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 언니 / 한혜영
고향에서 올라와 차장을 하던 화자 언니가 있었어요 승객을 신문지처럼 얼마든지 구겨 넣고 아슬아슬하게 문짝에 매달려 탕탕! 버스를 두들기던, 학생이세요? 물으면 왜? 교수처럼 보이니? 킥킥거리며 들이미는 시커먼 얼굴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던 화자 언니가,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화자 언니가 탕탕! 두들기지 않아도 버스가 떠났어요 추억은 꼼짝 안 하고 시간만 미어터지라고 실은 버스는 달리기만 달렸지요 아무 곳에서나 승객을 내려주지도 않고 태워주지도 않고, 버스는 개뿔! 화자 언니가 있어야 버스지요 공짜 버스를 탔다가 딱히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서 지금까지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버스에서 늙어서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자글거려요 빨간 우체통에 편지도 넣어야 하는데, 마룻바닥에 엎드려 연필에 침 바르다가 군사우편이요! 한 마디에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가로지를 텐데 운전기사 아저씨, 버스 좀 세워주면 안 되나요? 문짝 두들겨 줄 화자 언니가 없어서 정말로 죄송하긴 한데요
—시집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상상인, 2024.11) 제2회 선경작가상수상시집 --------------------------
* 한혜영 시인 1954년 충남 서산 출생.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시조집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 등. 2006년 미주문학상. 2020년 동주해외작가상. 2021년 해외풀꽃시인상, 2024년 선경작가상 수상 현재 미국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