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초교파 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입담으로 하는 재미나는 이야기일 뿐인 것을 설교로 듣고 있자니 참 괴로웠습니다.
이런 목회자들은 주님께 어떤 칭찬을 기대할까 정말 궁금합니다.
오늘은 평창에서 열리는 2박 3일의 장로대회에 부부로 참여합니다.
어제 집회 영향인지 마음이 헛헛하여 뒤척이다가
차라리 일어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본문 주해)
13~22절 :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가이사랴의 베스도를 찾아온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정확히 아그립바 2세로서, 로마와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특혜를 받아 분봉왕으로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의로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는 자였다.
버니게는 남성 편력이 심하고 권력에 길들여진 아주 욕심 많은 여자였다. 동생인 아그립바 2세에게 붙어 살았는데 이들은 근친상간의 의심을 받는 관계였다.
이들이 베스도에게 와서 여러 날을 있었는데 어느 날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바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에 대해 고소하길래 알아보니 바울에게 처벌할 만한 죄가 없었다는 것과 별것도 아닌 것 즉 그들의 종교문제와 예수에 대한 것을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요란을 떨고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로마시민인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여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자신이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그립바가 바울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사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었다.(26:3)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를 믿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즉 구원과는 상관없는 교만한 관심 때문이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아그립바에게 베스도는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 내일 듣자고 한다.
23~27절 : 다음날 베스도는 아그립바와 버니게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위층 인사들을 배심원으로 초청하여 법정을 연다.
베스도는 바울을 재심하게 된 이유로, 황제에게 상소할 제목을 정하기 위해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운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미 끝난 사건인 것이다. 황제에게 상소하기로 판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법정이 열린 것은 베스도 나름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자신이 업무를 빈틈없이 처리하는 사람임을 알리고자 했고 또 유대의 종교와 문화에 익숙한 아그립바를 통해 이 소송의 죄목을 착안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묵상)
아그립바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을 때 베스도는 그 시시한 이야기는 내일 들어도 된다고 말한다.
만약 로마에 대한 반역 문제였다면 심각한 일이니 밤을 새워서라도 들을 것이겠지만 그저 예수라는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베스도나 아그립바나 버니게 같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로마의 권력과 연관된 이야기,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법한, 세상의 것만 관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 앞에서 바울은 26장에서 또 성실하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든 자신이 전해야 할 것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베스도나 아그립바나 버니게에게는 그저 시시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내게는 매일 들어야 할 소중한 복음이다.
어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초교파 여평신도 저녁 집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강사는 설교 시작부터 자신의 간증을 하겠다고 하더니 1시간 40분 동안 정말 간증-죽을 병에 걸린 자신을 낫게 하신 하나님과 그렇게 목사 하기 싫어했는데 목사가 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자신의 위치 즉 목사로서의 성공담 같은 이야기-만 했다.
참석한 많은 교인들은 적당히 목사의 기분을 맞추며, 적당한 때에 아멘도 하고 박수도 쳤다.
그리고 설교 말미에 아주 잠시 본문을 이야기하더니 곧이어 통성기도로 이어졌다.
언젠가 참여한 청소년 집회와 비슷했다.
여기저기 강사로 초청되는 목회자들이 그분이 그분인 듯, 거의 비슷비슷하다.
예수님도 없고, 십자가도 없는 이야기.....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설교에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나만 이렇게 별나고 까탈스러울까?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씀에서 은혜를 찾는 것이 은혜가 아닐까?’라고.......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아멘’ 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은혜가 되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럴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참 겸손한 자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겸손의 문제가 아니라, 분별력이 없는 것이다.
성도가 먹어야 할 양식은 주님의 보혈이다.
그것도 날마다 먹어야 한다. 그래야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앎으로 부활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부활 소망을 가진 자는 이 땅의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혈은 뒤로 한 채, 그저 웃기는 이야기,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 이 자리에 가지고 온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에 솔깃하다. 결국 땅의 것에 더욱 집착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보혈이 아니면 단 한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고백과 그런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보다는 간증에서 들은 내용과 같이 무조건 이 땅에서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가 집회의 공식 기도가 돼 버리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주님 맡기신 양들을 잘 치고 싶었겠지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자로서, 큰 소리 칠 것이 없는 비참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간구할 것이 무엇일까? 주님의 보혈뿐이다.
이 땅의 목사님들- 큰 집회의 강사로 서시는 분들이든,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님이든-이 강단에서 선포하실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빼고 무슨 말씀을 선포할까?
어린 양들이 복음의 말씀보다 간증 -보혈이 없는 이야기, 죄악된 인간의 본성에 딱 맞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듣기를 좋아하니 그것에 맞추어 설교를 하면 자신은 인기를 얻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양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죽거나, 이리 떼 같은 사탄에게 물려가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그러고는 주님을 뵈올 때 어떻게 목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강단에서 언제나 선포되어야 할 생명의 복음이다.
새벽 3시가 다 돼 간다.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지 않고, 묵상의 자리에 앉길 잘했다.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었으니 짧지만 단잠을 잘 것을 기대한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께 연합되지 않으면
세상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저입니다.
날마다 생명의 복음을 듣고 또 듣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제 안에 주님의 피가 흐르게 하옵소서.
그 피가 저를 덮어 정결케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생명수임을 믿습니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이 복음을 선포함으로
주님 맡기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간섭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