같은 조상.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친형제를 외면하는 사람이 과연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많이 용서해 준 것 아니냐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어도 용서해 주어야한다고 하십니다.
북한에 있는 우리 형제를 위하는 마음은 정치, 경제, 사회를 떠나 보편적인 형제애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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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기수 비오 신부님]
<기도하기 지겹다(?) 통일해라!>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 한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 포스터의 문구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어린이의 말에 공감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3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는 7월 26일은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우리는 기도합니다. 혹시 포스터 그리기 지겨워하는 어린이처럼 “기도하기 지겹다. 통일해라.” 하면서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은 적은 없으신가요?
정전협정 체결 당시에는 이 협정을 일시적으로 유지하면서 평화협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고 합니다. ‘서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정전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그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되지 못했나 봅니다.
평화적 해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1994년 북핵 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중재하기도 했던 북한 전문가 박한식 조오지대학교 명예교수는 “평화가 통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통일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무력통일론과 흡수통일론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합니다.
그는 남북한이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를 평화적으로 조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더 높은 차원의 ‘동질성’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랜 세월 남북 분단에서 비롯된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대화와 교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남북한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머니가 같다는 뜻이라면서 희망을 가지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 식민 지배, 남북 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같은 너무나 큰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민족의 이 상처를 치유해야만 평화 통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민족의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의 해결은 오직 용서에 있다고 하십니다. 용서야말로 ‘화해로 이르게 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통일된 한반도를 기쁘게 그리는 그날이 오기를 오늘도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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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지 말 것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하자>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1998년 안식년 땐 남쪽을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 걸어 다녔고, 2009년엔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 소망은 한반도 북쪽을 걸어서 백두산 천지에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꿈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골육상잔의 가슴 아픈 날입니다. 지금은 대화가 끊긴 지 오래고 신뢰도 바닥입니다. 무슨 화해요, 일치요, 통일인가 싶습니다. 로켓 쏘아 올리고, 로켓 쏜다고 군사훈련 강화하고 서로 위협적으로 으르렁 댑니다. 다른 나라와 무슨 동맹이다, 선언이다, 협정이다 하지만, 평화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습니다. 당사자들이 대화하지 않는다면 불안과 두려움만 가중될 것입니다.
1. 오늘 복음의 앞 단락에서, 주님은 잘못한 형제에게 여러 번 타이르고 충고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 하십니다.(마태 20,17 참조) 주님의 이 말씀은 그 형제를 무시하고 단죄하라는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세리 마태오를 사도로 삼으셨고, 이민족이라면 더욱 보살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만 지금은 충고나 어떤 시도 등을 멈추라는 겁니다.
화해를 원한다면 상대가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행동을 피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예지(叡智)는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북의 관계에도 이를 적용해봅니다. 대화가 안 되면 일단은 멈추는 것입니다. 말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를 돌아보고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는 겁니다. 성찰과 경청입니다. 왜 신뢰가 깨졌는가? 대화의 걸림돌이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 화해할 마음이 있는가? 분단 상황을 정권 강화나 자신들의 기득권 강화에 유리하게 이용하는 이들이 있는 겁니다. 남·북 모두 마찬가집니다.
이제는 청소년 가운데 절반 이상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왜 북은 핵에 목을 매는가? 적화통일이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것인가? 북의 경제력은 우리의 사백 분의 일 정도라고 합니다. 경제력이 바로 전쟁 수행 능력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북의 입장입니다. 핵무장(전쟁 무기)을 생존 카드로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보장받고 싶은 북의 심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인간관계에서도 형제끼리 불목하고 원수처럼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해결책으로 거듭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같은 민족끼리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일치나 통일을 얘기할 때 힘이 약한 쪽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합시다. 힘 있는 쪽이 진정성을 보여야 합니다.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겁니다. 상대 존재를 인정해주고 가시 돋친 말을 삼갑니다.
오히려 서로 닮은 것을 말하고 동질감을 확인하며 기뻐합니다. 안보라는 말보다 평화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국제적인 제재(制裁)가 진행 중이라도 인도적인 지원은 아끼지 않습니다. 서로 왕래하고 경제 협력이 될 때 우리도 득이 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입장에 설 때 대화가 잘 될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안보 제일주의를 내세웁니다. 압도적 군사력 등 전쟁 준비 운운합니다. 자신들이 뭔가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나 봅니다. 어떤 이는 전쟁이 나서 상대국은 다 죽고 우리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전쟁은 전쟁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총포가 아니라 따뜻한 형제애입니다. 정치인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도 마주 앉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온유한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상대가 위협적으로 나온다 해도 놀랄 필요 없습니다.
원래 두려움 많은 개가 사납게 짖어대는 법입니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면 철책을 거두고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일치의 성령께서 조만간에 북쪽을 걸어올라 백두산 천지에 발을 담그게 해 주실지.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민족의 화해를 위해 기도합시다. 무엇보다 용기 있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오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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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다슬 안드레아 신부님]
<6·25, 남침이냐 북침이냐? 합침이다!>
‘고생이 많았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서 당신과 만나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공유하는 일은 제게 큰 기쁨이에요. 당신도 제게 큰 기쁨이에요.’
하루를 마치고 조용히 기도하는 누군가에게도, 한 주간을 보내고 오늘 성당에 온 우리에게도, 정전 70주년에도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만 일치를 도모하는 이 땅의 모든 이에게도, 이 인사말은 어울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귓가에 속삭이시는 말로 여기고 대해보면 마음을 평화로이 가꿀 수 있습니다.
이 인사말을 만나고 기분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여러 가지 느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벅차다.’는 복된 감정도 함께 예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감격, 기쁨, 희망이 넘칠 듯이 가득하다는 이 ‘벅참’의 정의를 근거로, 벅찬 감정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킴을 봅니다.
힘들거나 화가 나고, 울적할 때, 그러지 않고 싶다는 마음과 그러고 있는 몸이 분리되어 괴로운 것과는 다르게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그 첫머리에는 이러한 고백이 실려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 만물이 하늘 아래 있고,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듯이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어야 일치를 이룹니다.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합침이 필요합니다.
일치할 때 비로소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면 벌써 70여 년 전 민족 간 전쟁으로 인해 분열된 우리나라의 사정은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점차 남과 북의 고착화가 심해지는 것 같고 본래 하나지만 갈라진 이 두 지역 사람들 간에 느끼는 통일, 일치, 화합의 필요성도 점차 무뎌져 가는 것만 같아 안쓰럽습니다.
일치를 이루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제한이 뒤따르지만, ‘한민족’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갈라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회복은 꼭 필요합니다. 합침이 필요합니다. 단 한 분이신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 일치를 이루고 계신다면, 단 한 분이시며 또한 만인의 아버지이신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 것 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께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를 이끌어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고 그들도 서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분명 주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 거룩한 이름 안에서 하나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보낸 성령강림 대축일을 통해 성령께서 강림하심을 기리는 우리이니, 성령을 모심으로써, 일치의 성령을 염두에 둠으로써, 성부, 성자와 일치를 이루기를 말씀하신 것처럼, 한민족인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 민족도 갈라진 이들과 하나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일치와 통일을 바라기 전, 내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를 어지럽히는 것들 앞에서, 그분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루어야 할 소명이 그와 상호 작용하는 오늘을 이뤄 가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드러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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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어언 70년 훨씬 넘게,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꽤 긴 시간이지만, 우리 민족의 심리적 시간은 언제나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길 바라는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명절 때면 가끔 이산가족 상봉을 보곤 하였지만, 이제 이마저도 중단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한때 남과 북이 참으로 소통하고 왕래할 날이 곧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잖아요. 남북의 화해, 곧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며 성취되어야 할 소원입니다.
복음은 우리 민족에게 남북통일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너희가 한반도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예전 마더 데레사 성녀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분열을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남북의 모든 이가 한 마음으로 그 어떤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남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라고 언약하신 대로, 두 사람 곧 남과 북이 함께 기도하면 꼭 남북통일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화해를 위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에,4,29)라고 강조하듯이, 서로 좋은 말로 상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저해하는 행위 곧 신뢰를 깨는 악의惡意 찬 상호 비방을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뢰 회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첫걸음은 바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나 되는 방법으로 용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느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때 이렇게 강론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통일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옆의 형제들을 용서하십시오.” 사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릅니다. 가족 간에 서로 미워하며 갈라지고, 이웃과 직장동료와 국회에서도, 또 교회에서도 서로 갈라지면서 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한다고 한들 뭐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부터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더 큰 용서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을 때 따라오는 것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할 횟수는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죄의 크기,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강도, 이 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한번 잘못하면 그것으로 관계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속였다면 더 이상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라면 서로 잘못하고 다시 화해하고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흔히 ‘가족은 웬수다.’라고 말합니다만, 가족은 아무리 잘못해도 함께 살아야 할 피붙이기에 결코 단절하고 절교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또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마 부부는 몇 번 싸웠다고 결별하고 이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이혼하면 남남이 되겠지만, 형제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가장 많이 다투는 것은 형제끼리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싸웠다고 갈라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습니까?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18,21) 라는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제 형제가 몇 번이나 저에게 죄를 지으면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 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일곱 번 ? 형제가 나에게 일곱 번 잘못하고 나면, 그 관계는 끝내야 할까요 ? ‘형제’ 라는 표현에 구체적으로 얼굴을 넣어 봅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내칠 수 있을까요 ? 형제와 다툰 경험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설령 형제가 일흔여덟 번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형제라면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형제의 관계입니다. 설사 수 많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쉽게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레위기 19장 17에 보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생략)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설사 형제가 잘못한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해서는 아니 되고 오히려 형제가 돌아오게 하여 함께 살아야 만이, 진정으로 형제 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 이 두 가지는 그 형제를 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궁극적으로는 형제 라는 관계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화해의 노력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남북은 화해가 필요한 형제 관계입니다.
예수님 용서의 가르침은 상생의 실천입니다. 즉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win win의 가르침입니다. 패자가 없고 단지 둘 다 승리자 되는 것입니다. 즉 용서는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일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열 살 때, 동네 오빠가 자신을 성폭행하려 하자 반항하다가 온 몸에 칼질을 당하고 죽어가면서, 그 청년을 용서한다고 말했을뿐더러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감옥에서도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은 마리아 고레띠가 감옥에 있는 그에게 나타나 그를 회개시켰습니다. 그는 깊이 회개하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살다가 귀천하였습니다. 마리아 고레띠가 용서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구원 못 받고 그 청년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는 둘 다 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정권을 지배하는 김씨 가문과 이들을 떠받들고 살아가는 일부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이지, 단지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모든 북녘 동포들을 미워하고 적대시해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남북통일은 정치적 이념 차이로 서로 갈라져 대립하는 우리 서로가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응어리를 없애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만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나라에 통일을 주실 것입니다. 통일, 통일 외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민족 화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용서의 시를 바칩니다.
『용서의 반대말은 증오랍니다.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증오합니다. 증오를 하면 사람을 죽이고 용서를 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에는 사랑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사람은 원망만 합니다. 자기만 알아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남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기에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면 행복해집니다. 자기도 남도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도 남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자기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면 남의 상처도 감쌀 수 있습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감사함도 없고, 긍정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단지 남의 탓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이 용서해달라고 하기도 전에 용서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 속에 숨겨진 자기의 잘못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는 망각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며, 덮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을 하면 섭섭함이 쌓이지도 않고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면 또 하나의 용서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난 용서해 주는 분량만큼 용서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체 어리석은 인간이 되곤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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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보이는 사람과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 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 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 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 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봉헌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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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의 부모에게 “아기 키우면서 언제 제일 기쁘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요? “걸음마 할 때요.”라고 대답하더군요. 다른 부모도 이때가 정말 기뻤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제 같이 걸으며 어디를 갈 수도 있고, 아이가 이제 컸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고 하십니다.
걸음마는 빠르면 7~8개월째, 늦으면 돌이 지나서 걷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을 걸음마를 할 때, 성인처럼 잘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는다고 “바보야! 그것도 못 걸어?” 하면서 야단치지 않습니다. 걷는 시도하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려고 하면 부모는 큰 걱정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걷다가 넘어지더라도 계속 시도하는 노력 자체를 기뻐하는 부모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된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 먹는 과자를 너무 먹고 싶어서 어머니 지갑에서 몰래 20원을 꺼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죄책감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가계부를 쓰면서 “돈이 비는데….”라며 계속 돈 세시는 모습을 보고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미사에 갔는데, 마침 신부님께서 불붙은 지옥 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돈 훔쳤던 일로 곧바로 지옥 불에 떨어질 것 같아서 미사 내내 울고 어머니께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 한 번으로 우리를 불붙는 지옥 불로 이끄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이끄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문제는 하느님 뜻을 따르려 하지 않는 우리의 나태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대로 살려는 고집스러움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하느님께서는 걱정하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을 기억하면서,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자고 교회는 권합니다. 그러나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도를 멈추려고 합니다. 이제는 함께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면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입니다. 미움으로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는 나태함과 고집스러움을 버리고, 대신 하느님 뜻에 맞게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주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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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함께 계시네>
마태오 18,19ㄴ-22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 함께 계시네>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짐이 아니라
나눔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내침이 아니라
품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름이 아니라
이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맞섬이 아니라
화해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폭력이 아니라
평화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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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공존-
오늘 2023년 6월25일은 연중 제12주일이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해 저는 2살이었기에 기억은 못합니다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전쟁후 50년대 힘들고 가난했던 생활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원수가 되어 완전히 갈린지 73년입니다. 예전 한때 애절이 불렀던,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남북동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나라 살리는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니 6.25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었고 단 하나, 부산-경남 지역 신문에 나온 <“한국전쟁 73년, 이젠 평화를”... 25일 곳곳서 미사, 기도회, 답사>란 기사만 구석에 작게 나와 있었습니다. 이젠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6.25 한국전쟁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의 전쟁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자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평화입니다. 결코 꿈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민족통일, 남북통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에 앞서 평화입니다.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어느 학자의 지극한 이성적, 합리적 글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분단과 적대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이다. 독재를 겪지 않은 청년들에게 세습독재와의 통일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과 조선의 평화공존은 통일의 포기가 아니라 유예다. 독립공존을 거친 평화세대에 의해 통일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이 목적이 되면 언젠가는 한국전쟁처럼 통일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
통일 대신 평화가 목적이 됐을 때 끝내 통일폭력을 넘어 평화공존을 구가할 수 있다. 한국전쟁 73년, 한국과 조선은 이제 국가대 국가로서 보편의 지평에서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침내 항구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박명림)
그렇습니다. 통일이 아니라,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평화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산상설교에도 명시적으로 진복팔단의 참행복중 하나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또 우리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2,14)라고!
정말 남북통일이나 남북평화에 우선되야 할 것은 남남통일, 남남평화입니다. 우리 남한의 한국은 얼마나 내부적으로 산산히 분열되어 있는지요! 치열한 내전상태를 연상케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까닭이나 사연들로 죽어가고 있는지요! 지금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통일이, 화해와 일치가,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델이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본원 숙소 명칭은 “자비의 집”, 자매들 개인 피정집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또 수많이 분들이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어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분이 전송해준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평화와 쉼, 아름다운 성가로, 기도로 이루어진 자연에 가까운 요셉수도원! 몇 년전에 한 무리로 다녔던 이름도 예뻤던 개들! 기도와 일! 인생 참 단순하네요(행동과 최고가치의 동행). 수사님과의 면담, 남편의 외도,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0년동안 살면서.
수사님의 끊임없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갈망들... 수사님의 답변,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서 향기가 나면 남편을 저절로 돌아올겁니다.”인생 달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사님이 계셔서. 또한 우리에게 평화의 집을 허락해 주셔서. 건강하시고 시간들이 기쁨, 행복 가득하기를 아멘!!’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 향기가 나면 남편은 저절로 돌아온다’, 제가 언제 이렇게 멋진 말을 했는가, "인생 달인" 이라니, 감격했습니다. 무명의 아름다운 메시지에 감동하여 ‘진선미’라 작명하여 저장해 뒀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수도공동체 분위기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어느 화가 자매의 요즘 동향도 인상적이라 주고 받은 글도 나눕니다.
“저는 요즘 ‘사랑의 찬미’라는 주제로 돌고래 소재를 그리고 있어요.”
“기막힌 착상이 참 좋습니다. ‘사랑의 찬미’ 역시 참 좋은 하늘에 보물 쌓기입니다. 한결같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남북의 평화공존을, 또 내 가까이서부터 평화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으니 기도와 사랑, 그리고 경청입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 역시 참 좋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리고 ‘간절하고 항구하게’가 기도의 원리입니다. 홀로의 개인기도도 좋지만 마음이 하나된 함께의 공동기도는 더욱 좋습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두명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고맙고, 미사경문중 제가 특히 사랑하는 대목입니다. “주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기도문의 위치도 절묘하게 주님의 기도와 성체를 모시는 영성체 사이에 나옵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입니다.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사랑하면 행복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자 말씀입니다. 결코 무지도 허무도 욕망도 아닙니다. 그러니 평생 말씀을,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할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이 사랑공부 소홀로 급기야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 폐인이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은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우선 말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선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다음엔 용서의 사랑입니다. 용서야 말로 신적 사랑,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내가 살기위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숨쉬듯이, 밥먹듯이 지칠줄 모르는 용서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점에서는 바오로 사도 역시 일치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받았기에 용서입니다. 새삼 사랑의 용서도 은총임과 동시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셋째, 경청하십시오.
사랑의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의 사랑입니다. 귀기울여 듣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 역시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경청의 선택, 경청의 훈련, 경청의 습관,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격동시킵니다.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돌려 주실 것이다.”
강조되는 바, “오늘”이요 “들으면” 이라는 말마디요 운명을 바꿔주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곡선으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참으로 사랑의 경청,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에 시종여일始終如一할 때 우리의 운명도 바뀔 것이요, 굽어진 곡선 인생도 똑바로 펼쳐질 것입니다. 마침 게시판에 붙은 시편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옳거니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나이다.”(시편34,6)
오늘 주님은 고맙게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공존을 위한 길을,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경청하십시오.
기도도 사랑도 경청도, 참 좋은 은총이자 거룩한 선택이요. 거룩한 훈련이자 거룩한 습관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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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정말 용서할 수 없을까?>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자, '남북통일 기원미사가 드려지는 날'입니다.
'화해와 일치'는 '용서의 선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할 때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마태18,19ㄴ-22)은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2)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은 '용서에는 조건이 있을 수 없고, 용서가 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용서한다는 것, 너와 화해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게다가 북한을 용서한다.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드리는 우리들이지만, 철저하게 이념으로 갈라져 있고, 우리들조차도 용서와 화해를 뒤로 미루면서 갈라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제1독서(신명30,1-5)는 주님의 명령을 지키면 잘되고 번성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페4,29-5,2)는 '서로 용서하여라.'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입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4,32)
'나와 너의 구원과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서로 용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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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pFdunqzw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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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20)
발상(發想)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아닙니다.
포기할 수 없는
기도의 길입니다.
끊임없는
봉헌의 길입니다.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건없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상호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화해가 참된
화해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기도의 실천입니다.
실천만이
이 땅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진리는 어렵고
힘든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방이
아닌 힘과 지혜를
기도로 모으는
것입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기도의 회복입니다.
기도는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오해와 편견
모든 모순과
왜곡과
배척을
바로잡는 것이
하나되는
여정입니다.
하나됨의 실천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생과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서로의 얼굴에서
화해와 일치의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올려드리는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드리는
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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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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