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옥시모음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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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기 일식
이순옥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기만 하네
죽음의 그림자는 짙기만 하여
나 그대에게 나를 주려 하네
나 그대를 가지려 하네
서로의 몸에 서로를 각인하는 그
시간은 고작
반각의 짧은 시간이지만
생의 전부를 담고 있는 절절한 열정.
한사코 운명을 피하려 하나
그 모든 몸짓이 다 정해진바
숙명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음을
손끝에도 음률이 흐르는
생의 끝자락
끝내 지울 수 없는 서운함
많은 날의 기다림을 문신처럼 새겨 넣네
*일각 15분
개기 일식 지속시간 최대 8분
실제 관측시간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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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망초
이순옥
너를 놓친 시간이 계속 자라고 있네
원망을 넘어
그 말투, 그 억양, 그 음색
파르르 떨리는 눈빛에서
뚝뚝 떨어지던 진심
지나간 사랑은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거
이미 쓸모없는데도
쓸데없이 반짝거리는 거
그 유리 조각이 상처 입힐 거란 거
알면서도 자꾸 손을 뻗게 되네
추억할 것 없는 추억을 그려
지나치듯 내뱉은 말의 조각들을 모아
기어이, 언어보다 빠른
눈물의 향연으로 결집 되고
언어, 그 뒷면의 면박을 알지도 못한 채
나를 잊은 그대,
잊은 것에 그리워 울다가
눈물 자국마다 그리움으로 피어난 영혼아,
꿈결로도 손 내미는 날 어이 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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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슴도치 딜레마
이순옥
서로에게
감각의 끝을 세우다
격정으로 내닫는 감정의 골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무게
잠시 담았던 설렘은 흔적을 감추고
감정의 파고를 달랬지만
걱정이 일구어지며
나직하게 떨어지는 음절의 심장 박동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일이
고조되며
가지런한 배열을 깨고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툭
불거져 솟구칠 때마다
완벽한 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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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계의 종착지
이순옥
지루한 공방전이 끝나고
모두가 희망에 부푼 날
혼자만 겨울이었다
낮의 길이도 점차 짧아지는
미틈 달 어디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얼음처럼 쌍클한 한 마디
밀린 자의 말은 목적지를 잃었고
기껏 결심한 마음은
정사각형 윤리 틀을 넘어섰다
머릿속에서 일정하게 움직이던
툭 져버린 시계의 세계
시곗 바늘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물처럼 고였던 시간이
이내 반대로 돌기 시작한다
이성은 도도한데
감정은 너무나 얄팍하고
팔랑거리다 무너져 내리는 탑
후회에 단맛은 없다 남은 건
차가운 정적과 불편한 침묵뿐.
미틈달 11월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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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꽃 무릇 추억을 부르는
이순옥
사소함이 행복이었음은
그 사소함이 추억이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고
그리움은 종종 그 추억에서
고개를 내밀곤 한다
옆에 핀 꽃 한 송이
옆에 머무는 이의 따스한 온기
손끝에 희미하게 남은 너의 향기처럼
추억 속에서 아련한
꽃 무릇이 피었다오
10여 년을 함께 일한 나의 벗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받고
깊고 진한 추억에 빠지다
익숙한 향기, 스며드는 물기
세월만큼 쌓인 그리움보다
10여 분 동안 쌓인 그리움이 더욱
클 것 같은
홀로 추억을 보는 건 때로 외로운 일
손끝에서 부서질 듯 건조하던 공기가
과하게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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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를 힘들게 하는
이순옥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 때문에
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마음을 돌이켜
그사람을 축복해
보라하네요
마음 속에 놀라운
평안이 깃드는걸 느낌답니다
우정이란
산길과 같아서
매일 오고가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진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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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눈물 버튼
이순옥
홀로일 때는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존재하면 될 뿐
타인과 감정의 온도를 맞추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다 토해내지 못한 울음이 가득한 곳
지워지지 않은 아픔이고
깊게 할퀴고 간 그리움이며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흉터였다
되돌린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선
시험해보고 싶다
어느 쪽으로 기울까
처마 끝에 새벽이 걸렸다
바람 소리 한 점 스치지 않았다
시린 바람에 하얗게 흩날려
흐르면 흐를수록 더 차가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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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
이순옥
담배, 라이터, 낡고 허름한 지갑
액정마저 금이 간 휴대폰
번호가 맞지 않았을 그래서 구겨버렸을
꼭 쥔 한 장의 복권
저 복권 한 장에 담긴 염원
사력을 다해 지키려는 가정
삶의 원동력, 울타리였을
난 그 복권에서
오랫동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억울함을 입 밖으로 쏟아내지 못한
둥글게 말아 쥔 손끝
걷던 길이 사실은 미로였다는 걸
마른 눈물이 모래로 변하고,
몸도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무의미한 과거가 된.
가벼우려고 애쓴 무거움에서
쌉싸름한 피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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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떠밀다 떠밀리다
이순옥
달이 잠겨 든 식은 찻물은 몹시도 비렸다
두고 온 것들을 그리워하게 하는
가난한 희망이 좀 더 뚜렷해지고
복숭아 속살 같은 진심
말갛게 드러나
너무 길어서 끝은 있을까 하는 날에도
어김없이 날은 밝아왔다
잊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그리움으로 다가오게 하는 마법을 부르는
그냥 그 시시하고 두루뭉술한 단어와
어울리는 날
희망이 밀려오는데
밟고 싶지 않은 절망 함께 떠밀려왔다
발이 닿지 않은 두려움
헤엄쳐 벗어나기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반대편에 서서
순수하게 물었고 악의 없이 권하며
진심으로 청했다
책임을 져야 하는 하루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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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모반 꿈으로 이어진
모반의 꿈
이순옥
벽에 걸어 논 날개
저승사자가 걸치더니
세월에 닳아 반질한 농짝 속에
내 꿈 구겨 넣고
달빛 맺힌 한 따선
침묵에 잠긴 몸뚱일 떠나버렸다
밤새, 예수님과 독배를 마신 몸뚱이
마지막 밥 짓는 보현보살을 만났고
법당에서 뛰노는 아기 부처와
몇백 년 묵은 먼지를 뒤집어쓴
지장보살과 숨바꼭질하는
내 지나간 삶을 보았다
뼈가 시린 자유
황홀한 절망 딛고 탈출한, 이미 소가 돼버린
몸뚱일 잡고 있는 또 다른 날 만났으나
간밤에 왕이 되었던,
옥좌에 앉아야겠노라 큰소리친
난 거기 없었다
그래 별일이 아니다 하나의 밤이 끝났을 뿐
한번은 출발지점에 다시 서야할 때가 있는 것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드문드문 드러난 나무 등걸처럼
내 희망이 고립된 섬일망정 떠다닐 때
다시 한 번 모반을 꿈꾼다
바로 지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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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물들어 가는
이순옥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감정의 선율
기억과 기억 사이로
서로 얽혀 있는 시공간
당신을 위해 참는 건
이상하게도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일
혹은 하얗게 타올라서 마침내
터져버리는 환희를 느끼는 것
권태롭기만 하던 삶이
너로 인해 다채로워지기 시작했죠
붉디붉은 꽃잎 어느 날 흐느낌이 느껴져
생각의 꼬리 자르지 못해
이렇게 잠깐씩
같은 세계에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조금 위태롭지만 달콤한 세상이니까
때론 진실이 필요치 않을 때가 있죠
바로 이 순간,
목소리가 그 길을 따라오라는 듯 나를 끌어요
툭, 건들면 와장창 깨질 것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해결되지 못할 물음으로
제어되지 않을 거에요
당신 향한 내 눈빛의 색채가 수만 번 바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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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민들레의 이름으로
이순옥
가장 낮은 모습으로
입맞추며
마지막 힘을 모아
한 올 깃대를 세우고
행여나 하는 그리움은
노란 등불로 켠다.
갈증 같은 사랑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다시
희망 하나 들고
네게로 가는 길
설렘은 바람에 실어
긴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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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람이 불고 흘러가도
이순옥
때론 여린 들꽃 같은 시,
때론 단정한 난꽃 같은 시를 쓰길
또 때론 강인한 바람꽃 같은 시를 늘 꿈꾸며
낮은 속삭임에도 빗장을 열고
마음속에 저절로 갈피를 끼우게 했던 말들
정돈되지 않은 감정들이 울컥 쏟아져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나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음에는 굳은살이 생기지 않아서
수없이 받아도 무뎌지지 않지만
꽁꽁 싸맨 회한의 짐가방 속
언제나 과거에 갇혀 평행선만 달릴 줄 알았던
내 노래에
유화처럼 색이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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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밤에 쓰는 시
운명, 그 헛되고도 족쇄 같은
이순옥
생각한다.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 속에
홀로 갇힌 자의 쓸쓸함에 대하여
눈 속에는 억겁의 시간이 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미로가 너의 눈 속에 있었다
빈 공간에 쌓이는 먹먹한 침묵
시간의 바깥에 있던 나는
너로 인해
시간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입에서 노니는 한치 단어들이 모여
진실처럼 무겁고
열정처럼 뜨거운 낙인이 되어
빛. 생의 빛과 같은 눈을 바라보며 고백한다
오직 너만이 내게 존재하기를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은 그저 생각일 뿐이지만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말은
약속이 되고 맹세가 된다
운명이란 늘 뛰어넘어야만 하는
벽이자 부숴야 하는 장애물
긴 삶과 짧은 생, 그 한가운데
작은 섬처럼 고인
이 순간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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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밥 한 끼 먹자
이순옥
마주 끼고 앉은 밥상엔
따뜻한 온기 한줄기 없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을 품은
윤기 흐르는 고갈비에도
파삭파삭 부서질 듯 표고버섯 튀김에도
갈 길 잃은 젓가락 허공을 휘젓는다
밥 한 끼 먹읍시다
단어의 중의성이 빚어낸
쓸데없는 착각
결과에 따라 마음은 재정립된다
답은 알고 있었으나 분명
다른 길도 있었을 적절한 순간은 왜
이리도 갑작스럽고 무계획적으로
찾아오는가
영혼 없는 말
평화로운 시간을 잘게 조각 낸다
차마 매듭짓지 못한 말끝에 기어이
미련을 끊어내고
우리 밥 한 끼 먹자
강 된장에 보리밥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고추장 한 숟가락에 아직 푸르른 우리 영혼
쓱쓱 비벼, 그래
우리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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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산국 山菊
이순옥
피할 수 없었던 화사한 아픔 이기지 못해
갓길에 앉아 생살에 떨어지는 꽃
아름다움이 때론
축복이 아니라 징벌이기에 꺾였고
그래도 고집스레 가던 길 되잡아
눈 닿은 데까지 따라와 피는
막막한 절망감에 무너져 내릴 때
부박한 가슴에 저들을 옮겨 와
한 폭의 뜨거운 추상화로
이 산야에 걸어
어지럽도록 아름다운 노란 멀미 같은 생
항변도 못 하고 한없이 낮게 엎드려
짧은 가을
긴 외로움 달래면
돌인 듯 허물어져 앉은 몸
홀 맺힌 바람 가닥가닥 눈물겨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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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상사화 1
이순옥
애절한 것은
저토록
검게 바스러지는가
생각의 그물은 멈추지 않고
마음속에 숨긴 글자
세상 밖으로 꺼내
발끝으로 떨어뜨린다
눈동자 가득 잘게 떨리는 빛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눈 속에
붉은 바다가 담겨있다
태양이 잠자고
삼라만상이
작은 우주가
타오르는 불꽃으로 수없이 담금질하여
마침내 형체를 갖춘
불의 차가움을 품은
봄 연못 위에 그려진 푸른 달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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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세월 2
이순옥
상사에 절절한 시
시절마다 넘쳐흘러도
애틋함, 영구히 지속할까
취하지 못한 옥석
품안의 금강석보다 밝아 보여라
멀리 겨울 산 위로 길은 닫혀 있고
달 그림자에 비친 눈꽃 서슬처럼 푸르다
비껴 가는 사랑
언 손가락에 사금파리를 비비는 일
가문 마음엔 여전히 염천의 하늘이 떴다
달은 이지러지고
수심은 교교히 어둠 속을 배회한다
생각 사이로 얼음장 사이를 드나든 바람이 불다
멀리 있다는 것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의 등을 바라보는 것
눈 속의 담긴 달 이미 졌다했나
조각난 달에도 익숙한 냄새가 난다
설움살이 같은 날 어쩌다 꽃날 같던
봉우리 진 가지에서 맡아지던.
아련한 풀냄새 향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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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소문
이순옥
자장면집 남자가 죽다
긴 침묵에 잠겨있던 새벽
날카롭게 부르짖는 구급차 소리에
서둘러 잠에서 깨어
온 대지를 뒤덮은 눈 위
흰 천에 둘러싸인 주검을 맞이한다
노름을 했단다
빚이 많은가 봐
숨겨 논 여자도 있다지 아마
목숨 끊은 이는 그렇다 치고 자식들과 마누라는 어쩌노
둘러선 사람들은
비애의 늪에 잠긴 듯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눈 위로 굴러가는 바스락대는 가랑잎들
바람결에
조잘조잘 잘도 속삭인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씁쓸한 것들
잘려 가는 기억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날, 문득
자장면이 먹고 싶다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튀어나가는 말처럼
10년을 길들어 온 손이 먼저 자장면집을 향하여
일주일 숙성된 반죽 같은 바삭한 전화기속의 목소리가
소문 뒤에 숨긴
버릴 수 없는 현실로 돌아오게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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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학 선생은 책을 읽지 않는다
이순옥
오랜 세월의 반목,
메울 수 없는 불신
말끝에 마음이 걸려
부표처럼 떠돌 때
부재가 만들어내는 적막함이
나를 추동할 때
초점을 비켜나간 동공이
허공을 더듬이질을 시작할 때
설움의 일몰이 몰려들며
없어진 발가락에 눈물이 흐를 때
사흘 밤낮 그리운 이로 베갯잇 적실 때도
창가로 스며드는 파란 달빛
바람이 연주하는 풍경 소리
낮게 가라앉는 적막
무채색의 시간만 절정을 향해 치닫다
오래 알아 왔다고
전부를 안다는 건 오만
공간을 베어버리는 경고
잘 넘어가지 않던
책장의 한 귀퉁이가 접히고,
드디어 넘어가는 시간의 걸음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벼랑 끝에서
다음 발을 내디딘 사람뿐
단 한 구간도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적인 이유를 덧붙이지도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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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슬픈 거짓말
이순옥
생각은 가장 긍정적이고
그럴싸한 추측으로 넘어가는데
본능이 길을 막았다 소위 말하는 촉!
손톱 밑에 일어나는 거스러미처럼
아주 작고 미묘하게 거슬렸던 순간들
차례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 완벽함이 깨지는 게 두려운 걸까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줄 알았는데
둘러보니 막힌 곳은 딱 한 곳뿐
흔치 않은 동요에 균열마저 생겼다
제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변하는 게 없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기억의 조각 이어붙일 새도 없이
묘하게 신경을 갉아 먹는 시간의 고민
계속 풍화작용 중인 인내심
쇠로 굳어진 심장을 파고드는
녹슨 못의 절규
정적의 함성 같은 비명
공간은 순간 아찔한 공허함으로 마비되고
곧 압도적인 두려움의 파문이 일고
그냥 양심 하나 버릴까
그러면 이 상황, 내 인생이 더 쉬워질까
☆★☆★☆★☆★☆★☆★☆★☆★☆★☆★☆★☆★
《22》
시절 인연
이순옥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버리기 위해선 가져야만 하듯
입안을 가득 메운
씁쓸함에 심안에 구김이 지고
과거의 데이터로
아등바등 현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너무 울지 마라
눈물에 눈을 내주다 보면
행복도 씻겨버릴 수 있으니
끝이 없는 관성에
꿈이 떠밀릴 수 있음이니
담배를 문자의 뜨거운 회한이
연기처럼 공중에 분해되는 순간처럼
이성이 사라지고 언어가 가라앉는 공간
사람은 기억에서 태어나고
평생 그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해 가는 존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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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심쿵주의보
이순옥
이야기는 시간을 덧입으며
전설의 왕이 되어가죠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달려드는 질투와 함께
코를 대어 가까이 대어
그 향기를 샅샅이 맡고 싶다는
음흉한 바람으로
모든 것이 간명해졌어요
모든 후회가 모여 탑처럼 스러져도
정체 모를 분노로 새로이 파노라마를 쓴대도
부정적인 사고는 불운을 그림자처럼 부르죠
추억이 켜켜로 쌓여 큰 지층을 이룸처럼
고요의 찰나, 층까지 닿게 되죠
활짝 피어나기를 거부하는 애잔한 꽃봉오리
무심한 구름 한두 점만 하늘 위를 날아
그 하늘을 고스란히 비추는 호수 속에 갇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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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버지의 꽃신
이순옥
험하던 당신 발
고운 꽃신 신겨지던 날
하도 고와
당신의 긴 잠 굳이 다독였습니다
칠십 평생
논두렁 밭두렁 같은 길
자식들 닮을세라 죽죽 밟아 펴다보니
돌멩이처럼 뭉툭한
무뎌진 대팻날 같은 발
한평생 의지해 온 탯줄 길이와
수의의 무게 싣고
한 마리 나비로 날아오를
영혼보다 가벼울 당신의 꽃신.
출처 : 2022년 《지하철 시민 창작시 공모전 선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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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아주 사적인 영역
이순옥
잠포록한 날씨
날비가 오던 그날 맞닿은 시선을 타고
말로 다 하지 못한 진심이 오갔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고 버거웠다
하얀 안개에 휩싸여
어둠에 가려진 세상
홀로 남은 진심이 텅 빈 집을 채우고
궁금증과 질투심 억지로 끌어내린 자리
그만큼의 욕망이 자리했다
미움도 원망도 퇴색되어
어느새 짙은 후회로 남은 관계
이제 우리가 써 내려갈 내일은
얼마나 깊고 아득할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달콤함과 잔인함 사이
그리움에 갈빗대 아래가 쑤셔와도
모든 인간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어
소멸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 기간이 지난 관계는 폐기된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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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업
이순옥
작년에 말려둔 시래기 한 좨기
꽁꽁 언 꽁치 서너 마리
햇살 아래 제 몸 태워 말린 태양초
잘 익은 된장 한 숟가락
펄펄 끓는 물에서 서로를
비벼대며 섞는 몸
저렇듯 얼마나 자기를 죽여야
또 다른 경이로운 맛으로 태어날까
내 속에 똬리 튼 아집
미련 연민 집착 따위를
이성의 냄비 속에 집어넣고
저토록 끓여보면 참 좋은
모양새로 거듭날 수 있을까
삶의 언저리에 서성대는
깨알 같은 깨달음이건만
깨치지 못한 내 안의 원죄, 유전죄, 자범죄
수수께끼 같은 사슬들로 얽히고설킨
상처와 치유와 행복과 사랑의 굴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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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별과의 함수(函數)
이순옥
세상의 시간은 잠시 잊고
바람의 시간 앞에 서다
내 몫의 적막감을 안고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뒤를 돌아다보는 일은 쓸쓸하다
후회와 미련, 아쉬움이
번갈아 가슴을 들락거리며
알 수 없는 어디론가의 문턱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거부하지 못한
온갖 질투와 시기의 노예가 되어
단절된 세월 속 바스러진 영혼으로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그 곳의
먼지를 닦는다
절망이 머물던 그림자와 함께
멈췄던 시간이 긴장된 울림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이성이라는 제어장치가 고장 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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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인연 부스러기
이순옥
사람들은 각자 주머니 하나씩을 감추고 산다
몸속 어딘가 깊이 감춘 비밀 주머니
참을 수 없는 것
소화해 내지 못한 것
잊고 싶은 것
잊고 싶지 않은 것
들여다볼 수 없는 것
아무리 울어도 흘려 내지 못하는 것
가슴에 품고 있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들
원망 안타까움 그리움
비워지지 않고 채우기만 한 주머니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면
수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랐다가 시작된 기억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나가자 천년바위 목화송이 석하
안개꽃 나무 옥타아브 돌개바람 정상
글샘 수 청천 마정 작은사랑,
설레고 즐거웠던 시간의 조각들
퍼즐이 되어 순식간에 한편의 서사시를 이룬다
가슴이 헐도록 아팠던 순간까지도
질긴 그물이 되어 저 멀리
깊이 던져버린 기억의 주머니가 건져 올라오고
기쁨과 그리움 환희
설렘과 목마름이 번갈아 넘실거리면
모든 것을 표백해
햇살처럼 빠르게 점령해 오는 밝은 감정
공유한다는 건
참 설레는 일이다
교감이라는 서로만의 특권으로 챙기는.
☆★☆★☆★☆★☆★☆★☆★☆★☆★☆★☆★☆★
《29》
인연 플래그
이순옥
세월이 흐르면 감정도 변하는 걸
가슴이 욱씬,
불에 덴 듯 뜨겁게 고통스러워도
눈 속 잠시 피어나 향기만을 뿌리고
속절없이 진 매화꽃을 생각한다
왜 너만 나의 예외가 되는 걸까
정말 모르든, 모르는 척하든
눈동자 위를 그림자로 덮은 이
누구인가
인연은 기억에서 태어나
아롱아롱 삶에 수를 놓듯이 성장한 것이니
이별은 혼자 하는 게 아닌걸
아직 저녁노을조차 거두어지지 않은 시각
설명 못 할 감정이 속을 헤집어 놓은 줄도 모르고
겨울밤을 닮은 눈을 하고선
아직 오지 않은 봄의 말을 한다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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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인연의 무게
이순옥
생의 정점에서 환했던 시간도
두꺼운 백과사전 책갈피에서 떨어진
빛 바랜 나뭇잎 한 장
그 격리의 기억처럼
질리게 아득한 것인가
운명을 거역한 죄
종이꽃처럼 짓밟힌 영혼
어쩌면 인연은
배에 부딪히는 저 물살과도 같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출렁이지만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마지막 기차역에 내려
이제 갈 곳을 아는 것처럼
무거워진 나뭇잎을 하늘하늘 날려
그렇게 한 시절
빛나는 삶을 마감하는 나뭇잎처럼
스쳐 지나간 인연엔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치 않을 약속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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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일급 시각장애인
이순옥
밤이 얼굴도 내밀기 전
고즈넉이 내리는 빗소리에 일그러진 하늘은 점점 침몰하고
불어터진 시간 속을 허우적거리는 잡념의 이파리가 벌써
몇 시간째 과거 속을 유영하고 있다.
뒤틀리는 시간 위
자기 존재조차도 부정되던 우리 영혼의 편린
세상을 다 적시고도 남을 눈물과
고장 난 녹음기처럼 쉴 사이 없이 떠다니던 사랑의 맹세가
몸을 사리는 듯한 아픔에 다시금
머릿속을 하얗게 탈색시켜도 언제나처럼
너의 마음을 볼 수 없는 나는,
나는 일급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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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입덕부정기
이순옥
얼마나 닿고 싶었는지, 너는 알까
목적 없이 바다 위를 떠도는 부표 같은
시작도 못 한 이야기
영혼 안의 양분 모조리
빠져나간 허전한 이 느낌
1초에 한 번씩 마음을 다잡아야 해
심장을 두른 살갗처럼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음을
받아들이게 된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내 것을 벗어버린 거에요
미소 아래 실망을 누르며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선명하게 남을지
세월의 풍화되어 사라질지
잠시 의문 가져보는 걸로 하다
한껏 얇아진 막일지라도
두근대는 속내 들키고픈
아슬아슬 투명한 감정과 본능의
용트림이 계속되는 줄다리기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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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자귀나무
이순옥
너를 보는 순간 나의 여름앓이는 시작된다
평범함을 거부하며
붉은 화장술로 열기를 칠하는 밤에도
우린 뜨겁게 포옹을 했다
감정에 모든 것을 내던진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세상의 험난함과 사람의 무서움을 너무 잘 아는 까닭에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
사실 더, 물리적 거리보다 더 다가가고 싶었다.
시간 속에 남은 슬픔과 고통의 잔재가 몸을 끓게 만들었다
열기를 바람을 삼킨,
그 허망한 향만 짙게 스몄다
?시간의 마모를 비켜가다
엉망진창으로 얼룩진 상념 위
복받치는 서러움만
새로 내린 눈처럼 소복이 덮인다
각고의 인내로 억누른,
가파르게 느껴지는 욕망이 절벽처럼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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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자화상
이순옥
'어쩌다 보니' 흘러가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던,
흘러 가버린 줄 모르고 가버린,
다시 찾지 못하는.
그런 쓸데없는 추억 같은 거라 하지 마!
잠들지 않은 채 꿈꾸듯
가을이 떨어졌어
낙엽 한 장이 가을이라는 계절이었어
한때는 그토록 지나가지 않던 계절이
낙엽 한 장으로 내 생을 닦아내네
가장 소중하고 좋은 삶이라
아무도 못 찾을 제일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타임캡슐 안
수천, 수만 번 쌓았을 행복
세월에 단단해져 버린 굳은살
순간순간 하나하나 가슴에 별처럼 남아
미련처럼 발목에 매달려 있는데
나는 배부른 사자처럼 60대를 눕기로 했어
깊은 사유의 샘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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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죽단화
이순옥
비 내린 다음 날
그댈 그냥 지나칠 순 없네요
아담한 돌담 옆
그리운 어머니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나는 화려하고 선명한 죽단화
어사화처럼 예쁘게 꽃 왕관 만들어
사랑하는 당신에게 씌우고파요
내 어머니 숭고한 사랑을 위하여
새카맣게 봄볕 그을린 얼굴이
화사하게 풀어지면
손톱 밑의 풀물, 우리들 영혼 살 오르던
다신 되돌릴 수 없을
시간 앞에 세우면
겹겹 황금 꽃봉오리를
초록의 치마로 받쳐
이제 내가 깃발 되어
당신의 천군만마가 될래요
봄비에 업힌 바람에 물결 진
벚꽃 청승 옆으로
죽단화가 활짝 피었어요
그리움 소스라친 어머니 웃고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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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하얀 점으로
진딧물
이순옥
하얀 점으로 와
서리꽃으로 필 땐
한때, 너도 아름다운 꽃이었다
제멋대로 놀아나기 시작한
틈 사이로
정체를 엿보기 전까진
살에 박힌 굳은살처럼
내 일부가 된
견고하게 위장한 허위의 한 자락
선명하게 예고된 죽음 앞에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저 악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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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청춘을 파는 여자
이순옥
햇살이 지상으로 내려앉기 전
바람의 탐욕스런 주먹이 그녀의 눈물과 한숨과
청춘을 할퀴고 갔다
세월이 갉아먹은
닳고 닳은 몸뚱이
마지막 남은 한 조각 꿈마저 마비시켜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실의 표면을 넘어
그 이면을 볼 수 없는 오래된 절망마저
정오의 햇살 아래 자근자근 밟히다
인생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는지
저 심연을 스쳐내는 해연(駭然)한 기운
그녀는 오늘도
청춘을
검은 봉지속에 넣어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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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환승이별
이순옥
어김없이 내리는 어둠
잘게 부서지는 꽃들의 빛 사르지 못하고
가까스로 제 몸의 빛을 발하는
날카로운 달빛
수면 위로 얼비친 꽃의 빛과
셀 수 없는 별빛이 아롱지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 함께한 모든 순간
마음의 틈을 절묘하게 비집고 들어 온,
답을 필요하지 않았다
적당한 간절함
온기를 담은 애정
진실함까지 구멍 난 가슴에 기꺼이
손을 담갔기 때문
호기심인 줄 알았다
변덕 같은 것
하지만 그건 공감이었다
상실을 아는 자의 공명
잔인할 정도로 담백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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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희망고문
이순옥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죽박죽 섞여서
추상화처럼 뭉뚱그려졌다
무슨 밑그림 갖고 움직이는지도 모를
낯선 운명의 소리
착각이 도를 넘었던 것뿐,
자른 싹이었다
물도 주어서도 안 되는
그런데 이 불편함,
심장으로 부터 시작된 잠들었던
상처가 문을 따고 나온다
빚이고 , 짐이고, 아픔이었던,
그러니 홀로 행복회로를 돌리지 마세요 그
선, 넘지 말아요
안온한 일상 속에 불안이 자리 잡는다
필요 이상의 고요가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왈칵 차올랐다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절망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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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0 난설헌과의 만남
이순옥
비를 뚫고 안개 강 건너
당신 앞에 섰습니다
흘러간 세월의 무게보다
당신이 짊어진 인고의 무게가
더 가볍진 않았겠지요
아둔하고 오만하여 뜻대로만 상황을 재단한
시대의 아류자지만
허공으로 방울방울 흩어지는 액체들은
당신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 겪어 온
온갖 감정의 집합체입니다
당신의 행보 하나, 하나에 의미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지금의 내가
작게 숨을 쉬는 거라고
내가 걷는 그 걸음 끝에
당신처럼 굳건한 이름매긴 설자리가 있을 거라고,
폭우를 뚫고 화답하는 매미 소리가
힘찹니다 그건 1초를 영원처럼 사는
당신의 세계에 들어 선
마법의 시간을 세상의 시계로
돌아가기 위한 소리
그저 도태된 채로 시간의 흐름을 방관하던
어제와 다른 시각
나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 갈
내 인생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시작 된 날이었어요
2020년 8월 15일
난설헌 생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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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에
다녀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